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지의 사랑
받은 사랑의 양이 적으니 사랑한다는 말을 남발하면 결국 내가 가진 사랑이 바닥날까 봐 두려운 것 같다.
그래서 나는 사랑한다는 말에 더 박하다.
내 속에 차곡차곡 쌓아둔 얼마 안 되는 사랑을 입 밖으로 꺼내버리는 순간, 내 마음속에 있을 때 보다 그 무게가 한없이 가벼워질 수도, 받는 사람에게는 일상적이라 흔할 수도, 내가 낸 용기에 비해 감동이 덜 할 수도 있는 모든 경우의 수를 미리 지레짐작하고 두려워한다.
더 이상 나에게 있어서 만큼 소중하지 않게 되는 상황이 오더라도 내가 아까워하지 않고, 후회하지 않고, 상처받지 않고 기꺼이 내어줄 수 있을 만큼 사랑해야 진짜 사랑이라는 생각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한테 사랑은 너무나 무겁고, 깊고, 어둡다.
사랑이라는 건 표현을 해야 알 수 있고 주고받을수록 커진다는 경험이 현저히 적은 탓에 더 깊숙이 꽁꽁 숨긴다.
심지어 이 마저도 타인들의 교감을 멀리서 지켜보거나, 책이나 영상 같은 매개체를 통해 개념을 이해하는 식으로 어렴풋이 내 멋대로 해석해서 얻은 결과다.
따라서 사랑에 대한 보편적인 사회적 의미가 나에게도 해당되는 말인지 아닌지에 대해서는 확신을 할 수가 없다.
가장 사랑받고 싶었던 사람들에게서 사랑한다는 말을 들었던 상황들이 도통 기억이 나지 않는다.
정말 무의식 깊은 곳까지 한바탕 헤집어봐야 어렴풋이 떠오를 듯 말 듯 한 정도라서 그 정도의 추억을 기꺼이 내어줄 수 있을 만큼 특별한 상황이 아니면 사랑한다는 말을 하기가 어렵다.
그에 비해 강아지들이나 할아버지에게 비교적 쉽게 할 수 있는 이유는 그들이 나에게 준 사랑이 너무나도 많기 때문이다.
내가 이걸 골백번 말한다고 해서 그들이 내게 주었던 사랑이 사라지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있어서, 내가 그걸 피부로 느낀 경험이 있어서다.
그에 비해 무엇보다도 안정적인 정서 교감이 이루어져야 할 가족들에게서는 진심이 가득 담긴 사랑한다는 말을 들은 과거를 떠올리기가 쉽지 않다.
어떠한 상황을 회피하거나 해결하기 급급해서 들은 기억밖에 없고, 직접적인 말 대신 '사랑하니까 해주는 거야'라는 식의 행동뿐이라 어림짐작밖에 할 수 없는 상황들만이 기억 속에 존재해서 그들에게 하는 사랑한다는 말이 유독 아깝게 느껴진다.
특히나 상황 해결을 위해 그들이 내뱉고, 내게 흘러들어온 사랑은 거부하면 더 최악의 상황을 야기할 뿐이라 감히 거부 못할 사랑뿐이었다.
그들이 준 사랑 뒤에는 항상 나로 인한 본인들의 희생이 뒤따랐고 자연스레 나에게는 사랑 뒤에 죄책감이 따라붙었다.
반대로 내가 그들에게 전해줬던 사랑은 혼자가 될까 두려운 마음과 극한으로 치닫는 상황을 무마시켜 보려는 힘없는 어린아이의 감정적 자살과 다를 바가 없었다.
울지 마, 화내지 마, 잘못했어, 미워하지 마 같은 말은 들은 적도, 해본 적도 없다.
게다가 저 말들이 절실히 필요하다고 생각된 순간마다 내게 돌아오는 건 무미건조하게 내뱉은 사랑한다는 말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이따금 그 들 입에서 나온 나를 향한 사랑에는 어린아이도 느껴질 정도의 무안함이 묻어 나오는 상황도 있긴 했다.
그러니까 쉽게 얘기하자면 나에게 사랑이라는 단어는 매번 그 당시의 내가 감당하기 벅차지만 감당했어야만 하는 어마어마한 죄책감과 책임감이 그림자처럼 따라왔었다.
강아지와 할아버지를 제외한 혈연관계, 즉 가족에게서는 단 한 번도 죄책감과 책임감이 동반되지 않은 사랑이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나에게 사랑이라는 건 한없이 무거우면서도 가장 쉽게 말문을 막아버리거나 상황을 종결시키는 무적의 방패막이자, 한없이 가볍고 감정 없는 단어가 됐다.
이처럼 자아 형성이 중요한 시절에 충분한 양의 교감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자아 확립 이후에 타인들이 나에게 주는 사랑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의심부터 하고 벽을 치게 됐다.
사랑한다는 말은 결국 나에게서 어떠한 걸 앗아갔던 경험뿐이라, 날 사랑한다고 하면 내가 무엇을 줘야 하는지 고민했다.
나에게 사랑이라는 건 대개 한정적이었고, 특별했고, 무거웠고, 결론적으로는 무마의 수단이었기에 타인들이 나에게 주는 사랑을 인정하기가 무겁고, 버겁고, 어려웠다.
따라서 받은 사랑을 돌려주기에도 너무나 큰 부담을 느꼈기에 애초에 그 사랑을 받지 않거나 웃어넘기며 회피하는 걸 선택했다.
다양한 사랑에 대한 정의가 너무나도 모호하고 데이터 베이스가 한없이 적어서 내 입장에서는 사랑이랍시고 준 게 받는 사람으로 하여금 사랑이 아닌 엉뚱한 무엇일까 봐, 또는 더 나아가 그게 오히려 관계를 파멸로 이끄는 상처의 불씨가 될까 봐 애초에 그런 불상사를 만들지 않기 위해, 사랑에 대한 나의 무지를 들키지 않기 위해 사랑이라는 단어와의 접촉을 피하게 됐다.
받지 않으면 주지 않아도 되기에.
강아지와 할아버지를 제외한 대상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한 적은 한 손으로 꼽을 수 있을 정도인데, 그마저도 당시의 내가 진심인지 아닌지 아직도 알 수가 없다.
위에서 말했듯이 사랑에 대한 정의를 내리지 못한 상태이기에 내가 정말 그 사람을 사랑하는 게 맞는지, 사랑한다는 말을 이런 표정, 이런 말투로 하는 게 맞는지, 여전히 무엇 하나 제대로 알 수 있는 게 없다.
분명히 내가 상대방에게 느끼는 게 이 정도 감정이라면 사랑인 것 같은데, 내 감정에 대한 확신은 없고 그 사람이 주는 사랑을 언제까지고 피할 수 만도 없으니 말이다.
주기만 하는 사람들에게 미안해서, 받았으니 돌려줘야 할 것 같아서, 그렇게 억지로 내면의 다그침에 의해 떠밀리듯이 하는 사랑한다는 말이 정말로 나의 진심이 맞다고 할 수 있나.
사랑한다는 말을 하면서 이렇게까지 속이 답답하고, 불안하고, 죄책감이 느껴지고, 부담스럽다면 그건 진짜 내가 그를 사랑한다고 할 수 있는 건지 반문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제는 정말 더 이상 회피할 수만도 없고 날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사랑에 대해서 감을 잡아야 할 것 같은데 도통 방법이 보이지 않는다.
하루아침에 사랑에 대한 의심을 거두지 못할 게 눈에 뻔한데, 그들로 하여금 내가 사랑을 잘 받아들일 수 있을 때까지 사랑을 달라고 할 염치도 없다.
정녕 나를 ‘사랑’한다고 해도 기약 없는 헌신에 대해 돌아오는 거라고는 상처가 될 법한 의심이나, 마지못해 하는 듯한 감정이 결여된 찝찝한 ‘미러링’ 일뿐일 텐데.
지치지 않고 미워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때 놓친 결여를 단기간에 따라잡을 생각이 오만한 것일까.
사랑이 뭔지 몰라도 흉내만 내면서 평생 살아갈 수는 있는지, 그게 가능하다면 그렇게 사는 게 맞는 것인지도 알 도리가 없다.
결핍이 결국 또 다른 결핍을 낳는 형국이지 싶다.
사실은 사랑한다는 말의 정확한 의미를 정의 내리지 못했을 뿐이지 사랑이 담긴 행동들이 어떤 건지는 이제 어느 정도 구별할 수가 있다.
하지만 내가 아직 그걸 사랑이라고 받아들일 준비가 안 됐다.
지금까지 계속 말했듯이 나에게 사랑은 너무 얽히고설킨 감정이라 예쁘게 전해줄 수가 없어서 그런 것 같다.
작은 것부터 받아들이고 다시 주는 것에 익숙해져야 할 텐데, 가까운 사이에 농담처럼 하는 사랑마저도 나로서는 선뜻 들 수 없을 정도다.
단 한 번도 대가를 지불하지 않아도 되는 사랑을 마음 편하게 주고받은 적이 없기에, 타인이 주는 사랑에 자꾸 값어치를 매기고 계산을 하게 된다.
사랑 뒤에 따라붙는 무수한 부정적인 감정들의 무게에 짓눌려버린 상태라 가벼운 사랑을 주고받을 용기조차 없다.
가장 아이러니 한 건, 난 사랑을 두려워하면서도 자꾸 호기심이 생긴다는 것이다.
직접 겪지는 못했어도 어디선가 주워들은 얄팍한 지식들에 내 상황을 대입하며 끼워 맞춘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사랑을 예쁘게 잘 전해주고 싶은 게 그것도 사랑이지 않을까.
사랑이 뭔지 알고 싶다는 이유로 내가 ‘사랑’하는 것 같은 사람들을 떠올리며 기억을 더듬고, 사랑인지 아닌지 유추하는 것도 사랑이지 않을까.
그들에게 받은 사랑이 따뜻하지만은 않았음에도 사랑이라는 걸 떠올리면 그들부터 생각나는 것도 사랑이지 않을까.
'그들도 이유가 있었겠지' 생각하며 과거를 타협하고, 입맛대로 이해해 보려고 하는 것도 사랑이지 않을까.
물론 확신을 할 자신도, 근거도 없다.
그냥 여태 그랬듯이 '그런 거 아닐까' 하며 나름대로 유추를 할 뿐이다.
나에게 아직 사랑은 어색하고, 무겁고, 어렵고, 서럽고, 부족하고, 부담스럽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꾸 유추하고, 갈망하고, 가까워지려 근처에서 서성거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