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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극배우 B씨 Sep 13. 2020

알아. 아빠 여자 친구라는 거

이혼 후 이야기 #. 4

"아빠 집에 이상한 게 있어."

"이상한 거?"

"응"


주말을 아빠와 보낸 아이들을 태우고 강원도로 돌아가는 차 안이었다.

"뭐가 있었는데?"


"아빠네 가면 작은 방이 있는데 거기에 들어가 봤거든? 그런데 종이 가방 안에 분홍색 여자 속옷이 있었어."

"맞아.  그리고 화장실에 여자 칫솔이랑 유치하게 애들이 쓰는 것 같은 칫솔도 있어."


아이들이 혼자 살고 있는 아빠네 집에서 다른 사람의 흔적을 찾아내기 시작했다. 한 달에 두어 번 갔지만 여자 아이들이라 그런지 작은 물건 하나에도 민감했다.

"손님이 잠깐 오셨었을 수도 있지."

"손님이 속옷도 벗어놓고 가?"

"..."


아이들의 불안은 희미하지만 분명한 사실로 나타나고 있었다.

섬에 있을 때 아빠를 만나러 육지에 나오면 자주 만나서 밥도 먹고 놀다가는 아줌마가 있었다고 했다. 

그 아줌마는 자기들보다 몇 살 어린 남자아이의 엄마였고, 자주 그 아줌마의 언니 집에도 가서 놀았다고 했다.


아빠는 그 아줌마를 그냥 직장에서 아는 사람이라고 했단다.

하지만 아빠 핸드폰 안에는 그 아줌마랑 둘이서 다정하게 찍은 사진이 사실 많았다고 했다.

생각하기도 싫은 '만약'이라는 불안함을 둘이서 쉬쉬하며 감춰왔을 두 꼬맹이들. 


언젠가부터 발견되던 아빠네 집에 있었던 여자 물건의 주인은 바로 그 아줌마였다.

핸드폰에 코를 박고 게임을 하던 또래 남자아이의 엄마, 그 아줌마였다고 했다.


불현듯 예전 결혼 생활할 때 전남편이 만나던 그 여자가 떠올랐다.

이혼 전 이야기 #.4  남편의 그녀를 대면했다

그 여자와 몰래 만날 때도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들을 데리고 나가 찜질방, 고깃집을 같이 다니며 슬쩍슬쩍 애인을 보여줬던 전남편이었다. 



전남편은 섬에서 아이들을 데리고 살던 나에게 이혼소송을 당하기 전부터 또 만나고 있는 사람이 있었고 아이들이 올 때마다 집안에서 여자의 물건을 치우고 혼자 사는 것처럼 했다.


언제부턴가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아이들은 그 아줌마에 대한 흉으로 한참을 떠들었다. 

그리고는 말없이 차창밖을 한참이나 응시하다가 잠들곤 했다.

아이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 같은데 하지는 않고 언저리를 빙빙 돌고 있었다.

그런 아이들을 보고 있자니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이혼소송전에 여자를 만난 것을 내가 알았다 하더라도 간통이니 뭐니 딴지를 걸고 싶지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아직 법적으론 부부였으니 들켜봤자 좋은 영향을 주진 않은 일이었다.

아이들도 아줌마에 대해 그동안은 일체 말하지 않았기에 나는 알 수가 없었다.


법원에서 양육비를 결국 깎는 데 성공한 남편이 갑자기 부성애 넘치는 포스로 한마디를 더 했었다.

"판사님, 혹시 애엄마가 나중에 재혼이라도 하게 되면 아이들은 제가 맡아서 키울 수 있도록 법으로 정할 수 있나요?"


전남편은 내가 아직 젊어서 언제든 다른 남자를 만나 가정을 또 이룰 거라고 생각했던 모양이었다.

양육비는 주기 싫어 지금껏 미적거렸지만, 내 아이들이 다른 놈의 손에서 다른 놈을 아빠라고 부르며 크는 건 싫었을까.


어이가 없어서 한마디를 던졌다.


당신이 평생 혼자 살 거면 그렇게 해도 돼! 뭘 미리 걱정해?

그렇게 애달픈 부성애가 넘쳤던 전남편은 그 당시에도 여자를 만나고 있었으면서 그랬던 것이다.


법적으로 남이 되고, 이제 다른 사람을 만나도 전혀 거리낌이 없어진 전남편은 슬슬 '여자 친구'의 존재를 아이들에게 부각하기 시작했다.

그냥 아는 사람이라며 슬쩍슬쩍 자리를 함께 했던 아줌마가 어느새 아빠네 와서 살고 있었고, 아이들에게 어떤 설명도 양해도 없이 불쑥 끼어들어온 사람이 되어 있었다.


"서운하겠지만... 엄마가 생각했을 땐 아빠 여자 친구인 것 같아."

"그랬겠지 뭐."

생각보다 아이들은 무심한 듯 뱉었다.


아빠를 뺏겼다는 질투심보다는 그저 아빠가 우리에게서 더 멀어질지도 모른다는 불안함이 아이들을 힘들게 했을 것이다.




큰아이는 슬슬 아빠네 가는 것을 싫어하는 눈치였다. 가봤자 그 여자와 함께 살고 있는 집이 불편했던 것이다.

하지만 둘째는 언니가 가지 않아도 꼬박꼬박 가려고 했다.


"언니는 그 아줌마 보는 게 싫어서 아빠 만나러 안 가려고 하는데 너는 아빠한테 왜 가려고 하니?"


"... 솔직히 나도 싫어. 아빠 옆에 그 아줌마 있는 거."


"그러면 억지로 안 가도 돼."


"내가 아빠한테 그 아줌마 싫다고 하면... 아빠는 내가 싫어하니까 아줌마 안 만나겠지. 그럼 아줌마랑 헤어지고 아빠는 또 혼자가 돼. 그럼 또 외로울 거잖아."


아이의 말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아이고... 우리 딸. 네가 그런 것 까지는 생각해주지 않아도 돼. 그런 건 상관없어"

"아니 상관있어. 우리 아빠니까. 엄마도 외할아버지가 살아계셨다면 나처럼 똑같이 그럴 걸?"



화가 났다.


이혼을 했지만, 그건 부부의 관계 정리였다.

법적으로 이혼을 했으니 누구를 만나든 전혀 문제가 없다는 것을 아는 것은 어른들 뿐이었다.

전남편의 사생활은 충분히 존중해주고 싶었지만 아이들은 여전히 아빠를 쳐다보고 있는 해바라기였다.


아이들이 사춘기였고, 충분한 이해와 설명을 한 후에 공개해도 되지 않았을까, 왜 저렇게 아이들을 배려하지 못할까 하는 답답함이 솟구쳤다.


당장은 아빠와 엄마가 법적으로 남남이라는 사실을 굳이 인지시키고 싶지 않았다. 그저 아이들이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 아주 조금씩 아주 천천히 기다리면서 말해주고 싶었다.

밥을 꼭꼭 씹어 넣어주듯, 아이들이 소화시킬 수 있을 만큼만 조금씩 조금씩 떼서 이야기해주고 싶었다.


그토록 당당해지는 전남편도 이해가 안 됐지만 그런 아빠의 처지를 이해하면서 혹여나 아빠가 서운해할까 봐 그 분위기를 견디고 딸 노릇을 하고 오겠다는 둘째를 보니 나로서는 눈이 뒤집힐 노릇이었다.


전남편에게 문자 메시지를 보냈다.


-이혼했으니 당신이 누구를 만나고 뭘 하든 나는 관심 없어! 하지만 애들 입장에서는 아빠가 가타부타 설명도 없이 갑자기 아줌마란 사람하고 한집에서 사는 것을 아이들이 갈 때마다 보는데, 애들 심정은 생각해봤어? 차라리 설명을 하고 정식으로 소개라도 시키든가. 애들이 바본 줄 알아?-


문자가 아니라 쫓아가서 얼굴에 욕을 퍼부어도 분이 풀리지 않을 지경이었다.

체념한 듯하면서도 자꾸만 아빠에 대해, 우리 가족에 대해 기대를 품는 듯한 아이들의 아쉬운 눈빛을 볼 때마다 정말 남아있는 억장마저도 무너지는 것 같았다.



직장에서 일을 하고 있는데 전남편이 갑자기 문자가 왔다.


-오늘 애들한테 아빠 여자 친구 있다고 얘기했어. 애들  잘 챙겨줘요. 특히 큰애는 많이 싫었나 봐.

애들한테는 말 안 했지만 혼인신고는 했어.

당신도 좋은 사람 만나요...

애들이 보고 싶다고 하면 보러 갈 거고 전화연락은 평상시처럼 할 거야.

미안해, 애들 잘 달래줘-


만나는 건 좋지만 시기가 이른 것 같아 아직은 조심하라는 의미로 말한 건데 전남편은 시키는 대로(?) 아이들에게 여자 친구를 공개를 했다고 했다.


'보물 1호'라며 아주 어릴 때 찍었던 우리 가족사진을 책상에 놓아두고 있던 첫째 아이 얼굴이 떠올랐다.

아빠가 외로울까 봐 싫다는 내색을 하지 않던 둘째 아이도 떠올랐다.


퇴근시간을 기다리며 마음이 급해졌다.


집에 가서 아이들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머릿속이 복잡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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