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爱]에 대한 고찰: 망각의 대가

너는 나를 자주 괴롭게 만든다

by 적요




그날도 나는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대체 내가 뭐가 안 괜찮아 보이는데?


오랜만에 친구들을 만난 술자리에서 늘 그렇듯이 요즘 어떠냐는 안부 인사를 들었고, 식상한 대답을 했을 뿐이다. 하우 아 유? 하면 아임 파인 땡큐, 앤 유? 정도의 대답을 한 나에게 돌아오는 건 걱정 어린 눈빛이었다. 정말 괜찮냐고? 내가 정말 괜찮지 않을 이유가 뭐가 있을까 싶어서 곰곰이 생각해 봤지만 도통 떠오르는 게 없었다. 나 안 괜찮아 보이냐고 되물어도 친구들은 어색하게 웃어넘길 뿐, 그 누구도 나의 찝찝함을 시원하게 긁어주지 않았다. 이런 상황이 이번이 처음인 건 아니었다. 시린 겨울 내내 이어진 이 찝찝함은 몸보다 내 마음을 더 차게 만들었다. 종국에는 내가 안 괜찮아야 하는 사람인가 하는 삐딱한 마음까지 자리 잡고 말았다.


이 시기엔 꿈자리마저 사나웠다. 얼굴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 사람이 매일 나타났고, 그 바람에 난 매일 아침 나도 모르게 흘린 눈물로 짭짤해진 베개 커버를 벗기는 걸로 잠을 깨우곤 했다. 너는 대체 누구길래 날 이렇게 힘들게 하는 걸까. 대상 없는 푸념을 늘어놓으며 정체를 파헤쳐보려 했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얼굴도 알 수 없는 너에게서 왜 그리움을 느꼈을까. 꿈속의 나는 죄책감을 느끼면서도 널 혼자 두고 돌아서거나 날 붙잡는 너를 안심시켜 둔 채 몰래 빠져나오기만 했다. 그렇게 실체도 없는 너에게 미안함과 답답함이 쌓여갔다.


너의 정체를 깨닫는 데까지는 생각보다 오랜 시간이 걸렸다. 낯 가리는 내가 꿈속의 너와 이젠 정이 들 정도가 됐을 때쯤이었을까. 평소에는 자지도 않는 낮잠을 자고 일어났을 뿐인데 모든 게 떠올랐다. 그제야 나는 찝찝하게만 느껴졌던 친구들의 질문도, 안개처럼 답답했던 꿈도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게 되었다.


나는 너와 헤어졌구나.

우리가 만났었구나.

너와 나는 사랑을 했었구나.




3년이라는 시간 동안 만났던 너와 헤어진 내가 너무 아무렇지 않아 보여서 친구들이 걱정했던 것도, 내 무의식 속에 잠재된 죄책감이 꿈속에 널 자꾸 불러오는 것도. 그렇게 몇 달 동안 내 인내심을 시험하듯 괴롭히더니 모든 게 한순간에 밀려왔다. 구명조끼도 없는 몸으로 거센 파도를 정면으로 맞는 기분이었다.


내가 널 모르는 사람 취급하는 것처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은, 매번 괜찮은데 왜 자꾸 물어보냐는 날 보며 대체 무슨 생각을 했을까. 내가 널 스쳐 지나갔을 때 너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너의 손을 놓고 도망치듯 떠난 내가 다시 손을 내미는 상황을 너는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내가 헤어짐의 후폭풍에서 벗어나 아무렇지 않게 살아가던 동안 너는 혼자서 얼마나 버거웠을까. 이제야 겨우 가라앉았을 너의 시간에 내가 또 돌을 던진 건 아닐까. 내가 앓던 기억 장애를 알고 있던 너는, 널 잊은 채 살아가는 내 모습을 보며 어떤 마음이었을까.


나는 내가 너무 미웠다. 널 기억하지 못한 내가 견딜 수 없이 미웠다. 꿈속에서마저 널 떠나버린 나도, 이제야 널 떠올린 나도 전부 미웠다. 헤어진 뒤로도 너에게 상처를 남기고 있는 것 같아서 버티고 서 있는 것조차 버거웠다. 머릿속에는 괴롭다는 감정 하나만 남은 것처럼, 다른 감정이 들어올 틈이 없었다.


몇 달 내내 하루도 빠짐없이 꿈에 나오던 네가, 그 이후로는 단 한 번도 나타나지 않는 것도 견디기 힘들었다. 꿈속에서는 늘 이유도 모른 채 그리움만을 좇아 내가 널 찾아 헤맸고, 결국엔 널 찾았고, 너는 그런 나를 붙잡았지만 나는 또 떠났다. 너를 기억해 내라는 누군가의 염원인 건지 마지막에 네가 먼저 날 찾아왔을 때 나는 너를 붙잡았고, 너는 나를 떠났다.


그동안의 모든 장면을 되돌려주기라도 하듯이.


그 꿈이 가장 견디기 힘들었다. 이제야 네가 누군지 알아본 순간이었고, 그토록 보고 싶던 얼굴이었는데. 그런 나를 벌하듯 너는 떠났다. 꿈속에서조차 미안하다고 말할 기회 하나 주지 않은 채. 마치 감당하라는 듯 내려진 형벌 같았다. 네가 버텨온 만큼 돌려받는 거라 생각해도 그 무게는 쉽게 견뎌지지 않았다. 오히려 그게 더 나를 짓눌렀다.



내가 감히 사랑이라는 핑계로 이 관계를 놓아버린 탓일까. 어림잡아도 내가 느꼈던 감정의 몇 배는 되는 무게가 돌아오는 것 같았다. 아니, 어쩌면 나 때문에 괴로웠던 너의 몇 배만큼 괴로울지도 모른다. 널 매몰차게 떠나면서도 차마 버리지 못한 이기적인 미련이 내 안에 몰래 숨어 있다가 결국 나를 향해 돌아왔다. 그래서 나는 널 떠올릴 때마다 괴롭다. 찔리고, 따갑고, 숨이 막힌다. 네가 나에게 괴로움이면 내가 널 자주 떠올리기가 힘든데.


아, 그러지 말라고 이런 벌을 준 거니. 난 계속 널 괴로워하면 되는 거니.

토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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