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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iel Bleu Jan 15. 2023

47. 속임수도 이 정도면

트롱프뢰유(trompe l’oeil)

영국의 한 저택을 관람하던 중 '저 바이올린은 그림입니다.'라는 가이드의 설명에 '저게 그림이라고?' 반신반의하며 다시 돌아보았던 기억이 있다.

그런데 정말 그림이었다.

마치 바이올린이 문에 걸려 있는 거 같은 너무나 사실적인 그림.

무심코 지나쳤다면 몰라봤을 걸작이었다.

영국의 가장 부유한 귀족집안 캐번디시(Cavendish) 가문의 저택인 챗스워스하우스(Chatsworth House)에서 본 유명한 바이올린 이야기다.

'Violin Door', 1723, Jan Van der Vaart, 챗스워스 하우스

나는 또 한 번 속임수에 걸릴 수밖에 없었는데 이번엔 로마 한 복판이다.  

'빌라 파르네시나(Villa Farnesina)' 이야기다.

(https://brunch.co.kr/@cielbleu/244 참조)


벽면 전체가 그림이다.

16세기 시에나 출신 화가 페루찌 작품으로 너무나 사실 같아 그림이라고는 믿기 어려운 작품이다.

'전망 있는 방', 1519, 페루찌(Baldassare Peruzzi) 작, Villa Farnesina, Rome

기분 나쁘지 않은 속임수, 오히려 감탄을 금치 못하게 하는 예술가들의 솜씨다.

이런 기법을 프랑스어로 '트롱프뢰유(Trompe-l'œil)'라고 한다.

'트롱'은 속임수, '뢰유'는 눈이니 간단히 눈 속임이다. 좀 근사하게 착시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이 기법에 얽힌 이야기는 동서양 어디서든 만날 수 있다.

우리에게는 신라시대 화가 솔거의 일화가 있다.

경주 황룡사 벽에 그린 소나무가 너무도 실물 같아 새들이 날아들다 부딪혀 죽었다는 일화가 삼국사기에 전해 지는 그 천재 화가말이다.


그런가 하면 고대 그리스에도 이와 비슷한 유명한 일화가 전해진다.

파라시오스(Parrhasius)와 제욱시스(Zeuxis) 두 화가의 이야기다.

당대 거장이었던 두 사람이 서로 실력자랑을 하였다고 한다.

제욱시스가 포도를 그렸는데 새들이 진짜 포도인 줄 알고 몰려들었다고.

이야기를 들은 파라시오스는 자신의 그림을 보여 줄 테니 화실로 가자고 제욱시스를 초대했다고 한다.

화실에 들어선 제욱시스는 드리워진 커튼을 걷고 그림을 보자고 말했다.

이 말을 들은 파라시오스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는...

커튼이 그림의 일부였던 것이다.

일화의 두 그림을 재현한 그림들---Antonio Leonclli,1500(좌)/Adriaen van der Spelt,1658(우)

'트롱프뢰유' 기법은 기원전 7세기부터 회화에 등장한 기법이지만 '트롱프뢰유'란 이름은 프랑스 화가 루이 레오폴드 보일리(Louis-Léopold Boilly:1761-1845)가 1800년 파리 살롱에 전시한 자신의 그림 제목으로 이 문구를 사용한 것이 최초라고 한다.

그 후 비평가들의 비난에도 불구하고 회화의 한 장르 이름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보일리가 1800년 살롱에 전시한 작품과 유사한 트롱프뢰유 작품, 1804-1807, Louvre

대상을 3차원 입체로 보이도록 묘사하는 회화기법은 전문 화가들 사이에서는 그다지 각광을 받지 못했다고 한다.

감상하는 일반인들은 화가들의 실물보다 더 실물 같은 그림에 놀라기도 하고 많은 찬사를 보냈는데 그에 반해 비평가들은 전문성이 결여된 기술에 불과하다고 인정하지 않았다.  

예술가의 차원 하고는 다른 숙달된 장인의 솜씨로 여겼던 것이다.

사진의 발달로 더더욱 트롱프뢰유 같은 기법은 발 붙일 곳이 없을 듯했다. 

Samuel van Hoogstraten, Dutch,1666(프레임도그림이다)

그런 와중에 다행히도 프랑스에서는 '페인트 데코레이터'라는 직종에 그 기법이 남아 그대로 전수되어 왔다.

나무나 대리석 등을 그대로 묘사해 내는 그들의 솜씨는 장인(artisan)을 넘어 예술가(artist)로 불려도 과함이 없을 정도다.

큐비즘에 영향을 준 조르쥬 브라크(Georges Braque:1882-1963)는 할아버지대부터 대대로 이 직종에 종사했는데 나무나 대리석을 그림으로 묘사하는 방법에 탁월했던 브라크는 이 기법을 피카소에  전수하기도 했다.

대리석과 나무 모두 그림이다.

눈을 속이는 트롱프뢰유나 인지 기능을 속이는 큐비즘의 기법이 일종의 속임수라는 면에서는 통하는 면이 있다고 해석하는 전시회가  뉴욕 메트로폴리탄 뮤지엄(23.1.22까지)에서 열리고 있다.

재미있게도 전시회는 고대 그리스의 두 대가의 이야기로 시작하고 있었다.

전시장 입구
두 대가의 이야기를 담은 글. 왼편 위 트롱프뢰유 기법이 재미있다.

이 전시회는 트롱프뢰유 전통 기법을 사용한 큐비즘에 대한 해석으로 그림을 관람하는 재미를 더하고 있었다.

조르쥬 브라크, 후안 그리스(Juan Gris:1887-1927), 피카소(1881-1973)의 그림을 비롯 여러 트롱프뢰유 작품과 큐비즘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는데 연관성이 없을 것 같은 두 기법을 비교 전시한 독특한 전시회였다.


큐비스트들이 사용하는 여러 기법들, 즉 현실 세계를 그림 속에 삽입한다던가 부호화된 인쇄 매체로 신문이나 편지, 악보등을 그려 넣는 기법등은 이미 트롱프뢰유에서 수세기 동안 사용해 오던 것들이다.

큐비즘을 대표하는 화가들은 트롱프뢰유 기법을 패러디하고 관람객들을 속이는 새로운 기법을 고안해 냈다는 설명이다.

같은 주제를 다룬 작품을 한 공간에 배치하여 큐비즘이 트롱프뢰유를 어떻게 적용했는지를 생각해 볼 수 있게 했다.

William Michael Harnett,1888(좌), Cornelius Norbertus Gijsbrechts,1672(중앙), Pablo Picasso,1912(우)

그런가 하면 같은 주제를 시대적 환경 변화에 따라 얼마나 다르게 표현할 수 있는지도 보여준다.

한때는 왼편 그림과 같이 풍요로움을 추구하는 시절이 있었지만 1차 대전을 끝낸 피카소의 눈에는 더 이상 이런 화려함은 그려낼 수 없었다. 왼편그림을 패러디한 피카소의 그림이 매우 흥미롭다.

'바이올린과 꽃이 있는 정물화', 1657, J.S. Bernard (좌)/'병과 잔이 있는 정물화',1914, 피카소(우)

많은 작품들 속에서 가장 눈에 띄었던 브라크의 작품이다.

'장인(artisan)'과 '예술가(artist)'의 구별을 파괴하고자 하는 브라크의 작품인데 그림 하단에 그려진 이름표는 주로 장인들이 자신들의 작품에 그려 넣던 기법인데 큐비즘을 이끌던 브라크는 자신의 그림에 이름표를 그려 넣어 장인과 예술가의 구별을 파괴해 버렸다는 설명이다.

'바이올린', 1914, 조지 브라크, 개인소장

후안 그리스의 다음 작품은 단순히 기타만 그려 넣은 것이 아니라 자연적으로 맞지 않는 그림자를 그려 넣는가 하면 당시 아방 가르드를 지향하던 시대상도 그려넣음으로 현실 세계를 화폭에 넣은 것이라는 설명이다.

'기타가 있는 정물화', 1913, 후안 그리스, 메트로폴리탄 뮤지엄 뉴욕


전시회는 마지막으로 피카소의 말을 전하면서 끝났다.

'예술은 진실이 아니다.

예술은 진실을 깨닫게 해주는 거짓이다.

예술가는 자신의 거짓말의 진실성을 다른 사람들에게 납득시켜야 한다.'라는.

오른편 하단의 트롱프뢰유가 다시 눈길을 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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