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비행, 그리고 결혼
방콕으로 향하는 비행은 5시간이 넘도록 이어졌다. 운 좋게도 한자리가 비어 연달은 세 좌석을 둘이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 오래 앉아 있으니 허리 주변부가 점점 아프기 시작했다. 빈자리에 상체를 기대고 오빠에게 다리를 툭 걸쳤다. 오빠는 내가 하루종일 피곤했을까 걱정되는지 내 종아리를 주물렀다. 나는 자세가 불편해 계속해서 뒤척였고 연신 오빠에게 치댔다.
오빠는 그런 나를 한없이 받아주었고 어느 순간 이 상황이 너무도 황당했는지 나를 보며 말했다. “너 자꾸 아기처럼 굴래?” 당당히 답했다. “응, 내리고 싶어, 얼른 도착하고 싶어!” 오빠가 물었다. “너 이래서 유럽은 어떻게 갈래?” 눈을 똑바로 똑바로 뜨고 답했다. “비즈니스 타고 갈래” 내 대답이 의외였는지 오빠가 허탈하게 웃으며 말했다. “둘이 하면 엄청 비싸~” 새침하게 답했다. “나 혼자 탈게 비즈니스“ 이번 대답은 더 놀라웠는지 이번엔 오빠가 눈을 잠깐 크게 떴다가 뱃심으로 웃었다.
비행 초반 3시간여 동안은 이북으로 책을 읽던 오빠가, 내 칭얼거림 때문인지 시간이 늦어서인지(둘 다 일 것 같다) 잠들기 시작했다. 얼마 뒤엔 기장님이 잘 자라고 불도 꺼줘서 미동도 없이 나처럼 불평도 없이 잘 자는 오빠였다. 분명 연애 초반에는 감각이 예민하기로는 오빠를 비빌 자가 없어 보였는데, 은근히 무던한 면도 있는가 보다. 무드등만 켜놓은 듯 어둑한 기내 안. 살짝 뉘어 잠든 오빠를 바라보니 많은 생각이 스친다. 어쩌려고 손 많이 가는 나를 만나서.. 내 곁을 지키느라 신체적으로나 정서적으로나 에너지가 많이 들 것이 분명했다. 만나는 몇 년 동안 점차 성장해가고 있기는 해도 오늘처럼 막무가내로 지 기분대로(?) 할 때도 아직 많다. 미안한 마음과 고마운 마음이 교차했다. 언젠가 결혼이란 평생을 사랑해야 할 것만 같은 구속으로 느껴져 마음이 무거웠던 때가 있다. 오빠에게 물으니 이렇게 답했다.
“잇다야, ‘평생을’, ‘매일매일’ 사랑하겠다 생각하면 가슴이 답답해지고 사랑이 변하면 어쩔까 걱정되는 게 당연해. 그래서 난 일단 ‘오늘’ 사랑하며 지내. 어떻게 사람 사이가 항상 좋을 수만 있겠어, 약간 소원해질 때도 있고 싸울 때도 있고 그러다가 다시 좋아지고 사랑하고 그런 게 아닐까? ㅎㅎ”
위의 대화를 적다가 때마침 난기류를 만났다. 주변에선 번개가 지면으로 사정없이 꽂혔고 비는 속절없이 내렸다. 지구 온난화로 이런 일이 점점 많아진다더니 사실인 듯싶었다. 비행기는 한참을 흔들리며 혼란한 창 밖의 세상을 비췄다. 그러다 세 번의 알림음이 울리며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얼굴 한번 본 적 없는 분이 익숙하게 느껴졌던 이유는, 비행 시작과 함께 해주신 낭만적인 멘트와 난기류를 통과하며 절실한 마음으로 기장님을 응원했기 때문에 쌓인 내적 친밀감 덕분일 것이다. 어쨌든 아직 거친 구름 사이를 통과하는 중에, 기장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손님 여러분, 즐거운 여정 되셨나요? 이제 우리 비행기는 방콕 수완나폼 공항에 착륙할 예정입니다.”
세찬 비바람을 지나는 길이라도, 금방 비가 그치고 날이 갤 것을 아는 자의 멘트였다. 결혼이란 것도 여행의 설렘과 고단함, 즐거움과 피로, 시련과 극복 같은 것이려나. 마냥 좋을 것으로 예상되는 우리 미래에도 언젠가 지치는 날이, 궂은 날씨에 휩싸이는 날이 올 수 있겠지. 그때마다 어둔 구름을 뚫고 쾌청한 하늘로 나아갔던 오늘의 하늘을 기억해야겠다. 그래서 다시 서로의 손을 잡고 온기를 느끼며 앞으로 나아가야겠다. 힘들면 잠시 쉬고 여유도 부리며 삶의 축복을 만끽해야겠다. 오빠, 내 여행에 함께 해줘서 정말 고마워!
-비행 내내 칭얼댄 자의 미안함이 담긴 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