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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극배우 B씨 Aug 22. 2020

장모에게 문자로 이혼 통보하는 사위

이혼 전 이야기 #.5

아무것도 모르고 20대에 젖 먹여 키우기 시작했던 큰아이가 벌써 초등학생이 되고 있었다. 아이들을 데리고 나오기 위해 법률구조공단에 들렀다가 뾰족한 답이 없어서 결국 법원까지 가서 민원상담을 요청했다.

이런저런 법률적인 자문을 듣다가 상담해주시는 나이 지긋하신 분이 말했다.


그런데.... 아직 이혼을 알아보고 다닐 나이는 아닌 것 같은데...

서른 살 신고식처럼 암 선고를 받았던 나는, 질병이든 이혼이든 천재지변이든 나이와 상관없는 이변들이 찾아와 우리의 삶을 당혹게 하는 일이 정말 많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저와 똑같이 살아보고나 그런 소리를 하시는 거냐고 욱하는 감정이 치밀어 올랐으나 그래도 인생 풍파 다 겪으셨을 그분의 말씀이 틀린 건 아닌 것 같아 조용히 일어섰다.




저녁에 고향에 계신 엄마에게 전화가 또 왔다.

그 사건 때문이었다. 

남편이 장모님에게 전화도 아닌 문자로 "장모님 딸이랑 더 못살겠으니 이혼하겠습니다."라고 통보하듯 메시지를 보낸 일이 그전에 있었다. 놀란 엄마가 사위에게 전화를 아무리 해도 받질 않으니 엄마는 나에게 전화를 해서 대뜸 물어보셨다.


"네가 혹시 남자 생겼니?"


자식의 결혼 생활이 삐끗하면 내 자식이 뭘 흠잡힐 데가 있었는지 덜컥 놀라시는 친정 엄마. 

그리고 아들이 명백히 잘못을 해도 내 아들을 감싸고 며느리 탓부터 하고 보는 시어머니. 

엄마도 시어머니도 다 똑같이 내 잘못을 묻고 있는 기분이었다. 그래, 무슨 일이 터져도 무조건 내 탓이구나. 내 탓이야...


결혼하고 6년 동안은 명절 연휴에 집에 한번 가지 못했고, 시어머니와 살면서 힘들었던 것, 남편의 외도, 우울증, 하다못해 암수술까지 친정에 한 번도 이야기할 수가 없었다. 하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혼하겠다는 결심도 차마 말씀을 드리지 못했다. 내가 이야기할 수 있는 유일한 가족은 친언니 한 명이었다. 언니를 찾아가 목이 쉬도록 내 마음을 이야기하고 울고 분노했다.


절대 엄마에게는 말할 수 없었던 불행인데, 남편이 참으로 예의 바르게 장모님 딸이랑 못살겠다며 문자로 이혼을 통보한 것이다. 엄마에게 부부의 불화 상태를 폭로(!) 한 것을 알게 되자 더 이상은 숨길 것도, 참을 것도 없었다.

"그래? 어차피 엄마도 알게 된 거, 그럼 다 오픈하자. 그 여자 남편한테까지도 말이지."

여전히 남편은 그 여자를 만나고 있었다. 

내가 모른 척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아직도 그 여자 만나고 있냐는 내 물음에 남편은 <쪽팔려서 살 수가 없다>고 일축했다. 여전히 정신과 약을 먹고 온전치 못한 의붓증 아내로 쪽팔려했다.


그 여자 집전화로 전화를 했다. 아무개 씨 있냐고, 그러자 남편이 지금 외출하고 없는데 누구시냐고 물었다. 

그냥 친구라고 싸늘하게 말했다. 그리고 끊었다.

예상한 대로 자기 남편의 추궁을 받은 듯한 그 여자가 왜 자기 집에까지 전화하냐며 여기 있는 우리 남편을 들들 볶은 모양이었다. 당장 우리 동네로 오겠으니 세 명이서 이야기 좀 하자고 했다.


"그 사람 이리로 온대. 얘기 좀 하자고 나오래."

"당신이 그 여자 대변인이야? 왜 내가 오라는 대로 나가야 해? 아쉬운 건 당신들 아니야? 우리 집으로 올라오라 그래. 어머니도 내가 당신 아들 의심한다고 하시는데, 정말 그런 건지 그 여자 올라오라고 해서 어머니까지 4명이서 이야기해보자. 정말 내가 잘못 생각한 거면, 내가 사과할게."


어차피 집 앞에 나가 2:1로 이야기해봐야 미리 말을 맞춘 이 사람들을 상대할 수가 없다. 나는 의붓증 있는 악다구니 쓰는 여자가 되어 동네에 또 좋은 구경거리를 내놓을 게 뻔했다. 그것보다 더 컸던 것은 어쩌면 이 두 사람을 내가 죽여버릴 수도 있겠다는 분노가 치솟아 오르고 있었다. 

엄마에게 문자를 보낸 남편의 뻔뻔함에 진작 그 손가락을 잘라 버리고 싶은 충동을 겨우 누르고 있었던 참이었다.


내가 그 여자라면 명예훼손을 당하고 가정 파탄의 피해를 입었으니 사과를 받으러 우리 집에 왔을 것이다. 오해받고 있던 부분을 다 해명을 하고, 사과를 받아냈을 것이다. 양심에 걸리는 게 없었다면 말이다.

여자는 올라오지 않았다. 대신 남편이 한 시간 넘게 밖에 있다가 들어왔다. 


나는 명예훼손으로 고소를 당하거나 그 여자의 남편으로부터 항의 전화라도 받아야 정상이었다. 왜 쓸데없이 의심을 해서 남의 가정에 불씨를 던지냐고, 사과를 하라는 전화를 받았어야 했다.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엄마는 전화를 해도 받지 않는 사위에게 지쳤는지 나에게 전화를 해서 타일렀다.

"그래도 네가 참아라... 본성이 나쁜 사람은 아니다."

엄마는 앞서 언니에게 전화를 해서 화를 내셨는데, 결국 언니도 속이 터지고 열 받아서 이야기를 다 했다고 했다.

동생의 암수술을, 결혼생활을, 제부의 외도, 고부갈등, 시가 사람들과의 불화를 말이다.

의외로 암수술 이야기를 해도 엄마가 담담하게 듣고만 계셨다고 해서 별 신경을 쓰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재차 전화를 한 엄마는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보다 더 서럽고 서럽게 우셨다.

왜 그런 걸 지금까지 숨기고 혼자 그러고 있었냐고, 엄마랑 비밀이 없기로 했는데 왜 안 지켰냐고, 그게 뭐냐고 말도 제대로 못 잇고 우셨다.

"... 엄마 이거는요, 백 년도 더 살 수 있는 병이래요."

고작 그렇게만 말씀드리고 먼저 끊을 수밖에 없었다. 계속 서럽게 우시는 엄마 목소리를 듣고 있을 용기가 없었다.


그저 나의 선택이었고, 나의 삶이었을 뿐인데도 엄마는 당신의 팔자를 닮아서 그런 거라고 자책하셨을 것이 뻔했다. 장모한테 그렇게 문자를 날리고 전화도 받지 않는 남편의 태도에, 처갓집이 장인도 없고 아들도 없어 우리를 업신여기는 거라고 언니가 분노하는 것조차도 괜히 친정에 욕을 보이는 것 같아 면목이 없었다.




시시각각 변하는 내 감정을 하루에도 수십 번 저울질해보지만...

결코 내가 아이들을 놓고 집을 나갈 수 없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아무리 분노하고 절망하고 눈물을 흘려도 아이들의 웃음과 미소에 가려져서는 또 하루하루 그렇게 엄마로서만 살아갈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런 다짐들은 엄마의 딸이기 때문에, 엄마에게 마음의 짐이 되지 않기 위해 궁여지책으로 선택한 결론이었을 것이다. 나는 아이를 낳고 엄마가 되어 있었지만, 내 엄마에게 칭찬받고 싶고 버림받기 싫은 또 다른 작은 아이의 모습이었다. 내가 조금만 더 참으면, 조금만 더 숨어서 울면 결국에는 잘했다고 칭찬을 받을 것이고 엄마가 나를 자랑스럽게 여기리라는 해소되지 못한 유아적 욕구가 있다는 것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

 

나는 분노와 타이름을 반복하고 있었다.

생채기가 났을 때 그 아픔을 느끼는 강도는 사람마다 모두 다르지만 결국 아프던 곳에 피가 멈추고 딱지가 나서 곧 낫게 되는 상황은 누구에게나 똑같이 온다고 일기장에 썼다.

그리고 이런 점잖은 이론을 남편이 내게 분노를 불러일으키는 순간에도 꼭 기억하게 되기를 바란다고 소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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