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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극배우 B씨 Sep 18. 2020

싱글맘이 딸을 키울 때

이혼 후 이야기 #. 9

오랜 마음고생과 암수술 이후 몸은 급속도로 기력을 잃어갔다.

갑상선은 진작에 절제를 했었고 예전부터 좋지 않던 자궁에 간단한 레이저 치료가 들어갔다.


"보호자는 안 오셨어요?"

"네. 없어요, 그냥 제가 서명할게요."


꿈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했다. 

그 느낌이 좋았다. 아무 걱정 없이 그저 잠을 푹 잔 것은 시간들이 흘렀다.




마취가 풀릴 때 즈음 적막한 회복실에 덩그러니 누워있는 나를 보았다.

꿈꾸는 듯한 멍한 시선으로 혼자 병원을 나왔다.


다행이다.

마취에서도 깨어났고, 나는 오늘도 살아있으므로.


살아있으니 아이들의 저녁을 차려줄 수 있다는 감사함이 또 생겼다.


내가 아프면 당장 아이들을 보호해줄 사람이 없었다.




전남편은 재혼했던 여자와 또 이혼을 하는 모양이었다.

이 사람들은 애 낳고 이혼하는 게 재밌나 보다.

두 명 모두 초혼도 아니고, 전 배우자와 낳은 아이를 떼놓고 새 출발을 한 사람들이었다.


아빠를 보러 간 우리 애들에게 그 갓난쟁이를 잠시 맡겨두고 소송인지 협의인지 모르겠지만 법원을 들락거렸다고 했다.


전남편은 내가 나가자마자 시어머니를 형님네 모셔다 놓았으니 자유롭게 연애를 했을 것이다.

재혼해도 이미 어머니는 요양병원에 계셨으니 여자는 시어머니를 모시고 살 필요도 없었다.


교회를 다니는 여자였던지, 처음엔 시누들이 좋아했던 것 같았다. 첫 번째 올케였던 나에게 주옥같은 훈수를 둔 결과 결국 남동생에게 이혼남이란 결과밖에 없었으니 이번엔 그저 두 사람만 싸우지 않고 행복하게 살기를 바랐을 것이다.


고모들 앞에서는 잘 보이려고 얌전하고 애교 많은 아줌마가 아빠랑 둘만 있으면 싸운다고 아이들이 말했다.


"그런 꼴을 왜 가서 보고 오니? 그 싸움이 너희들 잘못은 아닌데, 괜히 옆에 있다가 원인제공은 될 수도 있어. 엄마는 아빠 보는 거 막지는 않겠지만 거기 가서 그런 꼴 보고 오는 거 나는 싫어. 이제 그 집엔 가지 말고 아빠 보고 싶으면 밖에서 따로 만나는 게 어때?"


아빠를 밖에서 만나는 날,

차를 타고 고모네 가려고 하는데 그 여자가 전화해서 소리소리 지르며

"아기도 데려가랬잖아! 나 혼자 어떻게 보라고 그러는데? 나도 약속 있단 말이야!"

하며 아빠에게 난리를 치더라고 했다.


"에휴... 진짜 아빠는 왜 그러고 사는지 몰라. 그렇게 그 아줌마는 쫌 아니라고 말했는데 그것 봐. 우리 아빠지만 진짜 그게 뭐야."


아빠에 대해 구구절절 설명을 하고 흉을 볼 필요가 없었다.

아이들이 직접 보고 겪으면서 느끼고 있었다.


"나는 만약 아빠랑 살았으면 진작에 가출했을 거야."



그렇게 되진 말아야 했지

최악의 경우 내가 더 이상 아이들을 키울 수 없을 땐 새 가정을 꾸린 아빠네로 아이들이 갈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집에 들어가기 싫어 교복을 입고 밖에서 배회하는 사춘기 내 아이들이 상상되었다.


매일 저녁 소주를 두 병 이상 마시고, 베란다에서 담배를 피우는 아빠를 대신해 집안일이나 하고 그 갓난아이 뒤치다꺼릴 하는 아이들이 상상되었다.


끔찍했다.


영양제를 사고

잠을 줄여 출근 전 새벽에 일어나 달리기 시작했다.

별거 이후 이사를 할 때마다 동네에 뛸 곳부터 물색한 이유였다.


체력을 키워야 했고 늘 피곤한 몸이지만 일으켜야 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아프면 안 될 거였다.

내 아버지처럼 자식을 낳아 놓고 일찍 죽거나

전남편처럼 아이들을 버리지 말아야  했다.


나가기 싫고 뛰기 싫은 날이 많았다.

몸도 힘들었고 어릴 때 부러졌던 발목은 늘 고질적으로

욱신욱신 아파왔다.


그러다가 방법을 찾았다.

도착지점에서 아이들이 추위에 떨며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상상을 하기 시작했다.


날은 추웠고 바람도 부는 날이라고 상상했다.

내 손에 아이들 외투가 들려져 있다고 상상했다.


아무리 귀찮고 힘든 날이어도

덜덜 떨고 있는 내 아이들에게 외투를 빨리 입혀주기 위해서는 결승점까지 악착같이 뛸 수밖에 없었다.


움직이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에 나를 몰아넣고

하루하루 뛰었다.

주중에도 주말에도 모자를 푹 눌러쓰고 새벽이면 나갔다


아이들이 성인이 될 때까지 오로지 내 손으로 키워낼 수 있다면

그럴 수만 있다면 아무것도 힘들지 않았다.

힘들어도 잊을 수 있었다.



내가 살아가는 방식이었다.





8살 때부터 이곳저곳 전학시키며 데리고 다닌

아이가 중학생이 될 즈음

초경을 맞이했다.


병원에서 처음 딸을 품에 안았을 때

첫 남자 친구를 봐줘야지

첫 출근 때 정장을 사줘야지

미용실, 찜질방을 같이 가고

시어머니 흉을 신나게 같이 봐주고

출산 때 내가 손잡고 같이 힘줘야지


그리고

아이가 초경을 할 때는 남편에게 근사한 장미꽃 다발과 향수를 준비하라고 해야지, 내가 예쁜 속옷을 함께 골라줘야지 하며 기뻐했었다.



생리는 쉬쉬하며 감추어야 하고 귀찮거나 필요 없는 것이 아니라

건강한 여성으로서 맞이하게 되는 특별한 권리라고 축하해 주었다.

딸과 직접 속옷과 위생용품을 고르며 사용법과 뒤처리를 알려 주었다.


장롱 구석진 곳에 검은 봉지로 둘둘 말아서 숨겨야 하는 생리대가 아니라 가장 깨끗한 상자에 크기별로 예쁘게 담아 잘 보이는 곳에 놓아주었다.


딸 많은 집에서 태어나 축하는커녕

'씨잘데기 없는 가시나들이 칠칠치 못하게 흘리고 다니는 것'이라고 할머니에게 욕을 먹으며 초경을 겪고 컸기에 정말 크게 축하를 해주고 싶었다.


비록 아빠가 건네는 장미꽃과 향수는 없었지만 퇴근길에 딸이 좋아하는 예쁜 케이크와 장미꽃이 달린 목걸이를 사 왔다.

미아방지용 팔지 이후 아이의 첫 액세서리였다.



"엄마가 정말 정말 축하해."



아이가 초경을 하던 날도 눈물이 나고

브래지어를 사러 처음 갔을 때도 눈물이 났다.





중학생이 되어서 교복을 처음 사러 가던 날,


딸 웨딩드레스 맞추는 것도 아닌데

교복을 입혀보다가 혼자 울컥했다.

사이즈를 봐줘야 하는데 속없이 눈물이 줄줄 났다.



언제부터인가

지인들의 결혼식, 돌잔치에도 쉽게 가지 못했다.


남의 즐거운 잔치에 가서는

주책맞게

그렇게 눈물이 흘렀다.




손을 잡아주어야 겨우 계단을 오를 수 있었던 어린 아가들이 어느새 엄마 키를 뛰어넘고 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친구가 되어 있었다.

 "엄만 나중에 뭐가 돼있을 거야?"  응, 엄만 예쁘게 늙어있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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