1. 하늘의 명령

by 윤영호

1. 몽중(夢中)의 계시

그것은 소리라기보다 거대한 진동에 가까웠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형체 없는 위엄이 날카로운 칼날이 되어 뇌리를 파고들었다.


“검을 만들어라. 이것은 하늘의 뜻이다.”


윤노는 비명을 집어삼키며 자리에서 번뜩 깨어났다.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린 식은땀이 요를 축축하게 적시고 있었다. 꿈속의 음성은 서늘한 냉기를 머금은 채 귓가를 맴돌았고, 잠에서 깬 뒤에도 심장은 갈비뼈를 뚫고 나올 듯 요동쳤다. 떨리는 손으로 머리맡의 냉수를 들이켰으나,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는 차가운 감각조차 머릿속에 박힌 그 기이한 잔상을 씻어내지는 못했다.


창밖은 아직 먼동이 트기 전의 푸르스름한 새벽이었다. 평생 유교의 경전을 읽고 붓 한 자루를 벗 삼아 도를 논해온 서생에게 검이라니. 윤노는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헛웃음을 삼켰다.


“해괴한 꿈이로다. 살생의 병기를 만들라니, 이 무슨 망측한 신의 장난인가.”


그는 애써 불길한 울림을 털어내려 했다. 그러나 그것이 평온했던 일족의 운명을 송두리째 뒤흔들 피바람의 예보였음을, 그때의 그는 알지 못했다.


2. 무너진 낙원

며칠 뒤, 윤노는 평소 가깝게 지내던 문우(文友)들과 함께 인왕산 자락의 깊은 계곡을 찾았다. 옥빛 물이 굽이쳐 흐르는 너럭바위 위에는 향기로운 술상과 하얀 시전지가 펼쳐져 있었다. 초여름의 싱그러운 숲 내음과 물소리가 어우러진 그곳은 지상에 구현된 작은 무릉도원이었다.


“윤 형, 이번 시제(詩題)는 ‘흐르는 물에 씻기는 세속의 번뇌’로 함이 어떠한가?”


백면서생들의 호기로운 웃음소리가 계곡을 울렸다. 윤노 역시 붓을 들어 맑은 물줄기를 닮은 시구 하나를 막 적어 내려가던 참이었다. 바로 그때였다. 고요한 숲의 정적을 깨뜨리며 누군가 허겁지겁 계곡을 타고 올라왔다. 가문의 하인 돌쇠였다. 신발 한쪽은 어디에 흘렸는지 맨발은 피투성이였고, 얼굴은 흙먼지와 눈물로 범벅이 된 몰골이었다.


“나리! 나리! 큰일 났구먼요!”


윤노가 든 붓 끝에서 검은 먹물 한 방울이 하얀 종이 위로 툭, 떨어졌다. 불길함이 엄습했다.


“돌쇠야, 이 무슨 해괴한 차림이냐. 점잖지 못하게 어찌 여기까지……”


“나리,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구먼요! 한양 본가에 금부도사들이 들이닥쳤소! 어르신과 큰따님, 아니 큰 나리까지 모두 역모에 연루되었다고…… 지금 집안이 풍비박산 났단 말아요!”


순간, 윤노의 귀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졸졸 흐르던 물소리는 거대한 해일의 굉음으로 변했고, 눈앞의 문우들은 신기루처럼 흐릿해졌다. 역모라니. 대대로 충절을 지켜온 가문이 어찌 하루아침에 대역죄인의 소굴이 된단 말인가.


윤노는 정신없이 산을 내려갔다. 멀리서부터 보이기 시작한 한양의 하늘은 이미 검은 연기로 뒤덮여 있었다. 가문의 영광과 미래가 서린 기와집은 붉은 화마(火魔)에 휩싸여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며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어머니! ”


그는 이성을 잃고 불길 속으로 몸을 던졌다. 뜨거운 열기가 살갗을 그을리고 연기가 폐부를 찔렀으나 보이지 않았다. 무너지는 서까래 사이에서 극적으로 어머니를 끌어안고 나왔을 때, 한때 기세등등했던 가문은 한 줌의 잿더미로 내려앉아 있었다. 관군들이 화재로 일가가 몰사했다 단정 짓고 철수한 덕에 그는 역적의 혈육이라는 낙인을 피했으나, 대신 이름도 연고도 없는 도망자 신세가 되었다.

3. 선비의 옷을 벗다

고결했던 선비의 자존심은 배고픔 앞에서 먼저 꺾였다. 병든 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해 그는 시정잡배들의 무시를 견디며 장터의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거칠어진 손마디와 갈라진 손톱은 더 이상 붓을 잡을 수 없게 변해갔다. 스스로 목숨을 끊고 싶을 때마다 가물거리는 어머니의 눈동자가 그를 이승에 붙들었다.


그 죽음 같은 겨울의 끝에서 하늘은 대장장이 강 노인을 보내주었다.


“자네, 손을 보니 선비질 좀 한 모양인데, 이 뜨거운 풀무질을 견딜 수 있겠나?”


강 노인의 물음에 윤노는 묵묵히 망치를 집어 들었다. 대장간의 벌건 화로 위에서 쇳덩이가 달궈질 때마다, 그의 가슴속 응어리진 한기도 조금씩 녹아내리는 듯했다. 그는 강 노인의 외동딸 길녀와 혼인하며 선비의 옷을 완전히 벗어던졌다. 매일 땀 흘려 정직하게 쇠를 두드리고, 끼니 걱정 없이 가족이 한 상에 둘러앉는 평범한 행복은 지난날의 참혹한 기억을 서서히 덮어주었다.


그 무렵 아들 ‘윤검’이 태어났다. 아이의 울음소리는 대장간의 망치 소리보다 힘찼다. 윤노는 아들의 늠름한 성장을 보며 비로소 웃음을 되찾았으나, 운명은 그에게 긴 안식을 허락하지 않았다. 젊은 날 겪었던 울화와 고통이 독처럼 쌓였던 탓일까. 윤노는 어느 날 갑자기 낙엽처럼 고꾸라졌다.


자신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예감한 윤노는 어린 윤검을 머리맡으로 불렀다.


“검아…… 내 말을 똑똑히 듣거라.”


그는 생의 마지막 불꽃을 태우듯 아들의 맑은 눈동자를 응시했다. 수십 년 전 꿈속에서 들었던 그 서늘한 음성이 이제는 자신의 목소리가 되어 흘러나왔다.


“검을 만들어라. 그것이…… 하늘의 뜻이다.”


그 말을 끝으로 윤노의 손이 힘없이 떨어졌다. 훗날 천하의 운명을 뒤바꿀 전설, 해인통천검(海印通天劍)의 서막이 오르는 순간이었다.


4. 눈보라 속의 인연

윤노가 세상을 떠난 뒤에도 대장간의 불길은 꺼지지 않았다. 청년이 된 윤검은 아버지를 닮아 집요하고 묵직한 대장장이가 되었다.


그러던 어느 혹독한 겨울이었다. 만물을 얼려버릴 듯한 눈보라가 대지를 집어삼키던 밤, 아랫마을에서 품삯을 받아 돌아오던 윤검의 어머니 강 씨는 고갯마루에서 우뚝 멈춰 섰다. 칼바람 소리 사이로 가느다란 여인의 신음이 섞여 들었기 때문이다.


“누구 없어요…… 살려주세요……”


강 씨는 거칠게 눈더미를 헤집었다. 그곳에는 반쯤 눈에 파묻힌 채 의식을 잃어가는 여인이 쓰러져 있었다. 온기라고는 없는 차가운 몸이었으나 강 씨는 여인을 등에 둘러업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그 험한 눈길을 어떻게 버텨냈는지 알 수 없었으나, 여인의 명줄은 질겼다.


그녀의 이름은 박승희였다. 하루아침에 멸문지화를 당한 사대부가의 외동딸로, 도망치다 죽음의 문턱에 닿았던 것이다. 승희는 한동안 넋이 나간 사람처럼 멍하니 대장간 구석에 앉아 있곤 했다. 쇠를 두드리는 윤검의 뒷모습을 하염없이 지켜보며, 그녀는 무너진 현실을 추스르기 시작했다.


강 씨의 간곡한 권유로 윤검과 승희는 부부의 연을 맺었다. 같은 처지의 아픔을 공유해서일까, 두 사람은 서로를 지극정성으로 아꼈다. 하지만 행복이 깊어질수록 윤검의 내면에는 정체 모를 불안이 짙게 드리워졌다. 아내와 어머니 곁에 있으면서도 가슴 한구석은 늘 시린 바람이 부는 듯 텅 비어 있었다.

그 불안의 정체를 쫓던 윤검의 머릿속에, 잊고 있던 아버지의 유언이 천둥처럼 울려 퍼졌다.


“검을 만들어라.”


번뇌에 휩싸인 윤검의 기색을 알아차린 듯, 어느 날 승희가 조용히 그의 손을 맞잡으며 말했다.


“지아비여, 사소한 안온함에 매여 하늘이 내린 천명을 그르치지 마십시오. 대장부로 태어나해야 할 일을 하는 데 무엇이 후회스럽겠습니까.”


아내의 그 한마디에 천근만근 무겁던 윤검의 마음이 깃털처럼 가벼워졌다. 아내의 혜안이 길을 열어준 것이다.


“어머니를 잘 부탁하오. 나는 답을 찾아오겠소.”


짧은 인사를 남긴 채 윤검은 길을 떠났다. 마음 깊은 곳에 화두처럼 박혀있던 ‘검’의 본질을 깨치기 위해, 그는 스스로 정처 없는 고행의 길로 담담히 걸어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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