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카고 출장과 이사
지난 글에서 이야기했던 시카고 근교의 고객사로 출장을 가야 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2003년 1월이었을 거예요. 따뜻한 LA에서만 지낼 생각으로 왔기 때문에 1월 시카고 날씨에 맞는 옷도 없었거든요. 그래서 지사장님의 겨울 재킷 2벌을 빌려서 저와 다른 동료분 이렇게 둘이서 시카고 출장을 떠났습니다. 시카고 근교의 고객사와 헐리웃의 저희 회사 사이에 VPN 커넥션을 만들기 위해, 하드웨어 VPN 장비를 설치하고 관련 네트워크 셋업을 하기 위한 출장이었습니다.
장비를 설치한 뒤 잘 동작하는지 확인하고 한숨 돌리고 있는데, 갑자기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헐리웃과의 VPN 커넥션이 알 수 없는 이유로 자꾸 끊어진다는 거였어요. 잘 되지 않는 영어로 당황하는 고객들과 의사소통하며 문제점을 찾아보니, 저희가 가지고 온 장비가 동시 10회선만 연결가능한 제한이 있는 장비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급하게 헐리웃 지사에 연락해서 더 많은 회선 동시 접속이 가능한 장비를 사서 보내라고 했지요.
다행히 다음날 장비가 도착해 교체하고 나니 문제없이 동작합니다. 그래서 고객사 사장님께서 만족하시면서 시카고 일대 관광을 시켜주셔서 돌아보고 돌아왔습니다. 고객사 사장님께서는 추천서까지 써주시면서 회사에 보여주고 월급 올려달라고 하라고 농담도 하셨습니다. 나중에 저희 회사 사장님께 추천서를 보여드렸더니 좋아하시며 웃으시기만 하고 월급 인상은 없었지만요.
2002년에서 2003년으로 넘어가던 그해 겨울, 시카고 인근 고객사 외에도, 스펀지 밥으로 유명한 니클로디언의 Jimmy Neutron (천재소년 지미 뉴트론) 작업에도 참여하게 되어 회사가 수익을 좀 낼 수 있었어요. 무척 고무가 된 회사는 미국에서의 지속적인 지원을 위해 미국 지사 직원을 늘리기로 결정을 합니다.
그리고 출장 나온 사람들 중에서 저를 미국 지사 직원으로 채용하기로 해요. 고객사 사장님의 추천서 덕이었을까요? 역시 이번에도 지사장님께서 많이 도와주셨어요. 편법으로 미국에서 일하지 않도록 제대로 취업비자를 받게 해 주셨거든요. 특히 주재원비자와 취업비자 중에 취업비자를 받는 게 나을 거라는 조언이 결정적이었지요. 그렇게 3~6개월의 출장은 해외 취업이라는 새로운 상황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이민 초기를 경험한 사람들은 다 알겠지만, 이민은 꼭 게임 캐릭터가 초기화되어 레벨 1에서 다시 시작하는 과정 같잖아요? 미국에서의 제 크레딧이 0이었기 때문에 제 명의 만으로는 바로 아파트를 구할 수 없었는데, 마침 알고 지내던 분이 급하게 귀국하시게 되면서 그분이 사시던 글렌데일의 1 베드룸 아파트 렌트를 저희가 이어받게 되어 글렌데일로 이사를 하게 됐습니다. 위의 사진이 그 글렌데일 아파트 사진이에요.
글렌데일은 엘에이 조금 북쪽의 작은 도시인데, 저희가 처음 미국에 와서 신세 졌던 지인 분과 그분의 회사가 있는 동네였어요. 미국 지사 직원으로 채용이 결정된 뒤, 아내는 한국 집을 정리하러 먼저 귀국하고 (출장 예정으로 나왔기 때문에 한국에서 살던 집과 짐을 그대로 두고 왔거든요) 저 혼자 몇 안 되는 짐을 옮기며 이사를 했었습니다. 그리고, 얼마 뒤 한국에서 비자를 발급받기 위해 저도 귀국했습니다. 지금은 취업비자가 많이 어려워졌는데 그때는 클린턴 대통령이 전문직 취업비자(H1B) 쿼터를 늘렸던 기간이어서 저는 어렵지 않게 취업비자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