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Wall Street'하면 아는 이들은 다 안다는 'JP 모건(Morgan) 빌딩'이다.
미국 경제의 상징과도 같은 '뉴욕 증권거래소( New York Stock Exchange)'와 마주 보고 당당하게 서 있는 빌딩의 모습에서 19세기말, 20세기 초 미국과 세계 경제를 쥐락펴락했던 'JP 모건'의 힘이 느껴진다.
1914년 당시 뉴욕의 가장 핵심 부지에 세워진 이 건물은 현재 세계 최대 은행 'JP Morgan Chase & Co'의 전신인 'JP Morgan & Co'의 본부였다.
'23 Wall ST' 빌딩(중앙), 오른편이 뉴욕 증권 거래소 빌딩이다.(위키미디어)
'JP 모건'.
지금도 '금융'하면 여전히 막강한 세계적 그룹이다.
아버지 주니어스 스펜서 모건(Junius Spencer Morgan: 1813~1890)에서 시작하여 존 피어폰트 모건(John Pierpont Morgan: 1837~1913)을 거쳐 아들 JP 모건 주니어(J.P.Morgan Junior: 1867~1943)에 이르기까지 3대에 걸쳐 이루어진 금융그룹이다.
주니어스 모건(좌), JP 모건(중앙), JP 모건 주니어(우)
JP 모건은 1890년 아버지 주니어스 모건이 영국에서 기반을 닦은 은행을 이어받아 미국과 유럽에서 영향력이 가장 큰 은행으로 키웠으며 미국이 세계 최강국으로 발돋움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한 인물이다.
1913년 그가 세상을 뜨자 아들 JP 모건 주니어는 1, 2차 세계대전과 대공황이라는 어려운 여건 아래서도 JP 모건을 지켜냈지만 대공황 이후 미국의 모든 은행과 기업을 배후에서 조정하는 회사로 여론의 집중 공격을 받으면서 1933년 집권한 루스벨트 대통령이 은행을 규제하기 시작하는 법안인 'Glass–Steagall Act'를 시행하자 JP 모건은 은행(Commercial Banking)과 증권 업무(Investment Banking) 중 하나를 선택해야만 하는 기로에 놓이게 되었다.
JP 모건은 은행을 선택했고 증권 관련일을 하던 직원들이 JP 모건을 떠나게 되자 손주인 헨리 모건(Henry S. Morgan)과 해롤드 스탠리(Harold Stanley)가 1945년 증권 회사인 'Morgan Stanley'를 만들게 된다.
그들의 금융 역사는 대충 이렇다.
1차 대전 이후 JP 모건 주니어는 교황 비오 11세의 의뢰로 바티칸의 재정관리를 맡아 교황청의 재산을 늘려준 공로로 성 그레고리 대십자훈장을 받는다.
이쯤에서 금융업과 교황청이라 하니 문뜩 연상되는 집안이 하나 있다.
르네상스의 황금기를 연 피렌체의 메디치 가문이다.
너무 멀리 갔나 싶으나 그런 거 만은 아닌 듯싶다.
JP 모건이 1913년 76세의 나이로 로마에서 사망한 후 그가 후원하고 소장하던 7000여 점에 이르는 막대한 양의 미술품들은 모두 미국 뉴욕 메트로폴리탄 뮤지엄에 기증되었다.
예술품을 후원하고 기증한다?
여기서도 메디치가 연상되는 것은 우연은 아닐 듯싶다.
뉴욕 메트로폴리탄 뮤지엄 전경
금융업으로 막대한 부를 축적한 재벌이 교황청의 재정을 늘리는데 기여하고 예술에도 눈을 돌려 막대한 수집과 후원으로 세계적인 미술관을 지원하고 뉴욕의 가장 비싼 지역에 자신의 전용 서재와 도서관을 세운 모건 가의 행보는 르네상스의 중심에 있던 메디치가의 행보와 많이 겹치는 듯하다.
뉴욕에 있는 JP 모건의 개인 서재 겸 도서관을 둘러보면 이런 생각에 더욱 확신을 갖게 한다.
20세기 초, JP 모건은 뉴욕 맨해튼의 매디슨 애비뉴(Madison Ave.)와 36번가와 37번가 (36th & 37th) 사이 머레이 힐(Murray Hill) 근처에 그의 특별한 개인 서재 겸 도서관을 지었다.
현재의 'Morgan Library & Museum'이다.
뉴욕 36th St. 의 네오클래식 양식의 본관 입구(위키미디어)
1902년에서 1906년 사이에 당시 시세로 120만 달러를 들여 지은 네오클래식 스타일의 건물은 당시 각종 매스컴에서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월스트리트저널(Wall Street Journal)은 도서관이 완공된 후 "유럽이나 미국의 다른 어떤 건물도 이렇게 사려 깊게 세워진 적은 없다"라고 보도했다.
빌라 메디치, 로마, 1576년(좌), 뉴욕 공립 도서관 입구의 사자상(우)
당시 미국식 르네상스를 추구하던 'McKim, Mead & White'사가 건설하여 'McKim 빌딩'이라고도 불리는 본관 건물은 많은 영감을 16세기에 건축된 로마의 빌라 메디치(Villa Medici)에서 받았다고 한다.
모건 라이브러리의 본관 입구의 아치와 입구 양 옆의 사자상등을 보면 빌라 메디치와 유사한 점이 많음을 알 수 있다.
모건 라이브러리의 핵심인 본관에 위치한 JP 모건의 서재(Pierpont Morgan's Study)에는 JP 모건과 아들 JP 모건 주니어의 초상화가 시에나 출신의 로마 귀족 가문인 키지(Chigi) 가문의 문장이 들어간 벽지와 진귀한 소장품들로 장식된 방에 걸려있다.
키지 가문의 문장이 장식된 벽지(좌)와 키지 가문의 문장(우)
키지 가문도 역시 은행 관련일과 교황청의 재정 담당관으로 어마어마한 부를 쌓은 집안이다. 키지 가문의 문장이 갖는 모토는 '정상에서 빛나리'라고 한다.
로마에는 라파엘로를 비롯 세바스티아노 델 피옴보, 일 소도마 등 당대의 거장들을 동원하여 만든 키지 가문의 아름다운 저택 파르네시나(Farnesina:https://brunch.co.kr/@cielbleu/244 참고)가 남아 있어 당대를 호령했던 가문의 권세를 짐작할 수 있다.
로마 키지 가문의 저택 파르네시나의 화려한 내부 벽화
그런가 하면 서재의 가구는 메디치 가문 스타일을 모델로 디자인했으니 미국식 르네상스를 구상했던 모건에게 어울릴 만한 서재를 만든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Historic Library'로 명명된 방에 들어서면 과연 'JP 모건답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이것이 개인의 서재 겸 도서관이라니 화려하고 웅장한 광경에 그가 얼마나 한 시대를 풍미했는지 새삼 느낄 수 있는 방이다.
모건 라이브러리의 하이라이트 'Historic Library'
또한 이 건물에는 필요한 경우 건물의 창문을 봉쇄할 수 있는 석면 셔터와귀중한 원고를 보관하는 강철 금고도 설치되어 있다.
소장품들의 면모를 보면 당연하단 생각이 든다.
강철 금고가 설치된 서고 입구
서재를 나오면 원형 홀(Rotonda)이 있다.
천장은 라파엘로에게서 영감을 받아 제작된벽화와 스투코(Stucco)로 장식되어 있고 홀의 바닥은 바티칸의 빌라 피아(Villa Pia) 바닥을 본떠 만든 다양한 색상의 대리석으로 장식되어 있다.
모건 라이브러리의 로톤다 벽화와 대리석 바닥(좌), 스투코 장식(우)
바티칸의 빌라 피아(위키미디어)
서재 겸 도서관으로 만든 이 건물은 1906년 JP 모건이 10여 년 동안 후원해 온 메트로폴리탄 뮤지엄 위원회의 리셉션을 시작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JP 모건의 유언대로 1924년 이 도서관은 공공건물로 등록했지만 처음에는 한 번에 10명의 학자만이 입장할 수 있었다고 한다.
공공건물로 등록은 하고 일반 대중에게 공개하지 않자 뉴욕시에서는 공공건물에 주는 면세 혜택을 줄 수 없다고 하자 1942년에 일반 대중에게 공개하게 된다.
1932년에는 50명의 미국 건축가를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 11명이 모건 도서관을 미국 최고의 건물로 평가했다고 한다.
1965년에 와서는 최초의 뉴욕시 랜드마크 건물로 지정되었고 현재는 국가 역사 랜드마크(National Historic Landmark)로 등록되어 있는 대단한 건물이다.
2006년에는 파리의 퐁피두 센터를 지은 이탈리아 건축가 '렌조 피아노(Renzo Piano)'가 참여하여 디자인한 강철과 유리로 된 4층짜리 건물이 추가로 만들어졌는데 이 건물은 현재 모건 라이브러리의 출입구로 사용되고 있다.
2006년 렌조 피아노가 지은 유리관 입구
모건 라이브러리 안의 'Gilbert Court'
네오클래식 양식의 본관에 추가된 현대식 유리 강철 빌딩은 묘한 조화를 이루며 이곳을 찾는 이들을 맞이한다.
마치 과거의 모건 가문의 힘이 현재도 변함없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하는 것 같다.
개인의 서재 겸 도서실로 시작된 모건 라이브러리의 35만 점 이상의 소장품을 보면 그의 취향과 재력을 다시 한번 생각게 된다.
이곳에는 원고, 인쇄 서적 및 인쇄물 컬렉션과 대가들의 그림들이 소장되어 있다.
JP 모건은 대가들의 그림은 다른 박물관에서도 소장하고 있으니 자신은 좀 더 특이한 것을 수집할 것이라 했다고 한다.
1908년 런던 타임스는 JP모건은 "아마도 지금까지 살았던 가장 훌륭하고 아름답고 희귀한 물건의 수집가"일 거라고 평하기도 했다.
컬렉션 중에는 6세기부터 16세기까지의 '채식필사본(illuminated manuscript)' 컬렉션이 눈길을 끈다.
1000개 이상의 필사본 중에는 'Morgan Bible'이라 불리는 그림으로 된 중세 성경책(총 48장이 만들어졌는데 그중 43개를 모건 라이브러리가 소장하고 있다), 'Morgan Beatus'로 부르는 8세기 스페인 수도사 베아투스(Beatus)가 쓴 묵시록을 10세기경 화가인 매기우스(Magius)가 미니어처로 채색한 원고가 있다.
채식화의 대가인 쥴리오 클로비오(Giulio Clovio)가 파르네세 추기경(Cardinal Alessandro Farnese)을 위해 16세기에 만든 'Farnes Hours'도 소장되어 있다. 이 작품은 채식필사본으로서는 거의 마지막 작품으로 여겨지는 귀한 작품이라고 한다.
그런가 하면 15세기 북유럽 채식필사본의 최고 걸작으로 뽑히는 'Hours of Catherine of Cleves'가 있는데 이 필사본은 작가가 네델란드인으로 추정되는 진귀본이다.
'Hours of Catherine of Cleves', 15세기, 네덜란드
다음으로 모건의 악보 컬렉션을 보면 그 규모가 의회 도서관 다음가는 방대한 양이라고 한다.
여기에는 베토벤, 브람스, 쇼팽, 말러, 베르디의 사인과 주석이 달린 대본과 악보, 그리고 모차르트의 하프너 교향곡 D장조 등 일일이 나열할 수 없을 정도로 소장 악보가 많다.
바흐(좌)와 브람스(우)의 친필 악보
원고 컬렉션 또한 소장품의 내역을 보면 과연 개인이 어떻게 이렇게 많은 자료들을 모았는지 감탄이 나온다.
내로라하는 세계 거장들의 원고가 거의 다 모여 있는 듯 하니 말이다.
찰스 디킨스의 '크리스마스 캐롤' 원본 원고(좌), 바사리의 'Art History'(우)
스코틀랜드의 문호 월터 스콧(Walter Scott)의 대표작 '아이반호'를 포함한 그의 소설 9권의 원고, 올드 랭 사인(Auld Lang Syne)으로 유명한 스코틀랜드 출신 영국 시인 로버트 번스(Robert Burns)의 시 원본, 찰스 디킨스(Charles Dickens)의 크리스마스 캐럴( A Christmas Carol) 원고 원본, 주홍글씨( The Scarlet letter)의 저자 나다니엘 호손(Nathaniel Hawthorne)의 노트와 에드가 알렌 포(Edgar Allan Poe)의 'A Tale of the Ragged Mountains' 최종 초안이 모건 라이브러리의 소장품 목록에 이름을 올리고 있다.
프랑스의 발자크(Honoré de Balzac)의 친필 원고, 빅토르 위고(Victor Hugo), 마리 앙트와네트(Marie Antoinette), 조르주 상드(George Sand), 알렉산더 듀마(Alexandre Dumas), 토마스 모어(Thomas Moore), 에밀 졸라의 원고등 일일이 나열이 어려울 정도다.
원고가 아닌 모건 컬렉션의 다른 문서로는 구텐베르크의 성경 3권과 미국 독립 선언문의 약 24개 원본 인쇄물 중 하나와 고대 바빌로니아 시대의 편지도 있다.
이곳에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뒤러, 렘브란트, 루벤스, 게인스보로 와 같은 유럽 예술가들의 판화 및 드로잉 등의 대규모 컬렉션도 포함되어 있다.
'Kneeling lady', 1480,Hugo van der Goes(좌), 'Man with a Pink',1494,Hans Memling(우)
'St. Jerome in His study',1514, Albrecht Durer
'Martin Luther & Katharina von Bora',1525, Lucas Cranach the elder
이런 희귀본들을 보유하고 있는 모건 라이브러리에도 아쉬운 점은 있다.
JP 모건의 많은 소장품들에 비해 그의 이름을 건 컬렉션이 남아있지 않다는 것이다.
아들 모건 주니어는 아버지의 소장품을 관리하기보다는 판매하여 현금화한 덕(?)에 그의 소장품을 사들인 사람들이 오히려 그들의 이름으로 박물관에 기증하거나 뮤지엄을 만들었으니 아이러니한 결과다.
대표적인 케이스가 뉴욕의 프릭 컬렉션(Frick Collection)이다.
프릭의 대표 컬렉션으로 사랑을 받는 '프레고나르 방(Fragonard room)'도 원래 JP 모건의 소장품이었다.
Frick Collection의 'Fragonard Room'(위키미디어)
모건 라이브러리를 관람하다 보면 한 시대를 풍미한 금융재벌의 독특한 취향과 그 덕에 귀한 예술품들을 가까이서 관람할 수 있는 특별한 장소란 생각이 든다.
박물관이 아니면 보기 힘든 예술품들을 소유권을 넘어 대중과 공유하고자 하는 모습에서 JP 모건의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를 엿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