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진짜! 또 아빠전화야."
아이는 심심찮게 걸려오는
아빠 전화를 달가워하지 않는
내색을 크게 했다.
옆에 있는
내 눈치를 봐서일까
아니면 정말 싫어서일까.
사춘기에 접어들수록 아이들은
아빠집에 가는 것도
아빠에게 전화가 오는 것도
싫어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엄마인 나를 위해 하는 행동인지
진심으로 아빠가 부담스럽고
싫은 건지
나는 아직도 모르겠다.
중학교 때 찾아온 공황장애로
큰아이는
고등학교가 가기 싫다고 했다.
아빠와 가까운 곳에 살고 싶어
엄마를 졸라 이사 온 것인데
낯선 동네, 높은 교육열에 들들 볶이며
여유가 없어 보이는 낯선 친구들로
학교에 적응하기 힘들어했고
그 와중에
아빠의 여자친구
아빠의 재혼
그리고
아빠가 '동생'이라고 부르라는
또 다른 아이의 탄생을 지켜봐야 했다.
큰아이는 제대로 잠을 자지 못했고
공부와 친구에게도 흥미를 잃은 채
멍하게 학교만 오고 가는 듯했다.
걱정스러운 것은,
둘째 아이도 불안해 보였다.
큰아이는
고등학교를 가지 않겠다고
나중에 검정고시 보면 된다는 말로
엄마 가슴을 철렁 내려앉게 하더니
드라마를 너무 봐서인가
한때는
캐나다로 유학을 보내달라고 졸랐다.
이도저도 안 되는 현재의 모든 상황에서
도망치고 싶어 하는 듯했다.
경제적인 이유도 있었고
아이를 옆에 두고 있지 않으면
일이 터질 것 같아
'일단 공황장애가 다 나으면 유학을 가.'
라는 말로 당장의 급한 불은 껐다.
도망치듯 떠나온 새로운 곳에서도
아이들은 친구를 많이 사귀지 못했다.
사투리를 쓰는 친구들과의
거리감도 있었고
집을 나서는 것 자체를 힘들어했다.
나름 씩씩하게 보였던 둘째 아이마저
언니처럼
학교 가는 것이 싫다고 했을 때
나는 불면의 밤들을 참 많이도
보냈다.
큰아이를
어찌어찌 달래 고등학교에 보냈지만
불안증에 새벽 일찍 등교를 하면서도
어떤 날은 조퇴를,
어떤 날은 아예 일어나지를 못했다.
아이가 머리를 부여잡고
조퇴를 원한다고
담임선생님께 수시로 전화가 왔다.
고3의 시간을 보내는 아이에게
'공부'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건강하게만 내 곁에 있어주면
그걸로도 감사했다.
아이 시험기간에 맛집을 다니고,
친구들이 스터디카페를 가면
우리는 그냥 카페를 가서
수다를 떨고, 조각 케이크를 먹으며
선생님 흉을 보고
친구들 이야기를 하고
같이 웃었다.
석양이 내리면 드라이브를 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코로나가 터져
많은 시간을 온라인 수업을 한 덕에
함께 힘들었던 3년이 그렇게 그렇게
지나갔다.
아이는 이제 수능을 거쳐
본인이 원하는 학교와 전공을 선택해
대학교 생활을 앞두고 있고
나에게서 독립을 앞두고 있다.
"나 서울로 대학 간다니까
아빠가 당연히 자기 집에 와서 살래.
방하나 준다고. "
"너는 아빠한테 가서 살고 싶니?"
"당연히 싫지! 그런데 월세가 비싸면
나도 있을 곳이 없잖아..."
아빠에게
가기 싫은 이유는
저도 나도 알고 있었다.
아이들의 양육비를 받아내기 위해
소송까지 가야 했던 이혼과정
혹시나 이혼판결이 꿈일까 봐
서둘러 내 손으로 했던
이혼신고까지 거치면서도
내가 유일하게 그려왔던 그림은
'이혼한 부모일지언정 아이들에게만은 항상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주는 것'이었다.
사춘기에 접어든 아이가 엄마랑 싸우고
쌩~하며 아빠집에 가면
아빠가 그 속상한 마음을 끝까지
다 들어주고 하루 재운뒤
다시 타일러서 돌려보내주는,
그러면서
'큰애가 이런이런 것이 불만이더라.
그러니 잘 다독여줘.'라는
문자를 주는... 그런 그림이었다.
나 또한
재혼이나 또 다른 남자를 만나
아이들에게 경계심과 불안감을 심어주는
엄마가 아니라
독립해서 세상으로 나갈 때까지
아늑하고 포근한 울타리를 지켜주는
든든한 엄마가 되는 것
상상해도 될지 모르지만 어쨌든
내가 꿈꾸던 것들이었다.
나도 전남편도,
각자의 삶에서 최선을 다하고
마침내 자연스러운 흰머리가
나기 시작했을 때
아이의 결혼식에서 만나
함께 앞날을 축복을 해주는
그런 모습을 꿈꿨다.
하지만 현실은
내가 상상하던 그림과 너무 먼듯했다.
"내가 왜 아빠네 집에 가서 살기 싫은 줄 알아?
나는 아빠가 그 애를 키우는 방식을 보면 진짜 킹 받아!
아마 혈압이 올라서 하루이틀이면 뛰쳐나올걸?"
가까이 살아서 좋다던 아빠가
재혼했을 땐
함께 살고 있는 아줌마가 불편해
자주 가지 못했고
재혼마저도 실패하고
두 번째 이혼으로
갓난아이만 덩그러니 데리고 살아도
아이들은 여전히 아빠집에
편히 가지 못했다.
어린 딸을 혼자 키우고 있는
육아에 서툴고 나이 든
아빠의 모습만 보고 와야 했기 때문이다.
"아빠가 퇴근하면서 애를 유치원에서 데리고 집에 같이 와.
그리고 저녁을 만들어서 걔는 유튜브를 틀어주고 아빠는 소주를 꺼내.
그렇게 소주 두 병에 TV 보면서 저녁만 두 시간 넘게 먹는 거야.
애는 뭐 하냐고?
그냥 귀찮게만 안 하면 되는 건지 저녁 내내 밥상머리에서 유튜브나 보게 해.
유치원 다니는 애가 거기에 정신이 팔려서 밥은 먹겠어?
안 먹으니까 아빤 이미 술 취한 채로 저녁상을 대충 치워.
그럼 애가 또 자기 전에 배고프대지.
아빠는 흰 우유 한잔 주고 재우려고 하지만 술에 취해서 애보다 먼저 잠들어.
아침에 일어나면?
아빠 해장해야 하니까 라면을 끓이고 그걸 애도 먹어.
그게 정상인 거야 엄마?"
방학이나 연휴에
아빠네 며칠 다녀온 아이들은
실망한 티를 숨기지 않았다.
더 듣지 않아도
자동으로 그려지는 풍경들이었다.
"더 싫은 건 뭔지 알아?
우리는 진작에 밥을 다 먹었는데 술 먹느라고 두 시간 넘게 있다가 술에 취해서는 '설거지할래, 동생 씻기는 거 할래?'하고 하나를 선택하래.
참나... 아빠 자식이니까 아빠가 씻기라고 하면, 알았다고 그 대신 설거지 하래!
진짜 킹 받고 짜증 나."
"바빠죽겠는데 꼭 술 먹으면 애 앞세워서 영상통화 걸어. 내가 유치원생이랑 무슨 말을 해? 아빠는 혼자 애 감당 못하면 꼭 그렇게 전화를 해. 평소에 전화 오는 것도 듣다 보면 별 내용이 없어. 그냥 아빠 심심하면 전화하는 거야. 내가 뭐 하고 있던 상관없이."
시어머니를 모시고 결혼생활을 할 때
행동들이 복사본을 보듯 떠올려졌다.
두 시간이든 세 시간이든
아들의 반주를 겸한 저녁식사가 끝나길
기다리던 시어머니는 아들이 다 먹고 나면
밥상을 부엌으로 들고 가 치웠다.
"어이구, 어머니, 허리 다쳐요. 이리 주세요."
하면서 아들은
밥상을 주방까지만 덜렁 갖다 놓을 뿐,
설거지는 늘 어머니 몫이었다.
신혼 초 그런 풍경이 마음에 들지 않아
쓴소리라도 하면
아들이 타박을 당하기 전에
시어머니가 더욱 눈치 빠르게 움직였다.
나는 끼어들 수가 없었다.
내가 관여할수록 시어머니만 더 바빠졌다.
시어머니에겐 그것이 사랑이니까.
게을렀던 남편을 보는 그때 그 느낌이
고스란히 남아있는데,
이제는 우리 애들더러
설거지할래,
아니면 (아빠가 재혼해서 낳은)
네 동생 씻길래? 라니...
불같은 화가 올라왔지만
"집안일을 돕는 건 맞는 것이지만 아빠는 좀 너무했구나. 그건 아닌데."
라고 수위를 조절해서
아이들의 속상한 마음을 거들었다.
"고모가 전화해서 대학 원서 어디 넣었냐고 묻는 거야.
서울이랑 경기도권에 넣었다고 했지.
그랬더니 당연히 아빠네 집에서 사는 거 아니냐고 왜 자취를 하느냐고 물어.
혼자 원룸에 살면 얼마나 위험한지 아냐고.
그리고 네가 아직 혼자 안 살아봐서 모르는데, 후회할 거라고 말이야."
걱정하는 마음이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나는 알 것 같다, 그들의 본심을.
이미 웬만한 어른 몫을 톡톡히 할 정도로
집안살림에 익숙한 내 아이가
어린 딸 하나 키우는 아빠 집에 가게 된다면
주말마다 남동생이
애를 앞세워 누나집에 놀러 오는
횟수가 줄어 덜 귀찮아질 거라는 것.
그리고
집에 살림하는 여자 어른이
한 명 더 생기면
남동생이 좀 더 깔끔한 환경에서 살게 될 거라는,
'혈연'이라는 좋은 핑계에 깔린
그들의 계산을 말이다.
여전히 게으르고 손이 많이 가는
남동생의 성향을 알지만
아빠랑 함께 사는 내 딸이
얼마나 불편해질지
또 살림꾼으로 살아야 될지는
고모들 입장에선 내 알 바가 아닐 것이다.
"고모가 자꾸 아빠네 집에서 월세 걱정 없이 편하게 지내라는 둥 그런 소리하면, 엄마가 절대 아빠네서 살지는 말랬다고, 방 얻어준댔다고 얘기해.
엄마는 네가 아빠네 놀러 가는 건 괜찮은데 거기서 사는 건 아니라고 봐.
아빠가 데리고 사는 그 애 보호자 역할도 결국 니 몫이 될 거야. 엄마는 반대다."
나는 정색을 하면서
아이에게 다짐을 받아두었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바보였지만,
남편 없이 시어머니를 모시고 살았던
우리 엄마를 보면서 컸던
어릴 적 영향으로,
결혼 전
시어머니를 모시자는 제의에
난 잠시의 망설임도 없었다.
나는 결혼과 시어머니와의 동거를
남편과의 새로운 삶의 일부로 생각했지만,
그들에게 나는
'남자의 수발을 들어주고 어머니께 대리 효도를 해줄 수 있는'
젊은 여자가 들어온 것에 불과했다.
너무 과한 생각일까?
하지만 나는 결혼생활 내내
그런 느낌 속에서 살아야 했다.
그 집안에서는
너무나 당연한 희생이었고 양보였다.
내가 결혼생활에 종지부를
찍을 권리는 있어도
아이들에게 아빠를 뺏을 권리는
없다고 생각해 지금까지 한 번도
아이들을 아빠집에 못 가게 하지 않았다.
그것은
아이들의 선택이자 권리였기 때문이다.
아이들의 마음에 맡기면 될 일이었다.
아이 졸업식에 전남편을 초대하고,
할머니 장례식에 아이들을 데려다주면서
내 사정을 아는 사람들에게
타박 아닌 타박도 많이 들었다.
아직도 그렇게 할 정이 남아있는 거냐고
그럴 필요 있냐고.
하지만
남편으로서의 역할은 끝났어도
아이들의 아빠로서 가져야 하는
의무와 권리는
그 사람의 것이라 생각했다.
아빠의 재혼과
아빠의 또 다른 딸의 탄생과
아빠의 이혼을 또 지켜봐야 했던
아이들.
그리고 아빠가 어떻게 사는지
지금까지도 충분히 보았던
아이들.
훌쩍 자란 아이들은
더 이상
아빠네 선뜻 가려고 하지 않는다.
나 또한 예전과 다르지 않게
흔쾌히 비행기표를 끊어주고
가끔 아빠네 집 앞까지
아이들을 데려다주면서도
이제는 슬슬
물음표가 생긴다.
아빠네 가면 갈수록
아빠 흉만 더 늘어서
실망과 시무룩함만 안고 오는
아이들이 마음에 걸린다.
그리고 솔직히
그런 모습만 보여주는
그 사람이 못마땅하다.
전남편도
지금의 삶이 소중하겠지.
기쁠 때도 있겠지.
하찮거나
의미 없거나
남과 비교당해야 마땅한 삶은 없다.
하지만
아이들이 실망 가득한 눈으로 자신을 본다는 것을 알고 있을까.
낯선 동네와 낯선 학교, 친구들 사이에서
유년 시절을 힘들게 채운 내 아이들을
직접 보러 온 적이 잘 없었던 아빠.
그런 아빠가
정성스럽게 한 아이를 키우는 모습을
아이들은 커오면서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그 대상이 자신들이 되고 싶었을 텐데
섭섭하고 복잡했던 그 마음에
대체 어떤 위로와 사과가
소용이 있을까...
나는 더 이상
아빠네 다녀오라는 말을 하지 않는다.
아이가 원할 땐 언제든지 그러라고 할 수 있지만 이젠 예전처럼 반드시 가야 한다고 힘주어 말하지 않는다.
"아빠가 12월 마지막주에 제주도에 온대."
"오~ 그래? 너희들 보고 싶어서?"
"몰라. 그냥 걔가 비행기 타본 적 없다고 비행기 태워줄 겸 온다는데?"
...
말이라도
'우리 딸들 너무 보고 싶어서 가는 거야.'
그렇게 할 순 없었을까?
그래도 아빠라고
달력에 입력했을 아이들인데
결국 마지막주에도
애들 아빠는 오지 않았다.
예약하려고 봐두었던 숙소가 만실이라
자리가 없다는 이유였다.
제주도에 숙박업소가
거기뿐이던가?
참으로 사소한 이유들로
아이들을 또 실망시키는 사람이다.
참으로 미련하고
또 미련한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