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가 될까요?

미니멀한 위로

by 사각사각

토요일 주말 이른 저녁. 지인을 만났다. 거의 사년 여 만에 연락을 해온 지인은 무슨 사연이 있을까? 한편으로는 걱정도 되고 기대도 되고 새삼 떨리기도 하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라는 말처럼 오래 만에 오는 소식은 예상 못하는 불길함이 있다. 삶은 강물처럼 지속적으로 앞으로 흘러가고 우리도 각자의 흐름대로 나아간다. 삶을 거슬러 올라가 알을 낳으러 상류로 올라가는 연어처럼 다시 만나는 일은 극히 드문 일.


그를 마주하고 앉았다. 어제 만난 듯 반갑기만 하다. 몇 년 전 우리는 꽤나 대화가 잘 통하는 사이였고 그를 남동생처럼 여겼다. 성품이 매우 온화하고 성실하다고 여겨서 내 동생을 소개해주기도 했다. 아쉽게도 둘 다 서로에게 관심이 없었지만. 오랫 만에 만나도 예전처럼 충분히 다정하고 소소한 대화가 오간다. 끝없는 수다를 떠는 건 주로 나이고. 언제나 같이 어색한 침묵을 견디지 못하고 쓸데없는 에피소드들을 늘어놓았지만 그는 옅은 미소를 띠고 침착하게 일말의 동요도 없이 들어준다. 시종일관 감정 표현이 잔잔하다. 나는 과장되고 다소 주책없고 지나치게 솔직하고 타고난 순진성을 어쩔 수가 없다. 이 나이에 순진하다는 말은 욕이라는데.


혹시나 했으나 역시나 우리의 주제는 이혼이 되었다. 사랑에 대해 누구보다도 순수하고 진지한데 왜 우리는 결국 이혼에 이르게 되었을까?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우리가 대체 무슨 죄를 지어 이런 혹독한 마음의 부침과 시련을 겪어야 하는지 신에게라도 되물어야 할 일이다. 어디서부터 무엇이 잘못되었을까?


잘못이라면 사랑에 대해 맹목적이고 상대방에게 끊임없는 지원과 믿음을 준 것이다. 그것을 받을 만한 상대를 선택하지 못한 것이 죄라면 죄다. 뱀처럼 지혜롭지 못하고 세상을 살기에 지나치게 선하다는 게 또 다른 죄다. 결혼이라는 선택을 잘못한 과오로 수년의 고통을 겪어내고 결국은 애쓴 보람도 없이 실패자가 되어 만났다. 남들처럼 행복한 순간들이 분명 있었겠지만 어찌되었든 명백한 결과는 인정해야 하는 것이고.


의문은 끝이 없다. 인생 자체가 의문이나 날마다 새로이 힘을 내어 꿋꿋이 살아내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지 않은가?


내 존재가 위로가 된다니 다행이다. 선 경험자로서 나의 지난했던 분투가 도움이 될 수도 있겠다. 인간은 경험해 본 분량만큼만 상대방의 고통을 이해할 수 있다. 부모의 마음을 정확히는 모른다. 부모가 되어 보지 않았으니 선생님으로서 겪은 시간이 있으므로 한때 부모의 마음을 안다고 주장했으나 모른다는 게 맞다.


결국은 위로자의 역할을 하기 위해 그 길고 긴 막막한 시간을 겪어내야만 했을까? 그렇다면 그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는 일이었다고 받아들이겠다. 마침내 참된 위로자가 되다!

대화는 계속되었고 차를 마시고 늦은 저녁을 먹고 만남은 끝났다.


비슷한 사람을 만난 느낌이다.

이 길의 끝에서 우리는 인생에 대한 명쾌한 해답을 얻을 수도 있다. 사실 해답이란 없으며 목숨이 붙어있는 한 어떻게하든 지 계속 살아가야 한다고 밖에는 덧붙일 말이 없다.

아직은 고이 덮어놓아야 할 상처이고

수년 후에는 그 이유를 발견하고 그 의미를 깨닫게 될 수도 있다.

지금은 묵묵히 할 일을 하며 견디는 시간이다.

모든 낯설었던 기억이 꿈인 것처럼 희미해질 때까지.


결국은 삶에 모든 순간을 축복으로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

견디는 자, 복을 받으리.

위로가 되었다니 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