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겔8-11장
연희동 주택가의 높은 담벼락들을 지날 때마다 나는 가끔 그 너머를 상상하곤 한다. 정갈하게 다듬어진 정원수와 고요한 정적. 겉으로 보기엔 완벽하리만치 평온해 보이는 저 담 안쪽에도, 과연 내가 앓고 있는 것과 비슷한 종류의 비린내 나는 고민이 숨어 있을까.
사실 세상 모든 '가족'은 저마다의 비밀 공간을 품고 산다. 남들에겐 차마 보여줄 수 없는 거실의 흐트러진 모습이나, 곪아 터진 관계의 상처들.
겉으로는 화목한 척 웃으며 대문을 나서지만, 다시 담 안쪽으로 들어서는 순간 각자의 방으로 숨어버리는 고립된 섬들. 우리는 모두 '완벽한 가문'이라는 가면을 쓰기 위해 지독하게 외로운 비밀을 공유하며 살아간다.
에스겔 8장에서 하나님이 에스겔에게 내리신 명령은 기이하게도 '담을 뚫으라'는 것이었다. 남의 집 담벼락을 뚫고 들어가는 것만큼 무례하고 불편한 일이 또 있을까. 하지만 하나님은 기어이 사명자의 손을 끌고 그 은밀한 담 안쪽으로 데려가신다. 그곳에는 겉으로는 하나님을 섬긴다던 이들이 가장 깊숙한 방에 숨겨둔 추악한 배신의 현장이 있었다.
하나님은 왜 굳이 사명자에게 이런 밑바닥까지 다 보여주셨을까? 모르면 속 편했을 타인의 은밀한 죄를 낱낱이 목격하는 것은 일종의 영적인 폭력과도 같다. 하지만 이 고통스러운 노출 속에 하나님의 절박한 고백이 숨어 있었다.
"에스겔, 나에게는 이제 너뿐이란다. 나의 이 찢어진 가슴을 보여줄 사람이, 이 수치스러운 비밀을 함께 나눌 친구가 너밖에 없구나."
사명이란 어쩌면 하나님의 '비밀 친구'가 되는 일이다. 비밀을 공유한다는 건 단순히 정보를 아는 게 아니다. 상대의 아픔을 내 박동으로 느끼게 되는 지독한 일치다. 하지만 모든 것을 공유하기에 사명자는 아프다. 하나님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순간, 이전에는 보이지 않던 이웃의 슬픔이 보이고, 가족의 가려진 눈물이 읽히기 시작한다. 남들은 보지 못하는 하나님의 탄식을 대신 앓아야 하는 고독한 '비밀 친구'의 자리. 그것은 영광이기 이전에 지독하게 무거운 짐이었다.
작가로서, 그리고 한 아이의 엄마로서 나 역시 이 '비밀 친구'의 무게를 느낀다. 2편에서 고백했던 '가식에 대한 혐오'가 사실은 하나님의 아픈 시선이었음을 깨닫는다. 내가 잘나서 타인의 이중성을 알아챈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당신의 아픈 비밀을 내게 살짝 들켜주신 것이었다.
"내 마음이 이토록 아픈데, 너라도 좀 알아주겠니?"
라고 물어오시는 그분의 외로움에 응답하는 것, 그것이 내가 써 내려가는 문장의 진짜 근원이었음을 이제야 고백한다.
놀라운 반전은 에스겔 11장에 나타난다. 하나님은 이 '비밀 없는 일치'를 장차 모든 백성에게 주겠다고 약속하신다.
"일치된 마음(One heart)을 주고 그 속에 새로운 영을 부어주겠다."
여기서 '일치된 마음'이란 단순히 뜻이 맞는 수준이 아니다. 서로의 담벼락을 허물고, 아픈 비밀까지도 기꺼이 공유하는 상태다. 겉만 번지르르한 '완벽한 가문'을 연기하는 게 아니라, 서로의 못난 민낯을 보면서도 "나도 너와 같아"라고 손을 맞잡는 진짜 가족이 되는 일이다.
결국 사명이란 하나님과 나 사이의 담을 허물고, 그분의 아픈 비밀을 공유할 만큼 가까운 사이가 되는 것이다. 그분의 심장 소리에 나의 보폭을 맞추며, 담벼락 너머의 진실을 함께 울어주는 일. 그 '한 마음'이 되어 오늘을 견뎌내는 것 자체가 이미 누군가에게는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증명하는 가장 강력한 사역이 된다.
오늘 하나님이 우리에게 문득 누군가의 아픔을 깊이 들여다보게 하신다면, 그것은 정죄를 위한 정보가 아니라 당신의 비밀을 공유하고 싶어 하시는 하나님의 초대일지 모른다.
"나와 비밀 없는 사이가 되어주지 않겠니?"
라고 물어오시는 그분의 음성 앞에, 우리 마음의 담을 먼저 허물어뜨려 본다. 비밀이 사라진 그 텅 빈 자리에 하나님의 새로운 영이 깃들 때, 우리는 비로소 세상을 치유하는 '일치된 마음'의 통로로 서게 될 것이다.
“사랑하는 딸아, 내가 너를 담 안쪽으로 부른 건 네가 남보다 깨끗해서가 아니란다. 나에게는 내 아픈 마음을 가감 없이 보여줄 친구가 필요했단다.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배신당한 나의 눈물을 네가 대신 흘려줄 때, 비로소 너와 나는 떼어낼 수 없는 '비밀 친구'가 된단다. 이 무거운 진실을 함께 짊어져 주겠니? 너와 나 사이에 아무런 담벼락도 없는 그 '한 마음'의 자리로, 내가 너를 초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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