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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극배우 B씨 Sep 11. 2020

아빠. 이제는 나를 때리지 마세요

이혼 후 이야기 #. 2

아버지는 내가 12살 때 돌아가셨다.

언니 말로는 엄마가 41살 때였다고 했다.


아버지는 외아들이었고 홀어머니를 봉양하며 처자식을 키우는 농사꾼이셨다.

땅도 없어 남의 땅에서 경작하시며 죽도록 들에서 일하는 팍팍한 삶을 사셨다.


아버지는 밖에서는 참 좋은 분이셨다.

점잖으시고 말수도 없었다. 동네 사람들과 술김에라도 주먹다짐하는 일이 없고 예의도 바르셨다.

그런 아버지가 스트레스를 푸는 곳은 집이었다.



할머니에겐 대꾸 한번 못하셨지만 엄마와 우리에겐 모질었다.

술만 드시면 집에 와서 늘 되풀이하던 폭력과 훈계...

남편에게 맞아가며 사는 엄마도, 아빠에게 맞아가며 하루하루 사는 어린 우리들도 지쳐갔다.


아버지 경운기 소리만 들리면 심장이 쿵쿵거렸다.

마당에 나가서 일렬로 인사를 드리고 방에 가서 각자 숨었다.

하지만 집에 들어온 아빠 고함소리에 결국 다 불려 나갔다.


너무나 어려서 매를 맞아도 돌아서면 헤헤거리던 내가 그날도 아빠한테 혼이 났다.

잘은 모르겠지만 우리를 혼내고는 늘 엄마한테 화풀이를 하셨던 것 같다.


캄캄한 밤이었는데 아빠의 고함소리가 들리고 엄마가 갑자기 보이지 않았다.

겁이 나서 마당에 나가 엄마를 찾았다.

짚단이 쌓여있는 빈 외양간에 갔다.

설마 여기에 계실까.

그런데 엄마가 소처럼 짚단 위에 누워계셨다.


"엄마 여기서 뭐해?"

캄캄해서 보이지 않았지만 생각해보면 엄마는 그때 울고 있었던 것 같다.

엄마는 겨우 삼 심대 중반 젊은 새댁이었다.


외양간에는 소가 자는 곳이지만 엄마에겐 오히려 그곳이 더 편하실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아빠도 못 찾고 아무도 생각 못하는 장소니까.


엄마를 찾는 아빠에게 거짓말을 했다.

모르겠다고.

아마 이웃에 가신 것 같다고.






하루는 아랫방에서 잠들었다가 할머니방에 가서 자라는 아빠 말에 선잠이 깬 나는 눈치 없이 울다가 뺨을 정신없이 맞았다.

엄마가 달려왔고 나를 광으로 데리고 갔다.

더 맞지 않게 하려고 자릴 피했던 것 같다.


문틈 사이로 희미하게 들어오는 불빛에 한쪽 눈을 바짝 갖다 대고 아빠의 동태를 살피며 엄마가 나지막이 말했다.

"니는 평생 맞고 살래? 그냥 니랑 내랑 오늘 죽으까."

겁을 주셨던 것 같지만

어린 마음에 진심인 것 같았다.


덜컥 겁이 났다.

내가 지금 죽는다고?

엄마 속 썩이고 이렇게 자꾸 맞을 짓을 하면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얼마나 힘들면 죽자고 물어보실까.


나 때문에 엄마가 아빠한테 맞거나 잔소리를 듣게 하면 정말로 나도 죽고 엄마도 죽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엄습했다.

맞아도 도망가지 않았다.

도망가면 애 잡아 오라고 엄마가 또 아빠한테 혼날 것 같았다.


어떤 날은 종아리 살이 터져서 피가 날 때까지 회초리로 맞았다.

엄마가 '애를 죽일 셈이냐, '고 소리 지르며 방으로 뛰어들어왔다.


인두에 덴 듯 불같은 회초리의 통증에 종아리를 배배 꼬며 서 있는 나에게

"너는 등신같이 피가 날 때까지 맞고 있냐!"

엄마가 등짝을 때리며 밖으로 밀쳤다.

그렇게 매질로부터 나를 분리시켜줬다.


장화발로 배를 걷어차서 수돗가에 나동그라진 적이 있었다. 일어서라고 해서 일어섰다.

또 발길질을 했다.

작은 몸뚱이가 수돗가 양은 대야에 처박혔다.

일어서라고 아빠가 또 말했다.

일어섰다.

또 장화발이 배로 날아왔다.


8살 때 학교서 돌아오니 수업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벌써 왔다고 아빠가 뺨을 수차례 때렸다.

엄마가 마침 없었다.


한대 두대 세대... 맞다 보니 끈적끈적한 코피가 터졌다.

아빠가 흰 수건으로 코를 닦아줬다.

그 덕분에 맞는 게 비교적 빨리 끝났다.


아빠에게 맞았던 장면은 흑백인데, 하얀 수건에 새빨간 피가 얼룩져 있던 장면만 선명한 색감으로 기억되었다.


방에서 TV를 보고 있었는데 낮술을 드신 아빠가 집에 와서 내 뒷덜미를 잡아 마당으로 던졌다.

발목이 코끼리 다리처럼 부어올랐다.


엄마가 울면서 나를 둘러업고 의술을 약간 아신다는 동네 할아버지에게 데리고 갔다.

발목에 금이 가서 그렇게 부어오른 건데 뼈를 맞춘다며 부은 발목을 이리저리 잡고 돌렸다.



기절했다가 눈을 뜨니 읍내 병원이었다.


석고 깁스를 왼쪽 다리 전체에 했다.

아이를 던져서 다쳤다는 걸 들었는지

의사는 '한 달은 이렇게 고정해야 한다.'라고 아빠를 노려보며 말했다.


집에 와서 아빠가 고무통에 뜨거운 물을 붓더니 발을 담그라고 했다.

돌팔이 의사 놈이라며 한 달씩이나 있을 필요가 없다고 했다.


석고붕대에 물을 발라 깁스를 했으니 뜨거운 물에 담그면 붕대가 풀어질 거라 생각하신 듯했다.

기다려도 풀어지지 않자 칼과 낫으로 붕대를 쪼개기 시작했다.

시뻘겋게 부어오른 왼쪽 다리가 드러났다.


석고 깁스를 없애버린 종아리에 이불을 괴고 여름 내내 땀띠가 나도록 누워 있었다.


아빠가 잠들고 나면 엄마가 농약 방에서 얻어온 부채로 내가 잠이 들 때까지 부채질을 해주었다.

손님이 올 때만 꺼냈던 율무차에 설탕을 더 타서 몰래 주셨다.


언니, 동생들을 제치고 나만 누리는 호사에

다친 것이 썩 기분이 좋았다.



선선한 가을이 올 즈음 우산을 지팡이 삼아 마당에서 걸음 연습을 했다.

엄마가 부엌문 뒤에 서서 절룩절룩 걷는 나를 보며 울고 계셨다.

여름인데 두꺼운 고동색 겨울 치마를 입고 계셨다.


씩 웃어 보였다.


이렇게 빨리 걸으면 엄마랑 같이 죽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열심히 연습하면, 열심히 살면, 아픈 티를 내지 않으면 엄마가 나에게 죽자고 하지 않을 것 같았다.




아빠에게 큰언니가 가장 많이 맞았다.

기억하는 장면은, 굉장히 두꺼운 책을 돌돌 말아 언니 입에 집어넣으려고 하는 아빠와 그것을 뿌리치려는 큰언니의 비명을 옆에서 듣고 있는 나의 모습이었다.


언니는 고등학생이 되면서부터는 아빠가 매를 들려고 하면 아예 집을 나가버렸다. 친구 집에 있다가 아빠가 잠들면 다시 들어왔다.


아빠의 폭력에 꾸준히 노출되었던 큰언니는 결혼하고 나서 정신분열증이 나타났다.

남자, 아빠라는 존재에 대한 증오가 형부에게 향했던 듯했다.


둘째를 낳은 지 백일도 되지 않아 증세가 심해졌고, 이혼을 당해서 혼자 살게 되었다.



갑자기 엄마에게 전화가 왔다.

"어쩌면 좋나... 지금 좀 내려오면 안 되나."

3시간을 달려 고향에 갔다.


정신분열증이 심해진 언니는 슈퍼에 가서 물건을 그냥 가지고 나오고 붕어빵을 계산도 하지 않고 먹었다가 신고가 들어왔다. 사회복지사는 언니를 병원에 보내지 않으면 증세가 심해질 것이라고 했다.


정신병원에 가서 언니의 입원을 결정했다. 엄마는 상담하는 동안에도 듣지 못하시고 멍하니 계셨다.

의사는 구급차와 사람을 보내주겠다고 했다. 병원 가자고 하면 순순히 오지 않을 거라고 했다.


구급차에 건강한 아저씨 두 명과 언니를 데리러 갔다.

"강제로 데려가지 말고, 제가 언니를 설득해볼게요. 시간 좀 주세요."


언니가 살고 있는 허름한 월세집 마당에 들어섰다.

"언니야."

방문이 활짝 열렸다. 내가 결혼하고는 자주 만나지 못했던 언니였다.

"네가 웬일이고?"


정신 분열증이라던 언니는 나한테 만큼은 멀쩡해 보였지만 곧 정상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언니야. 병원 가자. 병원 가면... 밥도 따뜻한 거 먹을 수 있고 이렇게 추운데 말고 뜨거운 물 나오는 데서 머리 감을 수도 있어."


완강히 싫다고 했다.

시간을 더 끌면 위험할 수도 있다고 담 밖에서 지켜보던 아저씨들이 들이닥쳐 언니를 포박해 데리고 나갔다.


컴컴한 마당에 서서 언니가 끌려가는 것을 고스란히 보았다.


추웠던 11월 밤, 뺨이 얼얼해지도록 눈물이 얼굴 전체에 흘렀다. 엄마가 들을까 봐 소리를 내서 울 수가 없었다.

엄마는 처음부터 다리가 떨려 서 있을 수가 없다며 차에 남아계셨다.


언니가 끌려나가고 없는 에 들어가 보았다.

얼음장처럼 차가운 방바닥,

언제 밥을 해 먹었는지 모를 밥솥,

그리고 넘기다 만 성경책이 한쪽에 있었다.

그 옆에 작은 꾸러미가 있었다.


아이 젖병이었다.

다른 것은 먼지가 뽀얗게 내려앉고 거미줄이 붙어 있는데 젖병은 방금 쓴 것처럼 말끔했다.

이혼하면서 젖먹이 딸과 이제 막 귀여운 짓을 하는 아들을 빼앗기고 나온 언니였다.


"언니 잘 타고 갔어 엄마. 내가 설득했더니 응 알았다고 하더라. 괜히 무섭게 인상 쓰는 아저씨들 데리고 왔잖아. 병원에 가서 만나자."

엄마도 이미 아는 것을 나 혼자 거짓말하고 있었다.


구급차를 뒤따라 병원에 갔다.

언니는 강제 입원되었고 충격을 받은 엄마 대신 내가 보호자 서명을 하고 주의사항을 듣고 병원비에 관한 설명을 들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엄마. 큰언니 아픈 건 어쩔 수 없잖아. 이제 따뜻한 병원에서 약도 먹고 하면 금방 좋아질 거야."

엄마를 고향집에 내려드리고 다시 고속도로를 올라탔다.

그래도 내가 있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집에 와서 어렵게 남편에게 말했다.

언니가 잘 사는 줄 알았는데 정신분열증이 왔고 이혼을 당했고 혼자 살다가 병이 심해져 입원시키고 오는 길이라고.


좋은 일이 아니니 시어머니나 누나들한테는 말하지 말아 달라고. 그냥 언니는 고향에서 결혼하고 잘 살고 있다고. 귀여운 조카들도 잘 크고 있다고 말하자고.




그 후 일 년.


폭력에 대한 힘든 기억이 있는 나에게

전남편은 마치 결혼생활의 클라이맥스를 찍듯

아빠처럼 주먹을 휘둘렀고


남편의 폭행으로 경찰서에 다녀온 그날 새벽,

시어머니는 어둠 속에서 나지막이 말했다.


"내 아들 경찰서에 처넣고 그래 너는 기분이 좋으냐?

너 친정언니도 애들 다 뺏기고 이혼당해서 혼자 산다며? 너 친정 어매도 참 불쌍한 양반이다. 너까지 그 짝이 나게 생겼으니 참 불쌍한 양반이야."


남편 외엔 아무도 모르길 바랬던 가슴 아픈 비밀이

시어머니 입에서 술술 나오고 있었다.



사실은 이혼을 하고 싶다고

나도 살고 싶다고

그만 하고 싶다고 

그날 엄마에게 말할 수가 없었다.


거지 같은 이 환경에서도

엄마가 받을 충격이 보여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 옛날처럼 죽자고 할까 봐

슬펐다.



말하지 못한 채 끙끙 앓던 날들이 지나고

드디어 나는 이혼에 성공했고

엄마는 지금도 "그놈의 집구석에서 잘 나왔다!"라고

정말 잘한 선택이었다고 하신다.


큰언니는 오랜 정신병원생활을 끝내고

재활센터를 거쳐 

직장을 얻고 월급을 모아

얼마 전 임대아파트로 독립해서 나왔다.


아빠.

다음생에서 내 아빠로 다시 오신다면

그때는 

때리지 말아주세요.

우리 힘들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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