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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의 빨간 유모차

백일지난 갓난쟁이는 살려야하니까!

by 안영

뇌동맥류 수술후 내 머리속에 코일백금이 한자리 차지하고 있다. 뇌혈관속에 무언가 들어있다는것이 두통의 원인이 되었고, 예민함이 더해져 편두통도 아주 심해졌다. 공황이 오진 않았지만 순간순간 편두통의 증상은 공황장애의 증상과 아주 비슷한 양상으로 온다. 항혈소판제를 계속 먹다가 이젠 괜찮을꺼라며 끊고 6개월이 지날 무렵 정말 선물같이 내 뱃속엔 생명이 들어왔다. 결혼을 안할꺼라며 자유를 꿈꾸던 나는 죽을고비를 넘기고 그 고비를 옆에서 지켜준 그 남자와 아이를 갖고 결혼을 하게된다. 그리고 또 사건은 터진다.

아이가 갓 100일이 지난 무렵이다. 참을수 없는 두통이 사흘을 괴롭혔다.

통증에 워낙 예민한 몸이라 뭔가 이상함을 감지했다. 뇌동맥류때문에 응급실을 드나들었던 그 때의 그 증상들과 너무 비슷했기에 아이를 부모님께 잠시 맡기고 병원으로 향했고, 담당 의사선생님은 바로 MRI를 찍게 해주셨다. 그리고....청천벽력이 떨어진다.

"뇌경색입니다. 이게 몇번이나 지나갔어요. 얼른 아산병원에 다시 예약을 잡으시고 검사를 해보세요. 혹시라도 코일이 혈관밖으로 나와 돌아다니는거면 위험합니다."

눈앞이 캄캄했다. 이전에 내가 혼자일때 뇌동맥류를 진단 받았던 그 날보다 몇백배 아니 몇천배.....

당장 아이 얼굴부터 떠올랐다. 눈물이 날 것 같았지만 정신을 차려야했다.

현장에서 일하는 남편이 퇴근까지 신경쓰이게 하고 싶지 않아서 일단 남편에겐 괜찮다고 하고, 아산병원에 예약전화부터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와 부모님께 조심스레 말씀드렸다. 죄송스러웠다. 그 누구의 탓도 아니지만 .. 서로가 미안한 그런 무거운분위기였던것 같다. 다행히 예약은 그리 오래걸리지 않았고, 남편과 버스를 타고 서울로 향했다. 부모님이 안계셨다면 그 어린걸 두고 어쨌을까 싶다.

MRI복사본을 확인하고 , 뇌동맥류 수술을 맡았던 교수님의 너무 프라이드 강한 발언에 언성이 높아져 잠시 다투고, 다시 신경과 교수님을 만나 상담을 하고,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남편이 아니였음 혼자서 정말 무서웠을거다. 신경과 교수님께서 조심스레 말씀하셨다.

"보통 이렇게 젊은 사람들에게 오늘 뇌경색 증상은 심장에 문제가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혹시 심장내시경을 해보셨을까요?"

"예??심장내시경요??? 위내시경처럼 그 내시경요???"

난 당황스러웠다. '심장내시경도 그럼 수면으로 하는건가? 심장을 내시경을 한다고?'

"네. 맞습니다. 그런데 심장은 수면으론 안되고 아주 불편하고 시간도 좀 걸립니다. 하지만 지금 꼭 필요한 검사인것 같습니다. 뇌경색 양상이 심장구멍을 통해 뇌로 올라가 그 혈전이 계속 돌면서 뇌경색을 일으키는것 같습니다"

남편은 고민할것도 없이 검사를 하겠다고 했고, 나도 정확한 원인을 찾아야하니 수긍했다.

아...지금 생각해도 그 심장내시경은 다시는!! 하고 싶지않다. 너무!!너무너무너무!! 힘든검사였다.

결과는...신경과교수님이 말씀하신 그대로였다. 난원공개존증! 심장에 구멍이 있었다. 크기는 크기않았고 애매하게도 계속 열려있는 상태도 아니였다. 그래서 검사가 오래걸렸고, 구멍이 있긴하지만 시술도 어려운 상황이라고 했다. 그러면 난 어떻게 해야되는거냐고 다그치듯 물었다.

방법이 없었다. 항혈소판제를 다시 먹으면서 관리하고, 혹시나 참지못할 두통이 온다면 얼른 병원으로 가서 검사를 하는것 말고는 ! 뇌경색이 다시 크게와서 쓰러지면 골든타임을 놓치지않고 병원으로 가는 방법외에는!

무너졌다. 나 혼자라면 아무 상관없었다. 놀만큼 놀았고, 하고싶은거 많이 했고, 적당히 더 하고싶은데로 살다가 어느날 죽어도 크게 후회없는 삶이였다. 하지만 나는 이제 혼자가 아니였고, 내 가정이 생겼고, 너무 귀하고 사랑스러운 아들이 태어나 그 행복을 맛본지 막 백일이 지났고, 내가 전부인 그 귀한 아들에게 내가 없는 이 세상을 줄수는 없었다. 불안함은 더 두통을 가져왔고, 난 혼자 있는 불안한 시간들을 견디기 힘들어 부모님꼐서 거의 같이 계셨지만 경제활동을 하셨기에 항상 옆에 있어주실수는 없었다. 그런날이면 난 아이를 유모차에 태워 동네를 몇바퀴고 돌았다. 집에서 갑자기 내가 쓰러지면 아이는 누군가 올 때 까지 내내 울고 혼자 무섭게 있어야할테이니 집에 있을수가 없었다. 그렇게 사계절을 보냈다. 동네 가게나 이웃들은 나를 빨간유모차라고 불렀고, 일일이 내 상황을 설명하기도 싫고 그럴 이유도 그땐 없었기에 사람들은 내가 하릴없이 아이데리고 돌아다니는 여자라 생각했다. 지금도 그 때를 생각하면 가슴부터 머리까지 아파온다. 눈물이 날 것 같지만 눈물이 나지 않고 턱턱막히는 ....그렇게 그 아이가 7살이 되었다. 난 그 불안함에 많이 익숙해졌지만 아직도 두렵다. 이젠 아들이 엄마가 어떻게 아픈지 안다. 119에 전화하는 방법도 안다. 그런 상황을 알려줄때 너무 슬펐다. 아직 조그만 아이에게 무서운 상황을 인지시키고 이해시켜야 하는 나도, 무서울텐데 이해해주고 받아주는 아들도,,,,,가끔 그 시절 빨간유모차를 끌고 아이와 동네를 헤매던 시간들의 사진을 들춰보기도 한다.

아이와 웃으며, 아이만 있는 유모차, 나 혼자 웃으며,, 그 땐 죽음을 옆에 두고있었다. 그래도 웃고있었다.

아이에겐 웃어줘야했으니까. 내가 세상에 전부인 아이에게 슬픈 모습만 보여줄 순 없었으니까.

지금도 웃는다. 웬만해선 웃는다. 누구나 언제죽을지는 모르는일이니까. 내가 그 확률이 남보다 아주 조금 높을뿐. 알수없는거니까. 죽음이라는 울타리에 나를 가두지 않고 꺼내고 있다. 언젠가 기막힌 치료제가 나오겠지!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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