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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극배우 B씨 Aug 21. 2020

남편의 그녀를 대면했다

이혼 전 이야기 #.4

“000 씨 아시죠?”


“네. 제 고객님인데요.” 


“제가 와이프 되는 사람입니다”


“......”


오늘도 실적 한건 올릴 줄 알고 호기심 어린 눈으로 나를 보던 그 여자의 동공이 약간 커졌다가 흔들렸다.

고객의 아내라는데, 정상적인 영업인이라면 반갑게 인사를 했어야 맞지 않는가.

나보다 나이가 많았다. 보란 듯이 명품가방을 테이블 위에 자랑스럽게 올려두고 있었다.

말없이 싸늘해진 그 여자는 눈빛으로 묻고 있었다

-그래서요?-


“그쪽이 남편한테 보낸 문자, 제가 다 봤어요.”

“무슨 문자요? 오해하신 모양인데, 문자라면 고객관리 차원에서 보낸 건데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죠?”

“그렇게 사적으로 사랑한다고 보고 싶다고 문자 보내는 것도 고객관리인 가요?”




여자와 대면할 장소를 대낮의 패스트푸드점으로 정한 것이 다행스러웠다.

머리를 뜯으며 싸울 기운도 없었지만, 이런 이야기를 꺼내면서 그 장소가 비싼 커피가 나오는 분위기 좋은 카페라면 더 억울할 것 같았다.


두 여자가 세상 심각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주위는 햄버거를 먹으러 온 학생들, 어린아이를 데리고 와서 감자튀김을 먹는 엄마들로 왁자지껄했다. 우리를 전혀 고려하지 않은 소란스러운 풍경이 tv에서처럼 주인공이 소리 없이 눈물을 흘리거나 상대를 향해 물을 뿌리는 장면보다 썩 마음에 들었다. 


그냥 경고만 해둘 참이었다. 이런 미친년! 하며 요절을 내겠다는 생각은 애초부터 없었다.

당장에 이혼을 하고, 남편 직장과 그 여자 집안에 폭로를 하고 소송을 하는 것도 참 속 시원하겠지만, 남편은 아직 할 일이 남아 있었다. 나에게 애들을 빼앗기고 보기 좋게 버려져야 하며, 직장에서도 더 쓰레기로 소문이 나려면 당장 잘려선 안됐다. 무엇보다, 두고두고 아이들에게 경제적인 책임을 다하려면 남편도 직장은 있어야 했다.


문자 증거가 있냐고 딱 잡아떼는 여자에게 집에 메모해둔 것이 있으니 그대로 다시 보내주겠다고 했다. 집에 오자마자 남편의 핸드폰 속 메세지를 보고 메모해둔 그 문자를 글자 하나 틀리지 않고 보내줬다. 여자는 반박도, 답장도 없었다. 


증거 따위를 잡을 생각은 없었다. 

그저 내 추측으로 혼자 써 내려간 소설이길 바랬다. 

남자이름으로 저장된 그 핸드폰 번호가

사랑한다고 보고 싶다고 오래 못봐서 아쉬웠다던 그 문자가

집앞으로 남편을 종종 태우러 왔던 그 자가용이

그 여자 것이 아니라는 것만 확인하고 싶었다. 


가계부를 썼기에 남편 카드 사용내역을 평소에도 조회하며 결산을 했다. 어느 날 부터인가 날짜를 보면 분명 직장 사람들과 회식이었다는 날인데 금액은 두 사람이 먹은 금액이었다. 회식 후 노래방도, 2차 호프집도 죄다 두 사람이 먹었음직한 금액이었다. 


술자리가 잦길래 아직 들어오려면 멀었냐고 전화를 한 적이 있는데 가까운 직장동료와 아직 술자리 중이라고 했다. 나도 아는 사람이었다. 인사를 하게 그럼 좀 바꿔달라고 했다. 남편은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바꿔주지 않았다. 목소리에서 장난기 있는 웃음이 묻어났다. 그 여자와 마주 앉아 스피커폰 모드라도 해놓고 웃은 것일까.


아이들을 통해서도 그 여자의 존재가 점점 현실로 나타나고 있었다. 내가 없이는 아이 둘을 데리고 혼자 외출하는 것을 버거워하던 남편이 언제부턴가 아이 둘을 데리고 자주 나갔다. 아이들은 어떤 아줌마랑 찜질방도 가고 갈비 먹으러도 갔다고 했다. 


그런 일이 잦아지길래 '누구를 만나는데 딸아이들을 데리고 아빠가 가기힘든 찜질방을 엄마인 나도 없이 가느냐.'고 물었다. 남편은 그냥 찜질방 모임?이라고 얼버무렸다

알고 보니 그 여자와 함께였다. 

“아빠는 그 아줌마랑 같이 치킨이랑 맥주 마시고요, 우리는 과자 먹고 찜질방 놀이터에서 놀았어!” 

단둘이서만 낮에 만나기엔 주위 시선이 부담스러웠을 것이다. 그 여자에게도 우리 아이또래의 아이가 있었다. 그들은 누가 봐도 아이가 많은 가족 같은 그림을 연출하며 만나고 있었다.

내가 죽지 않으려고 정신과 약을 먹고 잠에 빠지길 반복하며 혼자 사투를 벌이고 있던 시절이었다.


그렇게 잘 포장하고 숨겨왔던 두 사람 사이는 내가 그 여자를 불러냄으로써 수면 위로 떠올랐다. 그들을 더욱 조심하게 하는 계기만 만들어줬을 뿐이겠지만.




여자를 만나고 집에 들어오기 바쁘게 예상했던 대로 남편에게 전화가 왔다. 화가 잔뜩 나서 있지도 않은 사실을 가지고 생사람을 잡았다며 그 여자 편을 들고 자신을 방어했다.

“그 사람은 고마운 여자야!!”


...그 여자가 고맙다고 했다.

당신 어머니를 모시고 맞벌이하며, 주말을 시가 식구들에게 반납하고, 명절을 혼자 준비하던 세월들이 빠르게 머릿속으로 지나갔다. 


아이를 낳고 대리 효도를 해주며 살아온 아내가 아니라 보도 듣지도 못한 어떤 여자를 내게 고마운 사람이라 했다. 

쓴 읏음이 났다. 

한 번만 더 그 사람에게 연락을 하면 자기도 가만히 있지 않겠다고 했다. 



내가 그 여자를 불러내기 얼마 전, 남편이 갑자기 강원도 결혼식에 간다고 했다. 웬만한 지인들은 나도 아는 터라 결혼하는 사람이 누구냐고 물으니 당신은 모르는 사람이라 했다. 언제 올 거냐고 물으니 오늘 못 올 수도 있다고 했다.

자기 결혼식도 아닌데 무슨 지인 결혼식을 1박 2일을 가는지 궁금했다. 별스러운 기운이 나를 감쌌다. 평소 별명이 곰 일정도로 무딘 나는 그런 느낌을, 시쳇말로 촉이라는 것을 느껴본 적이 없었기에 심장이 저 아랫배 정도까지 툭 털어지는 느낌에 머리털이 곤두섰다.


그날은 나도 회사에 나가는 날이라고 거짓말을 했다. 출근하는 척을 하면서 하루 전에 렌트해둔 차를 아파트 주차장에 세워놓고 기다렸다. 말쑥하게 차려입은 남편이 현관을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자가용 한 대가 와서 섰다. 남편이 타더니 얼마를 못가 운전석과 자리를 바꾸는 걸 멀리서 보았다. 너무 멀리 떨어져 세운 탓에 옆자리에 앉은 사람이 누구인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차량번호는 내가 얼핏 보고 기억했던 그 번호였다. 자주 우리 아파트 주차장으로 남편을 데리러 오던 차였다. 운전자를 본적은 없지만 직장 남자후배라고 했기에 그냥 믿었었다.


강원도 가는 고속도로를 렌터카를 타고 뒤따라갔다. 운전을 능숙하게 잘하는 남편과, 손을 부들부들 떨면서 운전하던 나와의 거리가 멀어지고 급기야 차들이 앞뒤로 끼어들기 시작하면서 앞서가던 그 차를 놓치고 말았다. 강원도 그 고속도로에서 난생처음 170km로 액셀을 밟으며 미친 여자처럼 그 차를 찾아보았지만 어디에도 없었다. 


이러다가는 사고가 날 것 같았다.


마음을 진정하려고 갓길에 차를 세웠다.

폭풍 같은 울음이 터졌다.

엄마가 돌아가신대도 이렇게 큰소리로는 울지 못할 것 같았다. 짐승처럼 꺽꺽 거리며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울음이 내 입에서 터져 나오고 있었다. 


차를 놓쳐서가 아니라 내 의심이 명백한 확신이 아니라서 그저 의심으로만 남게 되었다는 것이 억울해서 울음이 터졌다.

이 좋은 날씨에, 이 좋은 시간에 왜 내가 여행 갈 때도 안 빌리는 렌터카를 빌려서 어디쯤 인지도 모를 고속도로 한편에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듯 상실한 마음으로 앉아있는지 스스로 이해를 할 수도 설명할 수도 없었다.

 

상담치료받을 때도 나오지 않던 울음들이 봇물 터지듯 쏟아졌다.

고속도로 갓길에서 한참을 그렇게 침도 닦지 못한 채 울었다.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하늘이 참 맑은 오전이었다. 


드라이브하기엔 정말 좋은 날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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