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새아빠와의 이별
새아빠는 서울 중심부에 있는 레스토랑으로 자리를 옮겼다. 거기에서도 그는 부지배인이 되었는데, 경기도에서 그랬던 것처럼 늘 까만색이나 회색의 정장을 멋지게 차려입고 출근을 했다. 그렇다곤 해도 내가 보기에 새아빠는 아직도 애 같기만 해서, 어째 나보다도 더 엄마 아빠가 필요할 것만 같았다. 주말이 되어서 집에서 하루 종일 쉴 때면 그는 음악을 들려주었다. 커다란 전축에 엄마가 대학생 때 모았다는 레코드판들을 걸면 멜로디가 좋은 음악들이 흘러나왔다. 새아빠가 외할아버지네로 들어간 뒤 마음에 들어 했던 것 중 단연코 으뜸은 담배를 자유롭게 피울 수 있는 이층 발코니였을 것이다. 물론, 집안의 황제인 외할아버지는 다리가 아파서 위층으로 자주 올라갈 수가 없었는데, 그렇다고 집안에서 피우기엔 외할머니의 잔소리가 대단했기 때문에 늘 마당 텃밭을 서성이며 담배를 태웠다.
외할아버지와 달리 관절이 아직 쌩쌩한 새아빠는 특히 주말이면 하루에도 몇 번씩 이층을 들락거리며, 아니 거의 이층에서 살다시피 하면서 발코니에 담뱃재를 쌓곤 했다. 그 발코니에는 외할머니가 애지중지 키우는 군자란이며 금귤나무, 고추나무가 줄지어 있고, 하얗고 노란 국화들도 한 무더기씩 피어 있었다. 하루는 새아빠가 여느 주말과 다름없이 발코니 한쪽에 놓인 흰 플라스틱 의자에 기대앉아서 담뱃재가 꽃에 가 닿지 않도록 세심하게 털며 담배를 피우기 시작했다. 옆에서 꽃을 만지며 놀고 있던 나는 새아빠가 담배 피우는 걸 무척 싫어했던 엄마가 생각나서 쀼루퉁해졌는데, 그걸 눈치챈 동생이 옆에서 거들었다.
“어차피 바람 때문에 담배연기가 전부 꽃한테 가요.”
새아빠는 동생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이내 울상이 되어버렸다. 이제는 옆에서 담배 피우지 말라고 잔소리할 엄마가 없는 게 슬퍼서 그러는 모양이었다. 하긴, 새아빠는 담뱃값을 달라고 조를 때 나오는 엄마의 새침한 반응이 재미있어서 더 응석을 부렸는지도 모른다. 한 번은 옆집 아저씨가 한 번은 나한테 이런 말을 한 적도 있었다.
“아이고 참, 너희 엄마한테 아빠 담뱃값 좀 드리라고 해라. 원, 그 착한 사람한테 그 몇 푼이 아까워서 안 준다니? 만날 졸라대는 거 보기도 안쓰러워서 원.”
나는 새아빠가 착한 사람이라는 말에는 동의할 수 있었지만, 엄마가 돈이 아까워서 그에게 용돈을 안 주는 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새아빠가 담배 끊는대 놓고 안 끊어서 그래요. 울 엄마가 나쁜 거 아니에요.”
나는 눈을 흘기며 톡 쏘고는 집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다음부터는 새아빠가 담배 피우는 모습이 밉살스럽기만 했고, 그래서 나도 엄마와 합세하여 금연 요구로 새아빠를 닦달하곤 했다. 결국 새아빠는 금연을 시작했고, 엄마는 기쁜 나머지 그 포상으로 포도즙이며 녹용이며 하는 보약들을 새아빠에게 선사했다. 그러나 엄마와 새아빠가 각기 자신들의 기쁨을 누린 기간은 엄마가 죽기 전 한 달 남짓에 불과했다. 결국 약 한 달의 금연을 끝으로 새아빠는 다시 하루에 한 갑 이상의 담배를 피우기 시작했지만 나는 더 이상 말리지 않았다. 적어도 담배를 피우는 그 시간 동안만큼은 엄마를 생각할 테니까. 나는 새아빠가 엄마를 잊지 않기를 바랐다.
하지만 결국 언제부턴가 새아빠가 집에 들어오는 일이 뜸해졌다. 그리고 곧 한 달이 넘게 한 번도 우리를 보러 오지 않더니, 결국 아주 사라져 버렸다. 어쩔 수 없는 일, 혹은 당연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열세 살의 나는 이미 ‘사치’라는 게 무엇인지 어렴풋하게 느끼고 있었다. 새아빠는 내게 사냥꾼 친아빠를 대신해 때맞춰 굴러들어 온 잘생긴 복덩이였지만, 나는 엄마가 죽은 이상 그 축복의 운명도 길어봤자 얼마 가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그가 우리에게 해준 일이라고는, 촌스러운 세 가지 원색으로 된 퍼즐 열쇠고리를 하나씩 선물해 준 것과, 외할아버지 재산의 절반이었던 서울 중심의 땅과 집을 팔아버리고 서울 외곽의 한 작은 아파트 20층 집을 내 명의로 사둔 것이었다. 물론 당시 새아빠가 그 땅으로 1년 만에 다섯 배 정도의 수익을 올렸다는 것은 아직도 미스터리다.
결과적으로 외할아버지는 자기 몫, 그러니까 본래 땅값의 두 배에 달하는 현금을 챙길 수 있었고, 나머지는 새아빠가 알아서 처분하도록 흔쾌히 허락했다. 결국 외할아버지는 징글징글한 두 외손녀딸들의 미래에 대한 고민을 조금은 덜 수 있게 된 셈이었다. 외할아버지는 그 이 일이 있고 난 후로 입이 마르게 새아빠의 선견지명을 칭찬하곤 했다. 어쨌든 그런 짓을 벌인 새아빠의 계산은 아마 이런 것이었을 것이다. 엄마의 사고 보험금으로 나와 내 동생이 고등학교 졸업을 하고 대학 입학을 하는 데까지는 이럭저럭 해나갈 수 있겠지만, 그 이후의 등록금이나 이른 결혼자금 같은 것들이 까마득하다는 것. 그래서 그는 내 명의로 집을 사놓고 그걸 임대해 나와 동생이 매달 월세를 받게 한 것이다. 외할머니가 대신 그 월세를 차곡차곡 저금하고, 일 년에 한두 번 보수를 해주며 우리의 미래자금 일체를 모았다.
결혼식조차 올리지 않은 엄마와 새아빠의 사랑이란 건 도대체 어떤 것이었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든다. 화기애애한 가족들이 가득한 레스토랑에서, 남편도 없이 어린 두 자매의 생일을 극진하게 챙기던 엄마의 모습이 여성으로서 더없이 매력적이었을까, 아니면, 너무나도 불쌍해 보였을까. 새아빠는 가족이 없었다. 부모님은 어릴 적에 모두 돌아가시고, 하나뿐인 형님은 사우디아라비아 터널을 뚫는 일을 하러 갔다가 사고로 죽었다고 했다. 그래서 그는 가족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것일지 모른다. 가족에 대한 목마름이, 생에 첫 가족이 된 여자의 남겨진 두 딸자식들을 못내 걱정해 그 아이들의 미래에 대한 대비까지 마쳐놓은 뒤에야 그가 겨우 떠날 수 있게 만든 것일지 모르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보다, 새아빠는 우리 엄마를 너무도 깊이 사랑하고 있었던 거라고 믿는 편이 나는 더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