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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사임당 Nov 09. 2021

멋쟁이에 대한 단상

생각해보지 않은 단어에 대한 생각과 이야기


새벽 6시 23분. 그녀의 글이 도착했다. 10월의 어느 날 그녀는 내게 별안간 단어 3개를 선물해 달라고 했다. 나는 별다른 의미 없이 그저 떠오르는 대로, 마음에 넣어둔 좋아하는 낱말을 보냈다. ‘가을, 작은 기쁨 그리고 멋쟁이’ 오늘의 글은 바로 멋쟁이였다. 그녀는 늘 외모와 패션, 자신을 꾸미는데 진심을 다하는 멋쟁이다. 본인에게 어떤 색이, 어떤 헤어 스타일이, 어떤 화장이, 어떤 스타일의 옷이 잘 어울리는지 늘 연구하는 모양이다. 그녀를 만날 때마다 느꼈다. ‘자신에게 매일 정성을 다하고 있구나.’하고.     


단어를 보내고, 사실 아무런 생각이 없었다. 그런데 오늘 글을 보니, 내가 생각하는 ‘멋’은 무엇이며, 그것을 내는 ‘멋쟁이’는 어떤 사람일까? 멋쟁이는 어떤 삶을 사는 것일까? 생각이 꼬리를 문다. 내 생각으로 무엇을 제단하기에 앞서 요즘은 습관처럼 사람들에게 묻는다. 여러 사람들의 생각을 잘 들어보면 나와의 생각의 결이 같아서 고개가 끄덕여지기도 하고, 가끔은 갸우뚱해지기도 하다가. 하나의 선으로 연결해 마음이 가는 어디쯤에서 본래 갖고 있던 내 것보다 보다 조금 더 넓어진 생각으로 정리되곤 한다. 아침 일찍 샤워를 마치고 나온 남편이 화장실 앞에서 머리를 말리고 있었다. 등에 남아 있는 물기를 수건으로 닦아주면서 물었다.      

“오빠, 어떤 사람이 멋쟁이 같아?”

“아침부터 또 왜 뚱딴지같은 소리?”

“그냥, 궁금해서. 오빠한테 멋쟁이는 뭔가 하고.”

“그냥 돈 많으면 멋쟁이다.”

아, 역시 남편은 기발하다. 이렇게 철저하게 자본주의적 시각을 갖고 있었나. 대화를 더 이어갈 힘이 없어서, 출근 준비가 한창인 남편 앞에서 나는 이렇게 말했다.

“근육 있는 남자만큼 멋있는 사람이 또 있나? 아니면 빠져들 듯 뇌가 섹시하거나. 암튼 노력의 시간이 깃든 사람들이 멋진 것 같아.”

“아침부터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 하고 있네.”

“뭐래... 나 오늘 완전 멋 부리고 출근해야겠다. 놀라지 마.”      


말은 그렇게 했지만 평소와 다르지 않은 모습이었다. 검은색 니트로 된 투피스를 골랐다. 어제 내린 비 때문에 체감 기온이 뚝 떨어졌지만 모직 코트를 꺼내 입기엔 아직 이르다. 그래서 짧은 베이지 색 니트 재킷을 걸쳤다. 좋아하는 주황 낙엽 빛 립스틱을 바르며 화장을 마무리하고 감고 있던 헤어롤을 풀었다. 앞머리가 얼마나 자연스럽게 구부러지느냐에 따라 그날의 기분이 결정되는데, 오늘은 5:5로 자연스러운 웨이브가 나와서 딱 좋았다. 신발장 앞 거울을 보며 베이지색 앵클부츠를 신을까 하다가 깔끔한 검은색 펌프스를 골랐다. 마스크를 쓰는 것으로 출근 준비를 끝냈고, 운전석에 앉아 가을 아침에 어울리는 곡을 재생한 후 학교로 향했다. 평소와 달리 무려 15분이나 일찍 나와서 오늘은 내가 교무실에 2등으로 도착했다. 자리 정리를 하고, 노트북 전원을 켰다. 메신저와 업무포털에 접속해서 로그인을 한 후 휴게실로 가서 과테말라 원두를 꺼내어 그라인더로 갈았다. 드리퍼에 천천히 물줄기를 그리니 풍성한 거품이 올라왔다. 천천히 커피를 내리며 다른 분들이 오기를 기다렸다. 질문을 하고 싶었던, 내게 멋쟁이인 그녀가 곧 도착했다. 오늘은 크림색 얇은 핸드메이드 숏코트에 청바지를 입으셨다.  


“좋은 아침입니다. 오늘 서 부장님이 커피 내리시네요.”

“네, 안녕하세요. 교감 선생님.”

“오늘 커피 냄새가 다른 날보다 더 좋네요.”

뜨거운 물로 데운 잔에 커피를 따라 한 모금 마시니 곧이어 그녀도 텀블러와 함께 본인의 자리에 착석하셨다. 컴퓨터 부팅이 끝나 모니터로 오늘 해야 할 업무를 대충 살피신 눈치였다. 질문을 하기에 딱 적합한 시간 이리라.     

“교감 선생님, 질문이 있는데요, 멋쟁이가 뭐라고 생각하세요?”

“네? 멋쟁이? 우리 부장님은 생각도 못하는 엉뚱한 질문이 많아서 늘 긴장해야 해.”

“아니. 오늘 아침에 멋쟁이에 대한 글을 읽었는데요. ‘외모 관리 잘하는 선생님은 수업을 잘하고 학생들에게 인기가 많다.’는 공식을 보고, 일반화하기엔 그렇지만 내 경험 속에서도 들어맞는 것 같아서요.”

“아, 멋쟁이. 멋을 내는 사람. 나도 그 말에는 동의해요. 그런데 멋쟁이는 이렇게 정의할 수 있을 것 같아. 자존감이 높은 사람. 어느 분야에서건 내가 능력이 있고 당당할 때 자존감이 생기잖아요. 그런 자존감이 있는 사람이 정말 매력이 있는 것 같아요. 외적으로도 내가 자신감이 있고 스스로 만족할 때, 무엇이든 잘할 수 있잖아요.”     


그 대답을 듣는 순간, 고개가 절로 끄덕여졌다. 오늘 아침 ‘멋쟁이’라는 제목의 그 글을 읽으며 ‘외모 관리’라는 작은 부분이 무언가 담아내지 못한 그녀의 속뜻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었다. ‘멋’이라는 단어가 차림새, 행동, 됨됨이 따위가 세련되고 아름다움을 이르는데, 그 멋이 결국 스스로의 자존에서 나온다고 생각하는 교감 선생님의 말씀을 들으니 ‘멋’에 대한 나의 관점도 분명해지는 것 같았다. 따라서 멋쟁이는 겉모습과 함께 말투와 생각, 행동에서 느껴지는 특유의 분위기와 품위가 느껴지는 사람인데, 이 글 속에 담긴 그녀들은 모두 내가 생각하는 멋쟁이다. 그녀들은 생각이 늙지 않고, 나와 다른 생각을 귀 기울여 들을 수 있으며 부드럽고 따뜻한 대화를 이어갈 수 있는 사람들이다. 생각이 유연한 것은 그만큼 자신에 대한 확고한 중심이 있음을 의미하고, 자신을 둘러싼 내면과 외면을 늘 단정하게 유지하여 까끌거리지 않고 부드럽다. 고로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이다.      


남녀를 아우르는 사람으로서의 멋쟁이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무엇이든 함부로 하지 않는 사람. 생각과 말, 옷차림과 표정, 향기와 피부까지 나를 둘러싼 모든 것에 늘 정성으로 가꾸고 그것이 생활화되어 남들이 자칫 멋 부린 것으로 의식하지 못하는 그런 사람. 내가 그렇다는 것은 아니고 내가 생각하는 멋쟁이는 그런 사람이라는 것이다. 솔직한 마음으로 내가 매일 그러한 멋있는 사람이었으면 좋겠지만, 나를 떠올렸을 때 혹은 문득 오늘 하루 그 많은 것들 중에 하나만이라도 멋이 있었으면 좋겠다. 박지선 1주기를 맞아 출간된 『멋쟁이 희극인』이라는 책 제목을 보았다. 그녀의 트위터에 남긴 단상과 아이디어 노트에 남긴 기록을 모은 책. 왜 제목이 멋쟁이 희극인일까 궁금했다. 그녀의 트위터 계정에 들어가 보니 궁금증이 해결되었다. 계정 이름이 바로 멋쟁이 희극인 박지선이었다. 스스로를 멋쟁이라고 생각하는 그 마음이 곧 멋쟁이다. 분명한 기준과 취향을 소유하고 끊임없이 자신을 그렇게 가꾸는 것이겠지? 그 책에 담긴 멋쟁이, 그녀가 궁금했다.        


마지막으로 많은 사람멋쟁이라 생각하는 남편에게 돈벼락이 떨어져서 스스로 멋쟁이라고 자부할  있었으면 좋겠다. 용돈이 넉넉하지 않으니 경제적 매력은 떨어지고, 뇌부터 시작해 온몸에서 섹시함을 찾아보기 힘들지만 남편은 아침저녁으로 깨끗하게  씻어서 향이 좋은 사람이다. 부지런히 자신을 씻고 가꾸는 남자, 그도 청년 시절에는 남성미 그득하고 센스 넘쳤던 나만의 멋쟁이였음을 잊지 말고, 그에게 중년의 멋이  깃들도록 나의 손길을 더하여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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