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爱]에 대한 고찰: 수신인 불명

거짓과 회피로 이루어진 사랑은 가짜인가요?

by 적요

언젠가는 너한테 거짓을 단 한 톨도 포함하지 않은 진심을 고백하고 싶었는데 아마 그럴 기회는 오지 않을 것 같아서 이 글을 써.

정확히 말하자면 내가 그럴 기회를 만들지 않는 거겠지.

그러면 너는 평생 내 진심을 모를 테고, 나는 그런 너한테 평생 속을 알 수 없는 사람으로 남아있을 거야.

하지만 그것도 내가 너를 사랑해서 그런 거라면, 너는 나를 이해해 줄 수 있어?






있잖아, 나는 네가 제일 소중해.

내가 너를 만나면서 망가지는 것보다 네가 나로 인해 슬픈 게 싫었어.

나 때문에 슬프다면 내가 너를 슬프지 않게 할 수도 있다는 거잖아.

그런데 내 존재 자체가 너에게 슬픔의 원인이 되는 건 내가 어떻게 할 수가 없더라.

물론 내가 너로 인해 행복했던 것처럼, 너도 나로 인해 행복했던 순간들이 있었겠지.

그렇지만 네가 나를 만나면서 얻은 행복의 크기보다 네가 짊어져야 할 리스크의 크기가 나한테는 너무 무거웠어.

알아, 세상에 어떻게 행복만 주는 존재가 있을 수 있겠어.

하지만 그걸 알면서도 욕심이 났어.

그냥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라 특별한 사랑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어.

내가 네 인생에 빛이 되지는 못해도 자그마한 빛이라도 보여주고 싶었어,

빛을 적당히 보여주는 법을 몰라서 내가 불에 타 사라져 버리더라도 온 마음을 다 하고 싶었어.

너에게만은 무한한 행복과 사랑을 주고 싶었어.

나를 갉아먹으면서라도 네가 원하는 걸 해줄 수 있다면 그걸로 족했었어.


그렇지만 현실의 벽이라는 게 나한테는 너무 버겁더라.

네가 도움이 절실하게 필요한 상황에서 현실적으로 내가 해줄 수 있는 게 없다는 게 나를 너무 비참하게 만들었어.

너는 항상 나에게 큰 것들을 안겨주는데 나는 그럴 수가 없으니까.

그래서 나는 차라리 내가 이기적인 사람이 되길 선택한 거야.

내가 너한테 지금보다 더 소중한 사람이 되기 전에 이 관계를 끝내는 게 맞다고 생각했어.

나중에 네가 나를 다시 떠올렸을 때 생각 할수록 쓰라린 생채기 같은 사람이 되기가 싫었어.

내가 너를 잊지 못하고 힘들어하는 것보다, 네가 우리 만남의 끝으로 인해 안 좋은 영향을 받는 게 무서웠어.

이미 시작한 이상 후회와 상처는 어쩔 수 없이 동반되겠지만 각자가 감당 가능한 수준일 때 끝내고 싶었어.

이 만남이 끝나게 된다면 이 관계에서 내 포지션은 비겁한 도망자겠지.

그렇게 됐을 때 다른 사람들이나 네가 나를 이기적이고 이해할 수 없는 회피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해도 괜찮아.

그냥 네가 살아가다가 어느 순간 내가 문득 떠오른다면 가슴 아프기보다는 '아 걔 별로였어' 하고 빨리 넘겨버릴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을 뿐이야.

이미 현실적으로 내 존재가 너한테는 큰 리스크고, 흠집이겠지만 딱 이 정도에서 멈추고 싶어.

네가 쌓아 올린 모든 걸 무너뜨려 버리는 기폭제까지 되고 싶지는 않아.

나로 인해 네가 주변인들한테 미움을 사고, 너의 노력들이 인정받지 못하는 걸 옆에서 지켜볼 자신이 없어.

나는 네가 그 무엇보다 소중하고 너를 너무 사랑해서, 네가 살아온 삶과 네가 이뤄 낸 모든 것들 마저도 너무 사랑해서, 너를 포함한 너의 모든 걸 지켜줄 수는 없어도 유지라도 시켜주고 싶을 뿐이야.


이 얘기를 너한테 직접 했으면 너는 또 울 것 같은 표정으로 나한테 그랬겠지.

'나 지금 이해가 안 돼 --아'

사실 나조차도 내가 이해가 안 돼.

그래서 네가 나한테 저 말을 했을 때, 너를 납득시켜 줄 자신이 없어.

또 너를 울렸구나, 또 너를 속상하게 했구나, 또 네가 내 눈치를 보게 만들었구나 하는 죄책감을 새로 안은 채 어영부영 다시 만남을 이어가겠지.

그런데 나는 또다시 그러고 싶지 않아.

정 때문에, 사랑 때문에 각자 감정을 죽이고 갉아먹는 짓을 반복하고 싶지 않아.

사랑이란 이름으로 서서히 덮쳐오는 불행에 떠밀려가고 싶지 않아.

한 명은 포기해서 불행하고, 한 명은 미안해서 불행한 이상한 관계를 사랑이라고 치부하고 싶지 않아.

우리가 안쓰러운 기억으로 남는 게 싫어.

서로가 서로의 존재를 끊임없이 확인하면서 불안해하고, 눈치를 보고, 부담을 느끼고, 죄책감을 껴안으면서 까지 관계를 유지하고 싶지 않아.

네가 평생을 불확실함 속에서 마음 졸이며 살아온 걸 아는 데, 내가 어떻게 너의 또 다른 불확실함이 되겠어.

나는 네 인생에 내가 없더라도 네가 확실한 안정과 행복 속에서 살길 바라.

이게 내가 너를 사랑하는 방식이야.






아니, 사실은 내가 꿈꾸는 미래에 네가 있었으면 좋겠어.

내 욕심인 걸 알아도 그랬으면 좋겠어.


봄에는 알레르기 때문에 코 끝이 빨개지도록 재채기를 하면서도 너랑 출사를 나가고 싶고,

여름에는 바닷가에 가서 둘 다 먹지도 못하는 해산물을 먹고 감당하기 힘든 비린 맛 때문에 괴로워해보고 싶고,

가을에는 누가 봐도 커플 같은 차림새로 손 꼭 잡고 좋아하는 전시회도 보러 가고 싶고,

겨울에는 집 앞 붕어빵 트럭에서 미련할 정도로 붕어빵을 잔뜩 사 와서 누가 더 많이 먹는지 유치하게 대결도 해 보고 싶어.


어떤 날에는 네가 날 너무 보고 싶어 해서 일을 때려치우고 와줬으면 좋겠고,

또 어떤 날에는 네가 바보처럼 나한테 영원을 약속해 줬으면 좋겠어.

그 어떤 날들 속에서 영원을 약속하는 네가 낯간지러워서 대답을 피하고 토라진 널 놀리고 싶어.

또 어떤 날에는 뜬금없이 장난스레 알겠다고, 그러자고 대답하고 깜짝 놀란 널 보면서 숨 넘어가도록 웃어보고 싶어.


그렇게 살아가다가 각자가 하는 행동들 속에 서로의 습관이 자연스럽게 녹아 있었으면 좋겠어.

지인들이 우리 보고 점점 닮아간다고 했으면 좋겠어.

막연히 5년 뒤, 10년 뒤의 미래에 대해 얘기할 때도 당연하게도 서로가 존재했으면 좋겠어.

헤어짐을 염두에 두지 않고 크게 싸우고 서로 토라져도 보고 싶어.

‘다음에, 나중에, 기회가 되면’이라는 말 대신 네 손을 잡고 계획 없이 훌쩍 떠나는 여행도 하고 싶어.

형식적이라도, 말 뿐인 맹세라도, 우리를 아껴주는 사람들을 증인 삼아 서로에게 영원을 약속하고 싶어.






그런데 내가 너를 보고 싶어 하는 것조차 너한테는 죄책감이 되는 걸 아는 내가 어떻게 '싶어'라는 말을 쉽게 할 수 있겠어.

그렇게 참고, 또 참고, 넘기고, 또 넘기다가 결국 너한테 나는 그냥 속을 알 수 없는 사랑에 한없이 차가운 사람이 된 거겠지.

사실 나는 진짜 사랑에 차가운 사람이 맞을지도 몰라.

널 생각한다는 나의 배려가, 네가 원하지 않았던 나의 이기적인 희생이, 결국 너를 사랑을 의심할 수밖에 없는 불안한 사람으로 만들었으니까.

아니, 어쩌면 진심을 꺼내기 무서워하는 사람일 수도 있고.

아마 반은 사랑이고 반은 두려움 일 거야.

너와 함께 할 수 있을지 당장 내일도 모르겠으니까.

장난으로라도 다음에 뭐 하자, 나중에 같이 하자라는 소리를 입 밖으로 꺼내질 않았으니까.

곧 부서질 것 같았으니까.

아무리 가져도 내 것이 아니었으니까.






미안해.

널 만나면서 항상 너를 속이는 기분이 들었어.

내 진심을 다 보여주지 않아서 미안해.

사랑을 의심하게 만들어서 미안해.

네가 나 때문에 불안에 갇혀 있는 걸 알면서도 꺼내주지 못해서 미안해.

너를 너무 많이 좋아해서 미안해.

너를 사랑하는 마음이 너무 어둡고 무거워서 미안해.

너를 사랑하는 걸 버거워해서 미안해.

너를 사랑하기에 너와의 만남을 끝내고 싶어 해서 미안해.







너는 나를 사랑해서 나와 함께 행복해지려고 했고, 나는 너를 사랑해서 내 행복보다 네 행복이 우선시 된 것.

그러니까 서로가 생각하는 행복의 주체가 다른 것.

그게 우리가 지금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는 궁극적인 이유겠지.

아니, 더 정확히 하면 네가 나를 이해하지 못하는 이유.


사람들 말대로 나는 지독히도 계산적인 사람이라서, 너와 나의 미래를 계산을 해봤다?

그런데 내가 네 옆에 있는 한, 우리가 함께 누릴 수 있는 행복이 올 거라는 결과는 아무리 계산을 해도 도출해내질 못했어.

너는 나를 사랑해서 스스로를 불안에 가뒀고, 나는 너를 사랑해서 죽도록 외로워졌잖아.

사랑을 하는데 왜 불안해야 하고, 왜 외로워야 해?

우리가 아무리 노력을 해도 상황이 바뀌지 않으면, 설령 바뀐다 해도 우리의 사랑은 죄책감과 불안뿐일 텐데.

심지어 이대로 달라지는 것 없이 시간이 지날수록 상황은 점점 더 곪아가고 서로에게 상처만 생길 텐데, 사랑이라는 이유로 너는 날 그곳으로 보낼 수 있어?

게다가 만약 내가 너의 행복을 위해 나를 포기했다는 걸 네가 알게 된다면, 너는 행복할까?

결국 아무도 행복한 사람이 없는 거잖아.

그럼 너의 사랑도, 나의 사랑도 모두 다 실패하는 거잖아.


나는 헤어지면 남남이라는 가치관이 너무 강한 사람이라, 당장 너무 좋아도 언젠가는 남이 될 수 있다는 전제하에 시작하는 '연애'가 너무 어렵게 느껴져.

너를 좋아하게 된 어느 순간부터, 너와 함께하는 아름다운 미래를 상상하는 게 아닌 헤어지는 상상부터 했고 내가 너를 잃었을 때의 고통을 감당할 수 있을지 계산부터 했어.

사랑이란 이름으로 너한테 상처만 남길까 봐 수도 없이 많은 고민을 했고, 때때로는 사랑을 표현할 기회를 놓치기도 했어.

그 결과 나는 너에게 속을 알 수 없는 애인이 되었고, 언제라도 훌쩍 떠나버릴 것만 같은 불안감이 됐지.

그래도 걱정하지 마.

네가 감당할 수 없는 나의 진심을 털어놓거나, 예고도 없이 관계를 일방적으로 끝내버리는 일은 없을 거야.

나의 개인적인 생각과 감정을 너에게 내비쳐서 더 이상 나만의 생각과 감정이 아닌 것이 되어 네가 미안함과 불안감을 느끼게 만드는 일도 없을 거야.

내가 혼자 속앓이를 하더라도 너는 나에게서 사랑만 느낄 수 있게 내 모든 걸 다해서 너를 오랫동안 사랑할 거야.

우리가 더 이상 우리가 아니게 되어도, 내가 더 이상 너의 불안이 아니게 되어도 나는 너를 사랑할 거야.

내게 남아 있는 널 향한 사랑이 진정으로 더 이상 무엇도 바라지 않고 그저 너의 담담한 목소리 한번 듣고, 평온한 얼굴 한 번 보면 살아갈 수 있는 혼자만의 사랑이 되어도 너를 사랑할 거야.






이토록 절실하게 너를 사랑했음에도 결국 언젠가 너는 내 사람이 아니게 되겠지.

정말 만약에 우리가 인연이라면 다시 만나겠지만, 그런 일은 이제 없을 거라고 단정 지으려 해.

애초에 시작하지 않아 끝을 내지 않아도 되는 관계로 남을 수 있었다면 나는 시작하지 않았을 테니까.

시작조차 없었다면 내 사랑이 오히려 너를 불안하게 만들 일도 없었을 거고.

이 모든 상황이 다 좋아질 거라고 말하고 싶은데, 그렇지는 않을 거야.

그러니까 우리 그냥 이 만남이 여름 구름을 녹이던 소나기라고 생각하자.

예고도 없이 갑자기 내리는 소나기를 한낱 인간 따위가 어떻게 할 수 없듯이, 이 불가피한 상황들과 켜켜이 쌓인 온갖 부정적인 감정들도 우리의 관계가 끝나게 되면 금방 사라질 거라고 생각하자,

비가 내리고 난 뒤 해가 뜨면 젖어있던 바닥들도 언제 젖었냐는 듯이 바싹 마르는 것처럼, 미처 서로에게 다 주지 못해 남아있던 감정들도 머지않아 곧 다 말라버릴 거라고 생각하자.

만약 금방 지나가는 소나기가 아니고 지독한 장마라고 해도, 여름은 언젠가는 끝이 나니까 그렇게 가을이 오길 기다리자.

비겁하게 시간이 해결해 준다는 속설에 맡겨보자 우리.

그렇게 시간에, 환경에 책임을 돌리면서 각자 멀리 도망치자.


너를 자꾸 보고 싶어 하고 그리워하다 보면 언젠가는 정말 그리운 건지 아니면 습관처럼 널 떠올리고 있는 건지 정확한 내 마음을 나도 모르는 순간이 오겠지.

그때가 되면 너에 대한 좋은 기억과 함께했던 추억들을 곱씹으면서 두고두고 오래 힘들어하는 건 내가 할게.

울고 싶어도, 죽고 싶어도 그날의 우리를, 풍경을, 온도를 생각하면서 살아갈게.

너는 나에 대한 안 좋은 기억만 가지고 가서 깔끔하게 잊어버려.

너는 그런 사람이니까.

좋지 않은 기억들은 빨리 지워버리고 좋았던 기억은 소중하게 아낄 줄 아는 사람이니까.

너는 잘해 낼 거야.


토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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