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혼 후 이야기 #. 5
강원도에서의 시간들이 2년쯤 되어가던 때였다.
"엄마, 예전처럼 아빠 집 근처에 살면 안 돼? 그럼 우리가 지하철 타고 아빠한테 마음대로 갈 수 있고, 고모집에도 우리끼리 버스 타고 갈 수 있잖아."
아이가 물어봤지만 내키지 않았다.
이제는 예전처럼 달동네 집에 살지 않아도 되고 교육문제를 생각해서라도 경기도로 가는 게 좋을 것 같긴 했지만 전남편, 전 시누들과의 거리가 가까운 동네에 산다는 것이 불편하고 싫었다.
며칠을 고민하다가 결국 직장에 근무지 이동 희망서를 제출했다.
"편한데 조금만 더 있지, 벌써 거길 또 가려고?"
남들이 기피하는 자리였다. 그곳으로 간다면 일도 힘들도 물가도 비싸 생활이 더 빠듯해지겠지만 아이들이 간절히 원하고 있었다.
지금까진 내가 선택해서 이사를 했다.
내 결정대로 아이들이 바뀐 환경에 적응하며 생활해야겠다.
하지만 좀 더 자란 아이들은 아빠와 가까이 살고 싶어 했고, 문화혜택을 누릴 수 있는 수도권에 살고 싶어 했다.
이번엔 아이들이 나에게 부탁하고 있었다.
또다시 이사를 했다.
이제야 나에게 익숙해진 동네와 사람들을 다시 떠나왔다.
나는 많이 바빠지고 업무량도 늘었지만 예전보다는 아이들이 컸고 일일이 손이 가던 때보다 수월했다.
아이들은 만족해했다.
아빠가 옆동네에 살았고 문화 시설도 많은 동네였다.
문제는 아빠네 자주 가니 그 아줌마를 볼일이 더 잦아졌고 아빠에게 여자 친구가 생겼다는 것을 직접 듣게 되었다는 것이다...
퇴근 후 아이들과 아웃백에서 마주 앉았다.
낮에 전남편에게서 받았던 문자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물어보지 않았다.
맛있는 것을 먹기 전에 그런 슬픈 이야기를 꺼내면 아이들이 제대로 못 먹을 것 같았다.
나는 나대로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티를 내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아이들이 애쓰는 것이 보였다.
일 년에 한두 번 올까 말까 한 식당이었다.
오늘은 아무 날도 아닌데 엄마가 여길 데려왔으니 아이들도 엄마가 평소와 좀 다르다는 것을 느꼈을까.
일부러 비싼 메뉴를 주문했다.
그런 나를 물끄러미 보고 있던 큰아이가 딱 잘라 말했다.
"세트메뉴가 가성비가 더 좋아, 엄마. 이건 시킬 필요가 없어."
"... 그래? 알았어, 그러자."
아직 어린데도 돈에 있어서는 냉정한 아이였다.
아이폰을 사고 싶어 친구들이 햄버거 세트를 먹을 때 옆에서 아이스크림 한 개만 주문해서 먹던 아이였다. 2년 가까이 돈을 모아 원하는 핸드폰을 스스로 샀었다.
택시비가 아깝다고 오지 않는 버스를 기다리고, 엄마가 충전해주는 교통카드인데도 버스비가 아깝다며 웬만한 거리는 걸어 다녔다.
몇백 원, 몇십 원 그렇게 자린고비처럼 아끼고 모아서 동생이 중학교 들어갈 땐 15만 원짜리 입학 가방을 사준 언니였다. 친구들 사이에서 기죽지 말라고 엄마보다 먼저 사준 가방이었다.
지금 아빠로 인해 기분은 좋지 않지만, 그래서 평소에 짠순이 엄마가 일부러 비싼 것을 시키려고 하는 것 같지만 합리적이지 못한 소비다 싶으면 엄마 돈이어도 쓰는 것을 싫어했다.
밥 먹는 내내 우리는 별말하지 않았다.
평소처럼 음식 품평을 하고 학교 이야기를 했다.
옆 테이블 손님 중에 생일인 아이가 있었는지 식당 스텝들이 와서 탬버린을 치며 생일 축하곡을 불러줬다. 푹 가라앉아있던 우리 테이블까지 흥겨운 분위기가 파티션을 타고 넘어왔다.
아이들이 옆 테이블을 힐끗 쳐다보았다.
아빠, 엄마, 아이 둘.
행복해 보이는 4인 가족이었다.
이내 고개를 돌렸다.
집에 와서도 다들 말이 없었다.
나는 아이들이 먼저 말해주길 기다렸지만 아이들은 엄마가 모를 거라는 생각에 일부러 말을 하지 않고 있었다.
작은 아이가 머리를 감길래 평소처럼 드라이기로 말려주었다.
"엄마가 동생이랑 이야기 좀 하고 나올게."
큰아이에게 말하고 자러 들어가는 아이를 따라 들어갔다.
불이 꺼진 방에서 돌아누운 아이 머리칼을 쓰다듬으며 아빠랑 오늘 혹시 통화했냐고 물어보았다.
아빠가 하교하는 시간에 맞춰 전화를 했고 집 근처에 잠깐 오셨다고 했다.
엄마가 물어보는 것에 무심한 듯 "응."이라고만 눈을 질끈 감고 대답하길래 덤덤한가 보다 했는데 아이는 이내 훌쩍거리더니 속에 있던 이야기를 쏟아놓기 시작했다.
숨 쉬는 것과 말을 동시에 이어나가니 그렇게 서럽게 들릴 수가 없었다.
"우리 가족은 누구 한 사람 잘못하지 않았는데... 우리 집만 왜 이래?
나도 아빠가 여자 친구 생기는 거 너무 싫어. 그렇지만 내가 티 내면 아빠가 슬플 거니까 뭐라고 못했어. 내일 학교 가서도 계속 생각나서 슬플 것 같아."
아이는 펑펑 울기 시작했다.
-그래 아가. 울고 싶을 때는 울어. 펑펑 울어. 엄마 앞에서 다 울어.-
작은 아이는 누운 채로 그렇게 한참을 울었다.
등을 쓰다듬는 것 밖에 나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엄마인 내가, 보호자인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학교에서 돌아온 둘째 아이에게 아빠가 전화를 해서 집 근처에 온다고 했단다.
아빠가 편의점에 데리고 가서 간이 테이블에 앉아 짜장컵을 사주면서 여자 친구가 생겼다고 말을 했단다.
아이는 맛있는 짜장컵을 호록 호록 말없이 먹으며 아빠 여자 친구라는 그 아는 아줌마를 떠올려야 했을 것이다.
아빠나 되는 인간이 비싼 밥 한번 못 사줄망정 또래 친구들이 왔다 갔다 하는 동네 편의점에서 인스턴트식품을 사주며 한다는 말이 '여자 친구 있다'라니.
정말 어이가 없었다.
그렇게 이야기를 다 들어주고 재운 뒤 방을 나왔다.
식탁에 우두커니 앉아 있는 큰아이와 마주했다.
학원 가느라 아빠를 만나지 못한 큰 아이는 전화로 아빠의 여자 친구 이야기를 들었다고 했다.
아빠와 통화를 끝낸 뒤 말로는 하지 못한 마음을 장문의 카톡으로 보냈다고 했다.
-여자 친구 안 사귀면 안 되냐고, 우리가 자주 갈 테니 그냥 외로워도 조금만 참고 우리만 보면 안 되냐고-...
그렇게 보낸 문자에 아빠는 "우리 딸, 아빠가 사랑해~"라는 답장만 남겼다고 했다.
큰아이는 훌쩍이며 '내가 본심을 말해서 아빠가 기분 상한 것 같다'는 걱정도 덧붙였다.
두 시간 가까이 큰 아이와 마주 앉아 이야기를 했다.
너희들 잘못이 아니라고.
이혼을 선택한 건 어쩔 수 없었지만 마음을 아프게 해서 미안하다고. 그리고 엄마가 너희들 곁에 끝까지 남아있겠노라고 했다.
나는 반드시 그래야 했다.
울던 큰아이도 자러 방에 들어갔다.
나는 식탁에 앉아 있었다.
전남편이 생각보다 일찍 여자 친구를 오픈한 것은 나의 잘못이 아니다.
아이들의 잘못도 아니었다.
그저 그 사람의 삶일 뿐이었다.
우리가 가까운 곳으로 이사 온 후, 전남편은 가끔 아이들을 데리러 집 앞에 올 때
옆에 여자 친구를 태우고 왔다.
물론 자기만 내려서 아이들을 차에 태웠고, 그 여자는 차 안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처음부터 아줌마와 같이 온다고 하면 아이들이 싫다고 할 것이 뻔하므로 여자 친구 이야기는 하지 않고 데리러 왔다.
그럼에도 아이들은 희망을 품었던 것 같다.
언젠가는 아빠가 돌아올 거라 믿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랬던 아이들이 흔들리고 있었고
울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저 입술만 깨물며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아이들을 보며 복잡하게 얽힌 이 감정을 고스란히 가지고도
나는 내일 아침에도 아침밥을 하고 아이들을 깨우고 바쁘게 출근을 할 것이다.
주말에는 일주일치 장을 보고, 아이 교복을 다림질하고, 아이가 가져오는 가정통신문에 내 이름을 쓰고 서명을 해서 보낼 것이다.
울지 않았다.
슬프지 않아서가 아니라
아이들이 불쌍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자정이 훨씬 넘은 지금 울면 내일 아침 아이들에게 분명 부은 눈을 보여줄 것이 뻔했다.
출근해서도 퉁퉁 부은 눈을 직장에 보여줘야 할 것이었다.
그냥 참았다.
참는 게 나는 쉬웠다.
울음은 나중에 토해내도 될 일이었다.
비에 젖은 듯 축축했던 하루를 그렇게 겨우겨우 밀어내고 있었다.
얼마 못가 아이들 편으로 소식을 들었다.
그 아줌마가 임신을 했다는 소식이었다.
아빠가 자랑을 했던 모양이었다.
"아빠가 아이가 생겼대."
아이들은 무덤덤하게 식탁에서 밥을 먹다가 말했다.
전남편은 여자 친구와 혼인신고를 하고 새로운 가정을 이루었다.
그리고 신혼부부 혜택을 이용해 그 동네에서 아파트를 분양받았다.
입주하던 날, 전남편은 온 식구를 다 불러 집들이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