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EUN Feb 28. 2024

7년 동안의 설렘

간밤에 마신 카푸치노가 화근이었을까. 근래 커피 양을 훅 줄여서 그런가. 단 한 잔이었는데 뜬 눈으로 밤을 꼴딱 샜다. 이렇게 대책없이 잠들지 못한 날은 정말 오랜만이다.


아니다. 내일의 일정에 설레서 잠을 못 들었을 가능성이 훨씬 높다. 이 또한 아주 오랜만에 있는 일이라 당장 실감하지 못했을 뿐, 참으로 놀랍게 설렌 것이다.


결혼 후 본가를 떠나 산 지 벌써 7년째다. 엄마 아빠랑 같이 살 때도 난 늘 일로 바빴으니까 귀가가 늘 늦곤 했다. 사는 곳이 같기 때문에 짧은 시간이나마 엄마 아빠를 매일 볼 수 있었기 때문에 우리가 멀어져 있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는데, 분리된 가정을 꾸리고 살다 보니 이 감각은 제법 깊어졌다.


매주 주일마다 얼굴을 보긴 하지만 대화라든가 식사라든가 매번 이어지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부비는 시간이 부족하다. 그렇지만 나는 이제 다른 가정의 일원이고, 여전히 엄마 아빠의 가정 안에 속해 있지만 이 그룹은 이제 2순위다.


엄마는 강아지 동생을 돌보는 일로도 매일 바쁘다. 그래서 외출도 여의치 않다. 실외 배변밖에 하지 않는 우리 막내 때문에 엄마는 어쩌다 약속이라도 잡았다 하면 늘 귀갓길이 조급하다. 엄마가 조금이라도 늦게 집에 돌아오면 막내는 소변을 잔뜩 참았다 엄마 얼굴을 보자마자 실수한다든가… 그런 극적인(!) 일들이 있었기 때문에 엄마는 외출에 소극적이게 변했다.


서울 한복판에 살던 엄마는 지금은 남양주 한구석에서 지낸다. 나이가 들었고, 돌봄 노동이 여전히 이어지고 있는 터라 운신의 폭은 더 좁아져 있다. 의욕이 생기지 않는 것이겠지. 엄마가 나를 만나러 우리 집에 오는 일을 주저하는 것은 엄마의 최우선 가정의 과업들과 엄마의 현재가 번번이 딸을 보고 싶음을 이기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의 달라짐을 인정하는 일은 슬프지만 자연스럽다. 적어도 우리는 매주 눈을 맞추고 같이 예배를 드릴 수 있는걸. 다만 오늘의 설렘은 엄마와 아주 오랜만의 데이트였으므로 들뜨지 않을 수 없었던 것 같다.


엄마는 내 최고의 데이트 메이트였다. 엄마와 수다 떨던 지난 시간들은 되도록 생각하지 않으려 한다. 그 그리움은 언제라도 내가 감당하기 힘든 대단한 위력을 가진 것이니까.

냉면을 좋아하는 엄마와 우래옥에 갔다. 오픈런이라는 것을 처음 해봤고, 오픈하지도 않은 가게에 영업 시간 한 시간 전에 도착해 대기 명단에 번호를 남겼다. 엄마가 냉면을 먹기까지 기다리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근처에는 남편과 연애 시절 종종 갔던 애드 커피와 얼마전 오픈한 헬카페가 있었는데, 추억에 이끌려 애드 커피에서 엄마를 기다리기로 했다.


약속 시간보다 1-20분 항상 일찍 도착하는 엄마는 오늘도 어김없이 20분 전에 나타났다. 그런 엄마가 자랑스럽다. 평생 내게 보여준 모습이 흐트러지지 않았음이 자랑스러운 것이다.


함흥냉면만 먹던 엄마가 평양냉면은 처음이라 맛 보이는 데 갑자기 긴장됐다. 엄마가 입에 맞지 않다고 하면 택시를 타고 명동으로 날아가야지. 플랜비도 세웠다. 냉면 첫 입을 먹는 엄마의 얼굴이 몹시 밝다. 웃는다. 맛있다며 방긋 웃는 엄마 얼굴에 간밤에 잠들지 못해 띵했던 머리가 맑아진다.

양이 너무 많다.


라고 20분 전에 나는 귀띔을 했는데, 나도 엄마도 그새 냉면을 다 먹어치웠다. 엄마는 목 끝까지 냉면으로 찬 것 같다며 웃어 보였다. 나도 더불어 활짝 웃었다. 배가 너무 불러 카페에 당장 갈 수가 없어 조금 걷기로 했다. 엄마는 새 운동화가 필요했는데, 근처에 운동화 매장을 찾으니 동대문 쇼핑몰이 검색됐다. 거리가 900미터도 채 되지 않아 배 꺼뜨리기에 좋았다. 날은 조금 차고, 냉면을 먹어 속도 냉했지만 우리는 팔짱을 꼭 끼고 이른 봄과 늦겨울 사이의 바람을 갈랐다.


단 세 시간 남짓 함께했을까. 엄마도 나도 돌아갈 곳이 다르니 우리는 각자 헤어질 시간을 헤아리고 있었다. 자연스럽지만 슬픈 건 변함없다.


엄마가 냉면 한 젓가락을 집어 올릴 때 너무 예뻐서 나도 모르게 사진을 찍었다. 집에 돌아와 엄마의 예쁜 모습을 하염없이 들여다본다. 엄마- 하고 화면에 대고 엄마는 듣지 못할 소리를 내어본다. 금방이라도 다시 보고 싶은 엄마. 보고 있어도 보고 싶은 엄마.


내가 잠에 들 수 없었던 이유를, 이제야 알겠다.

작가의 이전글 책이라는 세상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