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겔 12-14장
우리는 흔히 영특하고 눈치 빠른 사람을 ‘여우’라고 부른다. 세상의 흐름을 기가 막히게 읽어내고, 무너지는 판세 속에서도 자기 몫의 실속을 챙기는 그들을 보며 누군가는 부러워하고 누군가는 혀를 찬다.
하지만 성경 에스겔 13장이 말하는 여우의 본질은 조금 다르다. 거기서 여우는 ‘직면을 피하는 비겁함’의 대명사다.
여우는 건물을 수리하거나 기둥을 세우는 데는 관심이 없다. 그저 무너진 담벼락 틈새에 몸을 숨기고, 썩은 서까래 사이에서 제 잇속을 챙길 뿐이다.
이 여우는 멀리 있는 누군가가 아니라, 사실 우리 마음속에 가장 먼저 둥지를 트는 생존 본능이다.
이 여우가 가장 잘하는 일이 바로 ‘회칠(페인트질)’이다. 곧 무너질 담벼락의 깊은 균열 위에 하얀 수성 페인트를 매끄럽게 덧칠하여 멀쩡해 보이게 만드는 것.
우리는 자기가 왜 아픈지, 그 진짜 이유를 들여다보는 일을 죽기보다 싫어한다. 그래서 뿌리 깊은 상처나 뒤틀린 욕망을 직면하는 대신 그 위에 ‘경건’이라는 이름의 페인트를 덧칠하곤 한다.
누군가 무너진 삶을 들고 찾아왔을 때, 진짜 공감과 위로를 건네기보다 "기도하면 다 돼", "봉사해 봐", "말씀 좀 읽어"라는 식의 가짜 권면으로 그를 밀어내는 것이 바로 그 회칠이다. 상대의 아픈 기초를 같이 보수해 줄 마음은 없으면서, 종교적인 정답이라는 하얀 페인트로 그의 균열을 서둘러 덮어버리며 나의 안온함을 지키는 것이다.
비겁하게도 나는 이 여우의 생존법에 꽤 능숙한 사람이었다. 나 역시 이곳에 글을 올리며 이 대목 앞에서 자꾸만 마음이 덜컥거린다. 사실 나는 대단한 교양인도, 지식인도, 심지어 책을 유창하게 읽어내려가는 사람도 아니다.
그저 매일의 일상을 앓아내는 엄마이자 아내일 뿐이다. 하지만 하나님이 긍휼히 여겨 주신 그 깨달음의 문장들이 내 손에 쥐어질 때, 나는 그것을 내 우월함인 양 착각하며 나를 근사한 작가로 회칠하고 싶은 유혹에 시달린다.
주께서 깨닫게 하신 이 거룩한 언어들조차, 사실은 내 평범하고 투박한 진짜 얼굴을 가리는 매끄러운 수성 페인트로 쓰고 있었던 건 아닐까. 십일조와 봉사라는 페인트를 겹겹이 바르면서도 정작 내 안의 곪아 터진 기초는 외면한 채 "내 삶은 왜 이 모양이냐"며 억울해했던 그 위선이 바로 나였음을 고백하게 된다.
에스겔의 사명은 화려한 벽을 세우는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은 그에게 멀쩡한 자기 집 벽을 곡괭이로 뚫으라고 명령하신다(겔 12:5). 남들이 다 "평안하다"고 하얀 페인트를 칠할 때, "여기가 무너졌다"고 제 손으로 구멍을 내어 그 틈새로 기어 나가는 사람. 그것이 진짜 사명자다.
사명이란 남의 담벼락을 가르치는 손가락이 아니라, 내 담벼락의 페인트를 긁어내는 곡괭이질이다.
나를 증명하거나 포장하는 것이 아니라, 내 삶에 칠해진 수성 페인트가 씻겨 내려가는 부끄러움을 견디며 내 영혼의 무너진 틈에 정직하게 서는 일이다.
내 문장이 누군가의 눈을 가리는 하얀 회칠이 되지 않기를, 오히려 숨겨진 균열을 정직하게 비추어 마침내 살길을 찾게 만드는 투박한 빛이 되기를 기도한다. 페인트가 벗겨진 자리가 비로소 하나님의 영이 새겨질 자리가 됨을 이제야 믿음으로 고백해 본다.
"사랑하는 자야, 이제 그 무거운 페인트 통을 내려놓으렴.
하얗게 덧칠된 그 벽 뒤에서 숨 가빠하는 네 영혼을 내가 이미 알고 있단다.
가짜 위로에 속지 마라. '다 잘 될 거라는' 매끄러운 종교적 마취제 뒤로 숨지 말아라.
네가 너를 가리기를 멈출 때, 비로소 내가 너의 무너진 기초를 만지고 고칠 수 있단다.
부끄러워하지 말고 그 허물어진 담벼락 그대로 내게 나오렴.
네 민낯이 드러나는 그 정직한 자리가, 바로 내가 너를 다시 세울 가장 단단한 반석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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