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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극배우 B씨 Mar 04. 2021

보호자요? 저는 남편이 없는데요

이혼 후 이야기 #. 54





"다음번 진료 때는 수술동의서도 작성해야 하니까 꼭 보호자랑 시간 맞춰서 같이 오셔야 해요." 


간단한 치료임에도 전신마취를 통해 수술을 하게 되었다.


 고질적인 자궁 관련 질환이었다.


'네에...'

작은 목소리로 일단 대답만 했다.


더 말하고 싶었지만 관뒀다.



다음날 예약된 시간에 병원을 가니 간호사가 물었다.


"보호자 분은요?

제가 어제 보호자분이랑 같이 오셔야 한다고 말씀드렸던 것 같은데?

보호자 없으세요?

혼자 오신 거예요?" 


진료대기실 앞에서 밀려드는 환자로 바쁜 간호사가 속사포를 쏟아놓는다.


길어진 질문에 진료대기 중인 사람들이 나를 힐끗힐끗 쳐다다.


잠시 무안해졌다.


대기 의자로 돌아와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만지작거렸다.


핸드폰으로 정작 할 건 없었는데 뭐라도 해야 하는 바쁜 사람처럼 만지작거렸다.






아이들의 보호자로서 허구한 날 병원을 다닐 때는 전혀 겪지 못했던 일이었다.


나는 늘 누군가의 보호자였고 엄마였고 법적 친권자였고 내 서명으로 인해 아이들이 치료받는 것에 대한 권리를 행사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내가 정작 아프니 보호자내세울 사람이 없었다.


간호사는 직업이 어쩔 수 없는 질문이었겠지만 괜한 억울함에 진료 때 의사에게 물어보았다.


"호자 없으면 수술도 못하나요, 집에 어른은 저 밖에 없는데요... 아이들은 미성년자이고요."


의사는 수술 중 혹시라도 일어날 수 있는 응급 상황에서 의료행위를 계속할 수 있도록 누군가가 결정을 해줘야 한다고 했다.


혹시 친구나 직장동료도 없냐고 물었다.


친구...

친구를 만들면 언젠가는 속이야기를 하게 될 것이니 나는 엄마가 되고 나서는 친구라고 할만한 사람을 사귀지 못했다.


별거와 이혼을 겪으면서는 매일의 감정 다스리기에 급급해  친구도 사치였다.


2, 3년마다 아이들을 안고 이사를 하면서 낯선 동네를 내비게이션 없이 다닐 수 있도록 길을 익히는데만 집중했지, 직장 집만 오고 가는 상황에서 친구가 있을 리 만무했다.


아무나 붙잡고 잠시 보호자 서명만 해달라고 하고 싶었지만 남자들뿐인 직장에내가 갖고 있는 부인과 질환을 설명하며 보호자로 서명 좀 해달라고 할 수는 없었다.


부탁하는 걸 어려워하는 내 성격도 한몫했을 것이다.




병원이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일단 수술동의서에 저 멀리 있는 친언니의 연락처를 적는 것으로 수술을 진행하기로 했다.


"서맥도 있고... 혈액검사 결과도 좀 아리송하네요, 수술 전 검사가 개운하게 나와야 하는데, 일단 두 곳은 다시 가서 진료 좀 받고 오세요. 해당과에서 괜찮다는 사인이 떨어지면 그대로 수술 진행합시다." 




일찍 끝날 줄 알았던 병원 진료가 길어지고 있었다.

잠깐이면 된다고 사무실에 말해놓고 온 터라 마음이 급해졌다.


소견서를 보냈다는 해당 진료과로 뛰다시피 내려갔다.


이름이 불리기를 기다리며 의자에 한참을 앉아있었다.



엄마가 데리고 어린아이

할아버지가 부축하고 온 할머니

몸이 불편한 아내를 의자에 앉혀놓고 이리저리 서류를 떼는 아저씨 모습이 보였다.


사람들은 다 '보호자'가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내가 살아있는 한 아이들은 혼자 병원 올 일은 없겠다 싶은 안도감이 새삼스레 들었다.


너무 당연한 것임에도 내가 자랑스럽다는 생각이 불쑥 들었다.



하지만

나만 이 자리에 보호자 없이 덩그러니 앉아있고 내 주위의 모든 사람들은 누구의 보호자, 가족으로서 다들 분주했다.


괜찮은 척 잊어버리려고 했던 조금 전의 일들이 다시 명치끝에 불쑥 올라왔다.



보호자 없어요?


그렇게 사람 많은 데서 보호자가 왜 없냐고 톤을 높여 물어보는 간호사라니...



나는 자존심이 상했던 것일까.

아니면 창피했던 것일까.



괜찮은 척 초점 없이 앞만 보고 있던 눈에 눈물이 울컥 올라왔다.


'보호자가 왜 필요한데! 내가 내 보호자인데. 아무 보호자가 없어도 나 잘 지냈는데...'


적당히 올라오다 말겠지 했던 물이 흘러나와 콧잔등에 걸쳐진 마스크를 적시려고 했다.


데스크 앞에 있던 휴지를 두장 급하게 뽑아서 병원 기둥 뒤로 갔다.


별것 아닌 혼잣말에 눈물이 터졌다.


 


로비 가운데 있는 기둥이라 뒤에 숨어 울어도 뒷사람들은 볼 것 같았다.


사람 많은 로비에서 눈물을 흘리는 것이 창피했지만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

맞아요. 

저 남편도, 보호자도 없는데요.


그치만 지금까지 잘 살았고요.

저 멀리 육지에 있어서 그렇지, 나도 보호자 있거든요?


우리 엄마도 우리 언니도 저 아프다 하면 바로 뛰어와줄 건데요?


하지만 이 동네에서는 내 아이 두 명 말곤 아는 사람 없어요. 직장에는 말 못 해요.


사실 엄마한테도 보호자로 와 달라고 말 못 해요.


하기 싫어요.

그럼 엄마가 나보다 더 아프실 건데요.


한다고 이렇게 정 붙일 곳 없이 애들 부둥켜안고 떠돌며 사냐고 눈물 달린 두 눈으로 물어보실게 뻔한데요.



그래도

그래도

보호자는 있거든요?




빨개진 두 눈을 

눈물에 눅눅해져 떡이 된 휴지로 꾹꾹 누르며

 

애꿎은 대리석 기둥을 

한참이나 째려보고 서 있었다.




서럽지 않다.

서럽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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