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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옹이놀이터 Sep 21. 2016

영화 ‘서프러제트’를 보고서

- 말이 아닌 행동으로 -


20세기 초 영국, 세탁공장 노동자인 모드 와츠는 한 남자의 아내, 한 아이의 엄마로서의 자신의 삶을 의심해본 적 없는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여성 투표권을 주장하며 거리에서 투쟁하는 ‘서프러제트’ 무리를 목격한 그날도 그들이 바꿀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을 거라 생각했던 그녀이다.

창문을 깨고 그녀들의 저항운동을 목격했던 그날, 모드는 시위대 속에 있는 동료 바이올렛을 보게 되고 그녀와 가까워진다.

처음에는 여성 참정권 운동에 연루되고 싶지 않던 모드였지만

법을 준수하자고요?
그럼 정당한 법을 만들어야죠.

라는 바이올렛의 말에 그녀는 투표권이 그녀의 생활에 미칠 영향에 대해 생각하게 되고, 서프러제트 운동에 서서히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다.

이 대사를 들으면서 어쩌면 법이란 것은 우리로부터 멀리 있다고 생각하지만 가장 근접하게 우리의 삶을 지배하고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쯤 모드는 바이올렛 큰딸이자 가장인 매기에 대한 사업주 테일러의 성추행을 목격하게 된다.

그녀 또한 그 나이에 사업주인 테일러에게 오랫동안 성추행을 당해왔기에 매기의 힘듦과 고통에 대해 공감은 하지만 침묵한다. 아직 그녀에게는 그의 행동을 막을 힘도, 그녀를 도울 자원도 없다.


여성 참정권 법안을 위한 총리와 면담이 있던 날, 바이올렛의 발언을 듣기 위해 참석한 모드는 남편의 폭력으로 발언할 수 없게 된 바이올렛을 대신하여 발언을 하게 된다. 그리고 총리와의 대화를 통해 어쩌면 우리의 인생도 지금과는 다르게 살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갖게 된다.

그녀의 이야기, 그녀의 어머니 이야기는 지극히 개인적이었지만 이미 정치적이었고, 그녀가 원하는 것은 여성들이 참정권을 얻고자 하는 이유였다.

그녀는 발언 이후로 힘이 생겼고 뜻을 같이 하는 동지가 생겼다.

한편 모드의 남편은 부인의 발언으로 서프러제트에 대한 낙인이 본인에게도 주어질까 봐, 그와 그녀가 직장을 잃게 될까 봐 두려워하면서 무책임한 그녀의 행동을 탓하며 그만할 것을 권했다.

그리고 얘기한다.

‘당신 걱정해서 하는 말이야, 당신 걱정밖에 안 해!’

어이없다. 그것은 과거나 지금이나 변한 것이 없다.

남편의 삶을 위해 그녀는 불편한 존재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얘기하면서 걱정한단다.

그날의 발언으로 그녀가 자신을 얼마나 자랑스러워하는지, 그 경험으로 그녀의 마음이 얼마나 희망으로 가득한 지에는 관심이 없다.   


여성 참정권 법안을 위한 총리 면담이 한 낫 액션에 불과했다는 것을 알게 된 모드는 분노했다.

처음으로 경찰의 폭력진압을 경험한 모드는 곳곳에서 여성들이 쓰러지고 피를 흘리는 것을 보면서,  왜 ‘말이 아닌 행동으로’란 구호로 서프러제트가 활동하는지에 대해 공감하게 된다.

하지만 아직까지 모드는 본인의 행동이 여성 참정권 운동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가족과 아이에 대한 걱정으로 경찰서에서 그녀는‘나는 여성 참정권 운동가가 아니에요’라고 말한다. 그녀는 감옥 안에서도 아이에 대한 미안함으로 매일같이 사과를 하지만 남편은 ‘자네 집사람 진짜 망신이야. 단속 잘하라고’라는 주변으로부터 조롱과 비난 섞인 이야기를 듣는 것이 두렵고 불편하다.

출소 후 모드는 ‘그들이 우리한테 무슨 짓을 한 줄 알아요?’라고 얘기하려 하지만 남편은 ‘나랑 조지는? 경찰이 집까지 왔어! 덕분에 온 동네가 수근거려. 테일러에게 둘러댔지만 이미 알고 있더군. 다신 이런 식으로 망신 주지 마’라는 말로 더 이상 모드의 경험과 얘기를 들으려고 하지 않았다.

결혼한 여성의 삶이 그런 것이 아닌가? 사랑이라는 말 안에 가족에 대한 희생과 배려를 요구하면서 정작 남편을 불편하게 하는 여성은 낙인과 탓을 받게 된다. 아내로서, 엄마로서의 역할을 다하지 못한 것에 대한 낙인과 탓. 그것을 무책임이라 표현했다.


여성 참정권 운동의 지도자 팽크허스트 부인이 드디어 왔다. 그녀의 말을 들을 수 있다는 말에 모드는 남편에게 거짓말을 하고 그곳에 간다. 우리에게 저런 여성 지도자가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동지들의 고통을 공감하고, 힘을 불어넣으며 책임을 함께 지려는 지도자!

‘우린 이 세상에 태어난 모든 여자아이에게 남자 형제들과 동등한 기회를 주기 위해 투쟁하는 겁니다. 우리의 운명을 규정짓는 여성의 힘을 과소평가하면 안 됩니다. 절대 굴복하지 마세요! 투쟁을 멈추지 마세요!’

지도자의 이런 연설을 들어본 적이 있던가? 나 또한 주인공처럼 그곳에 서서 내 삶이 어쩌면 바뀔 수도 있을 거란 희망을 가지며 그녀의 공감 어린 연설을 듣고 싶었다.

하지만 집회에 들이닥친 경찰에게 모드는 다시 잡히게 된다.

체포할 필요 없다. 남편들이 알아서 하게 해!

이 한마디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생각은 했지만 그녀가 그러한 이유로 버려질 것이라는 것은 상상하지 못했다.

그녀에 대한 걱정뿐이라던 남편은 이웃과 동료의 시선, 아내로서 엄마로서 본분을 잊었다며, 그가 그렇게 하지 말라고 했던 운동을 했다며 문 앞에서 내쫓는다. 아이를 보게 해 달라며 울부짖는 모드의 모습이 그리 낯설지 않았다. 지금도 이런 일들은 비일비재하기에 아이를 지키기 위해 얼마나 많은 엄마들이 그녀의 욕구를 숨기고 순종하며 사는지 참으로 가슴 아팠다.

그런 그녀를 웃게 하는 것은 바이올렛이었다.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녀에 대한 지지와 위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리라
(요한계시록 21:1-8)

이 읊조림에 나 또한 위로를 받았다.

다~ 지나갔음이리라.


모드의 삶은 천천히 그녀를 전사로 만들었다.

같은 여성의 비난 섞인 말과 직장동료의 눈빛, 사업주와 남성들의 조롱, 남편의 버림 등

전사는 거창한 것이 아니었다. 자신의 믿음을 말이 아닌 행동으로 옮기는 그것이었다.

모드가 전사가 되어가는 동안 남편은 아이를 돌볼 부인이 없음으로 자기 아들을 입양 보내기로 결정한다.

모드의 동의는 필요하지 않았다. 당시 법이 그랬다.

‘나한테 줘요! 부탁이에요’ 모드의 말에
‘법적으로 내 아들이야’
남편은 그렇게 한마디로 아들을 눈앞에서 타인에게 보냈다.

엄마의 이름을 기억하라며 꼭 찾아와 달라던 그녀의 말에 나 또한 눈물을 흘렸다.

바이올렛이 말한 ‘정당한 법을 만들어야 한다’것은 이런 것이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모드는 이날의 부당한 경험을 통해 여성 참정권 운동가가 되기로 마음먹는다.

저는 평생 남자들이 시키는 대로 살았습니다.
더 이상 그렇게 살고 싶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젠 그렇게 어리석지 않습니다.
남자가 자유를 위해 싸우는 것이 정당하다면 여자가 자유를 위해 싸우는 것도 정당합니다. 법 때문에 제가 아들을 볼 수 없다면 전 그 법을 바꾸기 위해 싸울 겁니다.


그녀는 이제 두려울 것이 없다. 바뀌지 않을 거라는 포기보다는 바뀌게 하겠다는 의지로 가득 차 있다.

모든 것을 잃었지만 자신의 꿈(DREAM)이 생겼고 동지가 생겼다.


영화는 막바지로 향한다. 국왕이 참가하는 더비 경주대회.

서프러제트는 모든 기자들이 참석하는 그 자리에서 국왕에게 그녀들의 의지를 보여주기 위한 계획을 세운다.

하지만 에밀리의 희생과 순교를 눈앞에서 지켜봐야 하는 모드는 이제 지체할 수 없었다.

어렸을 적 자신을 외면했듯 더 이상 매기를 외면할 수 없었다.

기차에서 내리자마자 모드는 매기에게 달려갔고 그녀를 그곳에서 벗어나게 했다.

‘매기가 버는 돈이 전부예요’라고 말하는 바이올렛에게 모드는 어떠한 말도 하지 못했다.

가족의 생계가 매기의 손에 달려있고, 바이올렛에게는 그것에 대한 차선이 없었다는 것을 알기에 모드는 매기를 호튼 부인에게 데리고 갔다.

그녀에게도 자원이 생긴 것이었고 확신이 있었다. 동지에게 갖는 믿음 같은 것이었다.

호튼 부인은 어떤 것도 물어보지 않고 매기를 받아들였다.

여성 연대란 이런 것이었다.


에밀리가 모드에게 전해주었던 DREAMS 책에 나왔던 구절이 영화 중간중간에 그녀의 모습과 함께 겹쳐졌다.

방황하는 여자는 자유의 땅을 찾아 나선다.
어떻게 갈 수 있을까
여자가 말하자
이성이 대답했다.
그곳에 가는 방법은 한 가지밖에 없어요.
노동의 둑으로 내려가
고통의 물을 건너야 해요.
다른 길은 없어요.
가지고 있던 전부를 버린 여자는 울부짖었다.
아무도 안 간 이 먼 길을 난 왜 가야 하는 건데?
난 혼자야, 철저히 혼자.
그러자 이성이 대답했다.
조용히 해봐요. 뭐가 들리죠?
그러자 여자가 대답했다.
발소리가 들려
수천, 수만 수백만의 발소리가
이쪽으로 오는 게 들려
당신을 따르게 될 이들의 발소리예요.
그들을 이끌고 가세요.

이미 모드는 고통의 물을 건너 수천, 수만 수백만을 이끌고 있었다. 그녀가 운동이었고, 의지였고, 희망이었다. 어린 매기도 그녀 곁에 있었다.

에밀리의 희생으로 모든 신문의 메인에는 그녀의 이야기가 실리게 되고 언론은 여성 참정권에 대해 주목하게 되었다.

에밀리의 죽음은 세계적으로 기사화되었고 여성 권리의 투쟁에 대한 세계의 관심을 이끌어 냈다.

그리고 에밀리의 장례식에는 그녀의 죽음 추모하는 수천 명의 사람들이 모이게 된다.

여성, 남성할 것 없이. 결국 영국 여성 천명 이상이 투옥된 투쟁이었다고 영화는 마무리한다.

1918년, 30세 이상의 특정 여성들에게 투표권이 주어졌으며
1925년, 자녀에 대한 어머니의 권리가 법적으로 인정되었다.
1928년에는 여성도 남성과 똑같은 투표권을 갖게 되었으며
세계 각국에서 여성의 투표권이 인정받기 시작했다.

자막으로 올라가는 여성의 투표권에 대한 과정을 보면서 어쩌면 지금은 여성을 위한 법들로 넘쳐나지만 그것은 말일뿐 지키기 위한 행동은, 투쟁은 사라진 지 오래되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말이 아닌 행동으로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필요한 구호가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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