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조주 Jul 11. 2016

선을 그었다

잉크 방울이 남고 선이 삐져나왔다

점을 두 개 찍었다. 나름의 목표였다. 내가 있는 점은 이곳이고 내가 가야 할 점은 저곳이다. 선을 그었다. 두 점 사이의 거리를 재어보고자 몇 번이고 그 사이를 왔다 갔다 펜을 긋다 보면 나도 모르게 불안해졌다. 맨 처음에 그은 선을 따라가는 펜 끝이 답답했다. 원래의 선에 어긋남 없이 선을 그으려니 자꾸 느려진다. 다른 모든 것은 멈춰있고, 손 끝만 놀리는 것임에도 그 속도를 유지하지 못해 느려진다. 그 느린 속도도 일정하지 못해 선 위 어느 지점에는 펜에서 나온 잉크방울이 유난히 크게 머물렀다. 맨 처음 그은 선 위에 나는 못생긴 크고 작은 방울들을 남겨버렸다. 그 방울들을 이쁘다고 해줄 사람이 있을까. 그냥 뒤쳐짐을 보여주는 하나의 못생김일 뿐이다. 너의 답답한 펜 끝이 남긴 못생김이야! 지레 움츠러들었다.


이번엔 그냥 빨리 한 번에 훅 그으려고 했다. 빠르게 그으면 잉크의 뭉침은 남지 않겠지. 어디에도 머물지 않으면 머문 그 시간이, 그 공간이 못생기게 기록되지 않겠지. 훅 그었다. 너무 빨라 맨 처음 그은 선을 제대로 따라가지 못한 새로운 선이 삐져나왔다. 삐져나온 선을 덮을 어떤 것도 나는 발견하지 못했다. 완전히 끝까지 용기 있게 삐져나간 것도 아니고 삐져나갔다가 다시 원래의 선으로 돌아와 의도치 않게 아주 날씬한 포물선이 그려졌다. 나는 두 개, 세 개, 아니 그냥 한 개가 아닌 선을 그릴 용기가 없었던 것이다. 그냥 중간에 얇은 포물선만의 공간이 생긴 채로 우물쭈물 잠깐의 일탈을 후회하는듯 돌아왔다. 원래의 선으로.


못생긴 잉크 방울의 무게를 내가 감당할 수 있을까. 내가 그 포물선의 공간을, 일탈의 공간을 채울 용기를 낼 수 있을까. 조급해하지 않고, 너무 앞만 보지 말고, 여유 있게 주변을 보며 선을 그을 수 있을까. 선 주변이 지저분해져도, 그걸 지저분하다고 하지 않고 새로운 눈으로 봐줄 사람이 있을까. 오늘은 일단 일탈의 공간에 검은색을 조금 칠해보았다.

매거진의 이전글 여유가 없는 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