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혼 후 이야기 #. 3
이혼신고를 마쳤다.
아이들 기본증명서를 발급해서 확인하였다. 선명하게 친권과 양육권자가 내 이름 석자로 지정되어 있었다.
내 눈으로 확인하기 전까지는 안심할 수도, 믿을 수도 없었다.
그렇게 나는 한부모 가정의 가장이자, 남들이 볼 땐 이혼녀이자, 전남편의 '예전 아내'가 되었다.
남들에게 뭐라고 불려지든 보이든 상관없었다.
나는 누구의 며느리도 아내도 아닌 내 이름 석자를 말할 수 있는 오로지 나 자신이었다.
여전히 엄마 딸이었고 계속해서 내 아이들의 엄마였다.
아이들은 엄마 아빠가 법적으로 남이 된 줄은 모르고 있었다.
아이들에게 적당한 기회를 봐서(조금 더 자라면) 말해줘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전남편에게서 아이들을 빼앗을 목적이 아니었다.
오히려 아이들이 아무 제약 없이 아빠를 편하게 볼 수 있게 하기 위해서라도 내가 키워야만 했다.
아이들에게 아빠와 시가 사람들에 대한 서운한 감정은 말하지 않았다.
고모 이야기, 큰아빠 큰엄마 이야기를 할 때면 같이 맞장구를 쳤다.
"맞아~ 고모가 밑반찬을 다 잘했는데 특히 멸치볶음 하나는 끝내줬지. 엄마도 그거 참 좋아했는데. 그거 밥도둑이지?"
"맞아 맞아, 큰아빠는 옛날에도 그러셨어.ㅎㅎ"
이렇게 조금만 운을 띄워줘도 아이들은 신나서 아빠 형제들 이야기를 했다.
아이들에게 지금은 성인인 친척 언니들이, 엄마가 막 결혼했을 때는 교복 입은 학생이었다고 말해주면 무척 신기해했다.
명절이면 먼저 엄마 집에 내려갔다가 명절 오후에 다시 올라와 아빠에게 데려다줬다.
아이들은 명절이 되면 외갓집과 아빠네를 반반씩 오고 가며 용돈을 풍성하게 챙겨 왔다.
몸이 힘들었다. 그렇지만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런 소소한 것으로 아이들의 상처가 아물 거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다.
하지만 가정이 파괴되면서 갖게 되는 상실감은 전남편과 나만 느껴도 충분하지 않은가.
오히려 아이들의 생채기를 어떻게 하면 더 짊어질까 늘 고민했지만 어쩔 수 없는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직장에는 굳이 말하지 않았다.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직장에서 어쩌다 가족 이야기가 나오면 예전처럼
'제 남편은요~' 대신
'애들 아빠는요~'로 호칭을 바꾸었다.
애들 아빠는 맞지만 이제 내 남편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아빠를 보기 위해서는 내가 조금 더 부지런해져야 했다.
동해바다에서 경기도까지 2주에 한 번씩 아이들을 데려다주고 데리고 나왔다.
잠시라도 더 아빠와 시간을 보내게 해 주고 싶어 금요일 퇴근길에 아이들을 태우고 출발했다.
아무리 부지런을 떨어도 가는데만 3시간 30분은 족히 걸렸다.
전남편은 집에 편히 앉아있다가 집 앞에 도착한 아이들을 맞으러 내려왔다.
치킨 배달해주는 분에게도 예의상 고맙다는 말은 할 텐데, 3시간 반을 달려와 아이들 짐을 내려주는 나에게 고맙다는 말은 없었다. 아이들을 의식해 일부러라도 밝은 표정으로 인사를 할라치면 내 눈을 피했다.
인상을 썼다.
마치 내가 보이지 않는 듯 행동했다.
내 얼굴을 보고 기분이 나빠지는 건 이해하겠지만 그 표정을 고스란히 아이들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 한심했다.
그래, 패배자니까 신경질은 날 테지.
그래서 당신이 딱 거기까지인 거야
속으로 비웃어줬다.
나보다 나이는 한참이나 많으면서 행동은 여전히 어린아이 같았다.
아이들보다 더 철이 없어 보였다.
전남편을 마주할 때마다 이혼을 선택한 내가 위로받는 느낌이었다.
홀가분했다.
"다 왔다고 아빠한테 전화해, 내려오시라고."
전남편 동네로 들어가는 골목에서 뒷좌석에 있는 아이에게 말했다.
"몇 층인지 아는데 뭐, 그냥 우리끼리 올라갈게 엄마."
아이들은 한 살 두 살 먹으면서 조금씩 알아가는 것 같았다.
엄마와 아빠가 마주하는 그 찰나의 어색함.
불편했을 것이다. 아이들의 마음이 맑은 물처럼 빤히 보이는 듯했다.
아이들을 내려주면 밤 10시였다.
가까운 찜질방에 가서 고단한 몸을 뉘었다.
퇴근하자마자 장거리를 운전해서 오느라 피곤했지만, 아빠 집에 가서 깔깔거리며 놀고 있을 아이들 생각에 흐뭇했다.
이틀 뒤에는 아이들을 데리고 다시 강원도 우리 집으로 가야 했다.
전남편의 집과 가까운 곳에 동생 부부가 살고 있었지만, 신세 지는 것도 한두 번이지 제부 보기에도 미안했다. 이혼한 처형이 와서 이틀씩이나 묵으면 얼마나 불편하겠는가.
찜질방이 편했다.
정기적으로 오니 찜질방 사장님이 내 얼굴을 알 정도였다.
아이들을 기다리면서 강원도에는 없는 할인매장에 가서 아이들 옷도 사고 가방도 샀다.
전남편이 직접 운전해서 강원도에 아이들을 보러 온 것은 여름휴가 때 딱 1번이었다. 그것도 펜션을 잡아 1박 2일을 있더니 다음날 일찍 집 앞에 내려주고 가버렸다.
집 앞에서 아빠에게 장난스럽게 손을 흔들어 보였던 아이들은 아빠 차가 멀어지고 나서 굵은 눈물을 뚝뚝 흘렸다.
작은 아이는 대놓고 내 앞에서 찔끔찔끔 울었고 큰 아이는 아무 말 없이 방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아직 초등학생이었다.
큰아이가 스스로 나올 때까지 방안을 들여다보지 않았다.
뭘 하는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기 때문이었다. 가슴에 정말이지 큰 구멍이 뻥 뚫려서 구정물이 흐르는 것 같았다.
아빠를 만나고 온 날이면 나는 부쩍 요란스러워졌다.
하이톤으로 수다를 떨었다.
아이들이 평소에 유치하다며 질색팔색을 하는 개그를 일부러 선보였다.
그리고 꼭 맛있는 것을 먹였다.
아빠와 헤어진 저녁은 울면서 잠드는 게 아니라 행복하게 배부른 느낌으로 잠들길 바랬다.
내일 아침에는 제발 기분이 한결 나아져있기를 바랬다.
아이들을 태우고 강원도로 오는 길.
고속도로가 막힐 때 자주 이용했던 양평 국도는 추억이 많다.
아이들은 차에 타기 무섭게 아빠랑 주말 동안 있었던 이야기를 했다.
신나게 종알종알거리더니 할 말을 다했는지 이내 잠들었다.
조용히 선글라스를 꺼냈다.
흐린 날에도, 눈이 왔던 날에도 아이들이 그렇게 잠들고 나면 선글라스를 꼈다.
백미러에 엄마가 충혈된 눈과 앙다문 입을 하고 운전하는 모습을 보이기 싫었다.
선글라스까지만 보이도록 백미러를 약간 올렸다.
고여서 떨어지는 눈물은 앞만 보고 있으니 닦아내지 않으면 들킬 리가 없었다.
아이들을 아빠에게 데려다 주기 위해 섬에서 육지로, 강원도에서 경기도로 수만 킬로미터를 다녔다.
다니는 곳곳마다 아이들이 잠 들고나면 눈물을 뿌리고 다녔다.
아이들은 웃는데 같이 웃다 보면 나는 마지막에 꼭 눈물이 났다.
학기 초마다 있었던 담임선생님 면담 때 이혼 가정이라 말하지 않았다.
가족 사항란에는 전남편 이름과 핸드폰에 저장된 그 사람 번호를 또박또박 적었다.
"제가 이쪽으로 직장을 옮기게 돼서요. 주말부부예요."
전학을 밥먹듯이 해서 친구들과 진득하게 사귀지도 못했을 것이고 환경도 낯설었을 텐데 아이들은 한 번도 말썽을 피우지 않았다. 학교에서 오라는 전화를 받은 적이 없었다.
나는 아무것도 해준 것이 없는데 학급 반장을 하고 상을 타 왔다.
야근을 하지 않기 위해 낮에 기를 쓰고 업무를 마쳤다.
내가 야근을 하면 아이들끼리 저녁을 먹어야 하고 엄마를 기다려야 하니 그게 싫었다.
직장 회식은 가급적 꼭 필요한 날에만 참석했다.
저녁 식탁에 둘러앉아 아이들은 차례로 반 친구 이야기, 선생님 이야기, 동네 문구점 이야기를 쏟아냈다.
공부방 선생님의 요즘 화장법과 최근 패션, 미운 친구 이야기는 너무 자주 들어서 내가 한 번도 못 봤지만 지나가다가 알아볼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도 회사에서 있었던 가벼운 에피소드를 말해 주었다. 엄마를 대신해 고약한 상사 흉을 아이들이 신나게 봐주었다.
초등학생 시선에서 나름 '방책'을 쏟아내기도 했다.
수다를 떨다 보면 저녁시간이 금방금방 흘러갔다.
이렇게 아이들과 눈을 맞추며 한 공간에서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 함께 밥을 먹을 수 있다는 것이 축복이었다.
아이들 그릇에 남은 밥풀 몇 알을 잔소리하며 내가 긁어먹을 수 있고, 아이들 덕분에 막힌 변기를 뚫어주며 같이 웃을 수 있다는 것도 내가 받은 큰 복이었다.
둘째 아이가 학교에서 '라디오 사연 보내기' 놀이를 했단다.
반 친구들이 저마다의 사연을 써서 종이비행기로 접어 날리면 선생님이 그중에 3개를 뽑아서 읽어주는 놀이였다.
3개의 사연 중 마지막 종이비행기가 신기하게 둘째 아이의 사연이었단다.
선생님은 3번째 사연이 무기명이라 누구의 것인지는 모르겠다고 하셨단다.
하지만 읽으시면서 울고 사연과 함께 적힌 신청곡 싸이의 '아버지'라는 뮤직 비디오를 보시면서도 또 우셨다고 했다.
"무슨 사연을 적었길래 선생님이 우셨어?"
"그냥... 아빠랑 같이 살고 싶은데 방법이 없겠냐고 썼어요."
최선을 다 한다고 했지만 문득문득 쏟아지는 안타까움이 늘 아이들에게 빚이 되고 있었다.
이혼했다고 아빠랑 같이 살 수 없다고 말하는 것보다 왜 함께 살 수 없는 사이가 되었는지 설명해야 하는 게 어려웠다.
학원에서 돌아온 아이가 씩씩거렸다.
짓궂은 남자아이들이 자기 필통에 콩벌레를 5마리나 넣었단다.
"에구 징그러워라. 우리 딸 엄청 화났겠네?"
아이가 말했다.
"콩벌레를 5마리나 넣어서 일단 내 기분도 나빴는데 콩벌레도 기분 엄청 나빴을 거야."
"왜?"
"왜냐하면 콩벌레는 아무 잘못도 없는데 차가운 내 필통 안에 들어가서 이리저리 뒹굴뒹굴 부딪혔을 거잖아.
콩벌레들은 정말 아무 잘못 없는데 그랬어."
아이는 친구들이 자신에게 장난친 것보다 그 장난에 희생된 콩벌레를 걱정하고 있었다.
가슴에 작은 파도가 일었다.
'그래 콩벌레는 아무 잘못도 없어. 남자아이들이 잘못한 거야. 너희들도 아무 잘못 없어. 잘못은 엄마 아빠한테 있는 거지. 미안해, 엄마가 그래서 너무 미안해, 아빠 몫까지 너무 미안해 아가.'
그렇게 2년을 또 울고 웃으며 아이들도 자라고 나도 자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