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할머니 돌아가셨대."
아빠와 통화를 끝낸 아이가 말했다.
그렇게 나의 예전 시어머니는
개나리가 막 피어오르던 따뜻한 3월의 어느 날, 몇 년을 치매환자로 계시던 병원에서 생을 마치셨다.
내가 짐을 싸서 아이들과 나오고 얼마 되지 않아 전남편은 어머니를 큰 형님 집에 보냈다고 했다.
어머니와 사이가 좋지 않은 여자와는 살 수가 없다며 나를 내보냈으니 이제 어머니를 맘껏 모시면 될 일이었다. 그런데 왜 교회도 말벗도 없는 형님 집으로 보내버렸을까.
우리 집을 그렇게 신나게 드나들던 시누들이 근처에 살았었지만,
친정엄마가 오빠네 가면 얼마나 답답할지 그들도 모르는 바 아니었지만 어느 누구도 어머니를 모시겠다고 하지 않아서 큰아들 네로 보내진 것이 분명했다.
형님 집은 다가구가 다닥다닥 붙어있는 동네였다. 집을 나서면 주변의 집들이 다 똑같이 생겨서 어머니 혼자서는 쉽게 다닐 수 없는 동네였다. 게다가 형님 내외분은 거리가 한참 떨어져 있는 곳에서 농장을 하고 계셨다.
낮에 집에는 아무도 없었을 것이다.
형님 내외분은 일이 늦게 끝나거나 술을 드시면 집에 오지 않고 농장에서 주무시는 일도 많았다.
그러니 하루 종일 그 집안에서 외출도 못하고 얼마나 노인이 갑갑했을까.
매일 새벽기도를 가시던 시어머니였다. 지팡이 없이 운동삼아 활발하게 걸어 다니셨다.
밖을 못 나가시니 운동을 못하셨을 것이고 교회도 못 나가셨겠지.
하루아침에 손녀들과 이별한 자신의 처지와 혼자된 아들 생각에 밤낮 우셨을 것이다.
급격한 주변의 변화와 끝없는 좌절을 반복하셨을 테니 치매가 안 오는 게 이상했을지도 모른다.
어머니도 그럴 팔자, 나도 이럴 팔자였을까.
큰아들네 가신지 얼마 못되어 자식들이 요양병원에 모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처음엔 손주, 딸, 다 알아보시다가 점점 기억을 못 하시고 결국 아들만 알아보시다가 갑갑한 병원에서 떠나가셨다.
"장례식장 가서 시끄럽게 떠들면 안 돼. 그리고 할머니 사진 앞에서 꼭 인사드려. 알았지?"
아이들에게 검은색 옷을 단정하게 입혔다. 아빠가 데리러 온다고 했다.
내 아이들을 태어났을 때부터 키워주셨던 시어머니였다.
아이들에 대한 애정이 각별하셨다.
할머니가 얼마나 너희들을 이뻐하셨는지 옛날 앨범을 보여주며 늘 말해주곤 했었다.
아이들 어릴 적 사진에는 유난히 할머니와 찍은 사진이 많았다.
모두 내가 찍은 사진이었다.
두 아이가 태어날 때부터 필름 카메라로 사진을 찍고 일일이 골라서 인화해 앨범을 만들었다.
사람들은 CD나 USB에 담곤 했지만 딸이라는 이유로 돌잔치는커녕 어릴 적 사진이 한 장도 없었던 나는 아이들이 얼마나 사랑스럽게 커왔는지 언제든 볼 수 있게 꼭 앨범에 담아두고 싶었다.
아이들은 자신들의 앨범을 보면서 자랐다.
시어머니는 손녀들이 앨범을 갖고 오면 앨범 사진 하나하나에 입을 맞추며 좋아하셨다.
나에겐 미운 시어머니였지만, 아이들에겐 더없이 자상했고 늘 옆에서 다독다독 해주던 할머니였다.
결국 나처럼 '엄마'였기 때문에 나랑 그렇게 싸우고 울고 몸부림쳤던 분이셨다.
모실 수 없는 각자 사정들이야 다 있었겠지만
시어머니는 7남매를 모진 세월 견디며 어떻게든 키워냈으나
일곱 명의 자식들은 한 어머니를 봉양하지 못했다.
우리 엄마를 뒷방 노인 취급하면 가만두지 않겠다던 시누들도 어느 누구 하나 엄마를 집으로 모셔가지 않았다.
내가 모시고 살 때는 매달 드리는 용돈과 맞벌이했던 막내아들 내외 덕에 자식들이 늘 찾아왔다.
그래도 또 보고싶다하시면 일찍부터 운전을 했던 내가 발이 되어 드렸다.
우리가 드린 용돈을 아껴 손주들에게 과자값을 쥐어주는 낙으로 사셨다.
"큰아빠랑 고모들 많이 울지?"
장례식장에 다녀온 아이들에게 물었다.
"많이 안 울던데? 그냥 평소처럼 모여서 음식 잘 먹고 잘 웃던데."
안 봐도 그 장면들이 상상이 되었다.
그들은 모두 호상이라고 생각했을까?
"하나밖에 없는 엄마가 그것도 병원에서 고생하시다 돌아가셨는데 명절 때처럼 그렇게 웃고 즐겁다니?"
"원래 그렇잖아, 아빠네는."
새롭지도 않다는 듯이 무심하게 아이가 말했다.
그래 그랬지.
그 집안은 그랬어.
장지에 가야 하는 전남편을 배려해 아이들을 데리러 장례식장 주차장까지 갔다.
아주 잠깐이지만 들어가서 시어머니께 마지막 인사라도 드려야 하나 고민했다.
하지만 이내 생각을 접었다.
예전 일이 떠올라서였다.
함께 살 때, 큰 고모부님이 병으로 돌아가셨다. 큰 시누의 남편이었다.
나를 '처남댁'이라고 불러야 했지만 고모부님은 늘 나를 "김 과장! 어이 김 과장!"이라고 불렀다.
누구의 아내, 며느리도 아닌 직장에서 불리는 명함 그대로 불러주셨던 것이다.
남편과 사이가 한참 나쁠 때 그분은 세상을 달리하셨다.
장례식장은 전라도였다.
우울증까지 겹쳐 시가 사람들과 접촉을 하지 않고 지냈지만 고모부님이 돌아가셨다니까 꼭 가봐야 할 것 같았다. 살아계실 때 내가 받은 게 너무 많았다.
전남편은 시가와 담을 쌓은 나를 투명인간 보듯 하며 혼자 내려가버렸다.
어차피 같이 갈 생각도 없었다.
반나절을 운전해 장례식장에 찾아갔다.
시가 사람들이 넓은 자리를 차지하고 떠들썩하게 먹고 있었다.
장례식장에 들어서자
초대받지 않은 사람을 보듯 시가 사람들이 나를 쳐다봤다.
어느 누구 하나 반기지 않았다.
이유는 하나였다.
남편과 사이가 좋지 않고, 최근 시가 행사에 참석하지 않는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혼자 고모부님 영정 앞에 앉았다.
한참을 그렇게 앉아 있었다.
평소에 나를 장난스럽게 부르고, 일부러 소고기를 사 오시던 고모부님이 생각나 눈물이 났다.
나도 암수술을 한지 얼마 되지 않을 때였는데 암으로 돌아가신 고모부님 영정사진 앞에 서 있으니 더 눈물이 났다.
상복을 입고 있던 큰 시누가 밥이라도 먹고 가라고 했다.
"괜찮아요 형님... 오래 못 있어드려서 죄송해요."
어차피 장례식에서조차 환영받지 못하는 나였다.
신발을 신고 일어섰다.
돌아서서 나가려는데 술 취한 전남편의 목소리가 장례식장 로비에 쩌렁쩌렁 울렸다.
"지가 뭐라고 여길 와! 무슨 자격으로 여길 오는데!"
큰누나 가족들이 상중이었고,
나는 전남편과 사이가 좋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슬픈 일에는 함께하고 싶어 먼길을 달려왔었다.
그런 나를 두고 시가 사람들이, 시조카들이, 조카사위들이 다 보는 앞에서 소리를 질렀다.
그때 기억이 났다.
씁쓸했다.
"그 아줌마도 장례식장에 왔어?"
"아니 안 왔어. 임신했다고 힘들어서 안 왔대."
시어머니 장례식이 있고 3개월 뒤
남편은 갓 태어난 아이를 품에 안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