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lympus LT-1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by 박물지 선생

5년 만에 본 선배는 카메라를 말없이 건넸다. 그냥 내밀었고 나는 받았다.

스웨덴 유학이 끝나가던 1994년 겨울이었다. 몇 년을 살았던 도시를 떠나기 전, 5년 만에 본 선배와 유럽을 걷기로 했다. 짐을 싸고 루트를 짜는 건 내 몫이었다. 선배는 말없이 따라왔다. 다니던 대기업에 사표를 내고 찾아온 것이었다. "어쩐 일이세요?" "음… 나를 찾으려고." 그게 나눈 이야기의 전부였다. 그 뒤로도 새로운 시작이 어떻게 됐는지는 묻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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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톡홀름을 떠나 리스본에서 출발했다. 테주강이 바다처럼 넓었다. 벨렝 탑 앞에서 한참을 서 있었는데 선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나도 하지 않았다. 그라나다의 알함브라는 황혼 무렵이 달랐다. 전체가 붉은 황금빛이었다. 알함브라, 아랍어로 붉은 성 — 그래서 알함브라였나 보다. 바르셀로나에서는 사그라다 파밀리아의 미완성 첨탑을 올려다봤다. 아를에서는 고흐가 그린 그 카페 앞 노란 벽을 찾아 밤에 커피를 마셨다. 아무 말 없이. 고흐의 그 밤이었다. 그림과 똑같았고, 우리 둘은 그 그림 안에 앉아 있었다. 피렌체에서는 두오모에 올랐다. 발아래 도시의 지붕들이 온통 붉은 기와색이었다. 저녁이 되면 그 색이 더 깊어졌다. 브린디시에서 페리를 탔다. 밤새 검은 아드리아해를 건넜고, 아테네에서 아크로폴리스의 흰 신전이 하늘 위에 걸려 있는 것을 봤다.

둘이서 별로 말이 없었다. 기념사진도 거의 없다. 그저 카메라와, 그 카메라가 빚어낸 빛과 색이 있을 뿐이었다. 나는 콘탁스 T2나 니콘 35Ti 같은 카메라를 갖고 싶었다. 작고 정밀하고 비싼 것들. 손에 쥐어본 적도 없었다. 선배는 그걸 알았던 것 같다. 말한 적은 없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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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lympus LT-1은 가죽을 입은 카메라다. 진짜 가죽은 아니지만, 손에 쥐면 차갑지 않다. 카메라라고 하기엔 너무 납작하고 작아서 처음 보는 사람은 지갑인 줄 안다. 가죽 표면은 시간이 지나면 조금씩 낡아 세월을 입는다. 오래 쓴 LT-1에는 주인의 흔적이 깊이 남는다.

선배는 지금 은퇴해서 유유자적 지낸다. 가끔 소소한 안부가 온다.

그때 그 카메라 얘기는 한 번도 꺼낸 적이 없다.

고맙고 좋았다. 그리고 안부를 묻는다.

Olympus LT-1 | 1994 | Japan

LENS: Olympus Lens 35mm f/3.5

FILM: 35mm (135 format)

NOTE: LT stands for Leather-Tech. Synthetic leather body moulded as one with the case.

FROM: 일본 (선배의 선물, 1994년 겨울)

월, 금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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