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어떤 연유로 만나 어느 곳을 바라보고

by 잇다

나는 늘 정신머리가 없다. 곧 있으면 크리스마스라는 건 알았는데 이브가 오늘인 줄은 몰랐다. 핑계를 대자면 아무래도 adhd 때문일 것 같다. 그렇게 여느 평일인 줄 안 이브의 저녁, 뜬금없이 미용실을 예약했다. 직장에서 점심을 먹고 양치를 하며 마주친 거울 속, 내 헤어스타일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순식간에 이루 말할 수 없이 질려 버렸다. 시간과 공간만 충분하다면 그 자리에서 싹둑 잘라버리고 싶을 정도였다. 몇 시간 후 퇴근길에 바로 예약을 하곤 오빠에게 전활 걸었다. 집에서 꽤 거리가 머니 함께 가려고. “같이 가자, 같이 갈 거지? 응?” 별다른 거절의 기색이 없는 오빠다. ”그래! 대신 운동 조금만 하고 7시에 출발하자.” 운동? 운동은 생각이 없었는데 어쩌지.


나의 천진난만한 뇌구조는 어젯밤 쇼핑앱에서 봐뒀던 맨투맨을 떠올리며 말을 내뱉는다. “운동 갈 테니까 대신 10만 원만 줘. 나 용돈 다 썼는데 사고 싶은 거 있어.” 내가 생각해도 철부지 같은 소리다. 이런 중학생 때나 할 법한 유치한 요구라니. 스스로도 어이가 없지만 머릿속에 들어온 물건은 내 손에 쥐기 전까진 쉽게 떠나는 법이 없다. 결국 원하는 것을 얻어 내고 오빠는 헬스장으로, 나는 아파트 헬스장으로 향한다. 오늘따라 날이 춥고 걸음이 무겁다. 또 한 번의 결국. 딱 20분만 걸은 후, 오빠에게 <땀이 나요>란 카톡을 남긴 채 집으로 돌아온다. 도착해서 운동복을 벗어던지는데 오빠에게서 이런 답장이 와있다. <ㅋㅋㅋㅋ 기여워 땀이 나야죠>


오빠가 아직 오지도 않았는데 배가 고파 짜파게티를 끓여 먹는다. 분명 같이 먹자고 했었는데. 오빠가 오면 뭐라고 말하지 따위의 생각을 한다. 고요한 집안이 내겐 적막하다. 태블릿을 켠다. 이혼숙려캠프, 얼마 전에 짤만 봤는데 오늘은 방송을 봐야겠다. sns 관종 아내와 독설 아내 편을 봤다. 사진 찍는 걸 좋아하는 것, 과소비하는 것, 화나면 감정 조절을 못하고 분노를 그대로 표출하는 것, 운동보다는 뒹굴거리기를 좋아하는 것 등등. 요약하자면 '철부지' 같은 모습을 보고 가슴이 계속 뜨끔거렸다. 오늘 내 모습만 봐도 그렇다. 방송 보며 혀를 끌끌 찰게 아니라, 오히려 나야말로 종합선물세트는 아닌지 돌아보게 된다. 그나마 내게 있어 인스타는 사진 저장소일 뿐이라 내 사진만 올리고 금방 나가서 다행인 것 같다. 나처럼 자기한테 관심 많은 애가 다른 사람한테도 관심이 많았으면 큰 일일 뻔했다.





프로그램 속 패널(아마도 변호사) 한분이 말씀하신다. "저도 결혼 전엔 사람 아니었어요. 정말 막 살았거든요. 근데 결혼을 하고 보니까 성숙함이나 희생, 인내, 참을성 같은 것들을 배울 수 있더라구요. 우리는 어른이잖아요. 인간으로서의 도리는 해야 하는 거잖아요." 이번엔 정신과 의사란 분이 나와 말씀하신다. "아내분은 지금 철부지 어린애 같아요. 근데 계속 철부지 같으면 안 되는 거죠. 이제 결혼을 하셨으니 아내, 그리고 엄마의 역할이 생겼는데, 언제까지 이렇게 지내시려구요." 머리가 여러 번 댕-댕-댕- 울린다. 나는 매번 내 성격이나 성향을 방패로 오빠에게 많은 짐을 지운 게 아닌지. 미안한 마음이 가득 드는 와중에 오빠가 집으로 돌아왔다. 이른 새벽부터 독서, 직장일, 운동, 개인 업무, 내 미용실까지 따라나서주는 등 바쁜 하루를 보낸 터라 몹시 피곤해 보인다. “오빠, 오늘은 먼저 자. 나는 집안일 좀 하다가 잘게.”


말은 무슨 천년의 현모양처 같지만 놀랍게도 오빠가 준 10만 원으로 맨투맨을 결제하고서야 안방을 나선다. 자주 자책하면서도 구매하기 버튼을 누르지 않는 게 너무나도 어렵다. 주기적으로 쇼핑 중독에 대한 영상이나 치료법을 시청하지만 생각대로 되지 않는다. 모든 걸 adhd의 계략으로 치부하고 싶다. 어쨌거나 자지 않고 거실로 나왔으니 그건 참 잘한 일. 안방의 오빠가 깨지 않도록 조심조심 설거지를 한다. 요 며칠 사이 설거지가 꽤 재밌어졌다. 설거지나 빨래를 널고 갤 때만큼은 일심(하나의 마음, 한 가지 일에 집중하는 것)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걸 최근에야 깨달았다. 재밌는 걸 보면서 하면 하나도 힘들지가 않다. 이 외에 부엌에 널브러진 것들을 차분히 정리하고는 신발장으로 이동한다. 내일 오빠가 보면 좋아하겠지 하며 하나하나 예쁘게 정리. 유럽 여행에 필요한 짐도 조금씩 채워나간다. 동시에 이혼숙려캠프 속 출연자들을 유심히 보면서, 내가 부족한 것들과 고치면 좋을 부분들에 대해 생각한다. 오빠는 나 땜에 뭐가 불편할까, 뭐가 답답할까. 나열한 하루 일과만 봐도 아쉬운 점 투성이일 텐데. 오빠는 그래도 내가 좋은 걸까. 내일은 오빠를 위해 할 수 있는 것들에 더 집중해야지.

목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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