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겔1-3장
80년대생인 나의 20대는 '나'라는 성(城)을 쌓느라 분주했다. 싸이월드부터 블로그까지, 여기저기서 긁어모은 근사한 문장들은 나를 방어해 줄 견고한 벽이었다. 하지만 그 문장들에는 정작 내 삶의 냄새가 없었다. 나를 증명하고 싶은 허기만 가득했을 뿐, 누군가의 마음을 채워줄 진짜 알맹이는 없었다. 나를 지키려 높이 쌓은 성 안에서 내 언어들은 점차 생명력을 잃고 차갑게 식어갔다.
오랫동안 멈춰있던 펜을 들고 에스겔이라는 인물 앞에 섰을 때, 나는 비로소 ‘진짜 채움’의 공포와 황홀을 동시에 마주했다. 2,600년 전 바빌론의 그발 강가, 서른 살의 청년 에스겔은 인생의 가장 황량한 정체기를 지나고 있었다. 제사장의 꿈은 깨졌고, 남은 것은 포로수용소의 흙먼지와 불투명한 미래뿐이었다. 지독한 슬럼프이자 강제적인 경력 단절의 시간. 그 절망의 한복판에서 하나님은 기이한 명령을 내리신다.
“인자야... 이 두루마리를 네 배에 넣으며 네 창자에 채우라.” (에스겔 3:3)
왜 하필 배와 창자였을까. 이 대목에서 나는 사명의 무서운 본질을 깨닫는다. 채운다는 것은 단순히 무언가를 덧붙이는 행위가 아니었다. 그것은 이미 내 안에 가득 들어차 있는 것들—내 생각, 내 기준, 오랜 습관—을 밖으로 밀어내는 고통스러운 과정이었다.
특히 오랫동안 나를 지탱해 온 '학벌'이라는 견고한 기준은 생각보다 훨씬 질겼다. 아이와 홈스쿨을 시작하며 "대학에 안 가도 좋다"고 말하면서도, 이왕이면 남들 보기에 번듯한 곳에 가길 바라는 이중적인 마음. 집 근처 연대를 산책하며 마주하는 학교 점퍼를 입고 지나가는 학생들을 보며 나도 모르게 스며들던 그 묘한 부러움. 그런 세속적인 기준들이 말씀과 부딪힐 때, 내 창자는 뒤틀리는 통증을 느낀다. 그 학습된 성공의 공식들을 밀어내지 않고서는 생명의 언어가 들어올 자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머리로 듣기만 할 때 말씀은 휘발되지만, 그것을 삶의 현장으로 끌고 내려와 씹어 삼키기 시작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부르심을 주신 뒤, 오히려 그의 혀를 입천장에 붙여 아무 말도 할 수 없게 만드셨다. 입안은 꿀처럼 달콤한 말씀으로 가득한데 밖으로는 한 마디도 뱉을 수 없는 시간, 얼마나 답답하고 막막했을까. 하지만 그 침묵은 저주가 아니라 '발효'의 시간이었다. 내 낡은 고집이 다 분해되고 하나님의 숨결이 내 피와 살이 되기까지, 조급한 내 목소리를 잠재우는 거룩한 기다림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이 비워내고 채우는 과정을 통해 나이듦의 축복을 본다. 젊은 날의 나는 내 기준이 너무 단위가 높고 단단해서 무언가 들어올 틈조차 없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며 실패를 경험하고 내가 믿어온 '정답'들이 무너지는 것을 보며, 나의 성벽은 조금씩 허물어졌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내 힘을 빼는 과정이며, 역설적으로 그 빈자리에 영원한 가치를 채울 수 있는 공간이 넓어지는 사건이다. 그래서 나에게 나이듦은 쇠락이 아니라, 더 깊고 풍성하게 채워질 수 있는 기회다.
사명은 달려 나가는 속도가 아니라, 내 안에 채워진 말씀의 깊이에서 시작된다. 나를 증명하려던 조급함을 내려놓고 묵묵히 삶을 소화시킬 때, 비로소 글에는 온기가 돌고 문장에는 사람을 살리는 힘이 실린다. 나는 오늘도 서두르지 않고 나에게 주어진 ‘오늘’이라는 페이지를 씹어 삼킨다. 내 낡은 기준들이 작아진 그 빈자리에, 이제는 삶으로 써 내려가는 진짜 이야기가 채워지길 소망하며.
“사랑하는 딸아, 네가 글 뒤에 숨어 네 목소리만 높이던 시절조차 나는 너를 사명자로 빚어가는 중이었단다. 이제 입을 닫고 문을 잠근 이 시간은 네 사명이 멈춘 정지의 시간이 아니라, 네 영혼이 가장 풍성하게 채워지는 거룩한 채움의 시간이란다. 내가 주는 이 두루마리를 기쁘게 먹으렴. 네 입에 꿀처럼 달콤하게 녹아들 때까지. 그때 내가 네 입을 열어, 너만이 빚어낼 수 있는 고유한 생명의 언어로 세상을 살리는 나의 사랑을 전하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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