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려의 상대성 원리
‘한국에서 살아가는 어려움’을 이야기하는 어느 외국인의 인터뷰 영상을 본 적이 있다. 호기심에 들여다보다가 생각지도 못한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카페에서 한국어로 주문하면 모두 영어로 대답해요. 저에게 한국어를 연습할 기회를 주지 않아요.”
떠올려 보니 내가 한국에서 외국인을 마주할 때 역시 그랬다.
미숙한 영어 실력 때문에 대답을 제대로 하지 못할까 봐 긴장하기만 했지, 여행자가 한국어를 배우거나 사용하길 전혀 기대하거나 요구하지 않았던 것이다. 내 나름대로 외국인을 배려한다고 한 행동이었지만, 배려라는 게 서로의 입장에 따라 다르게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것을 미처 알지 못했다.
비단 외국인에게만 그래 왔던 건 아니다. 아주 친밀한 사이를 제외한 대부분의 관계에서 언제나 상대방의 의견이나 요구를 우선시하고 거기에 맞춰 주는 쪽이 편했다. 맏이로 자란 나에게 요구되던 유년기의 핵심 미덕이 ‘양보’였던 탓일까. 그게 나에게 익숙하고 유일하다시피 한 교류 방식이기에 편하다고 착각해 왔는지도 모른다. 결국은 스스로 편하다고 느끼는 방식으로 행동하면서도 머리로는 늘상 내가 더 배려한다고 여기는 인식의 함정에 빠져 있었다.
그러다 보니 인간관계에서 느끼는 피로도가 높아지고 보상심리만 커질 뿐, 시간이 아무리 지나도 관계가 깊어지지는 못했다. 어쩌면 단 한 번도 서로의 욕구를 제대로 맞춰 본 적이 없었으니까.
내 입장을 기준으로 삼아서 베푸는 배려는 때로 그 의도와 다르게 전달되기도 한다. 가끔은 자신의 욕구를 솔직하게 표현해서 타인이 나에게 맞춰 볼 기회를 주면 어떨까. 그것이 오히려 관계를 오래 유지하기 위한 하나의 방법일 수 있다. 내가 진짜 원하는 게 무엇인지, 내 생각은 어떤지 말해 주지 않으면 누구도 알지 못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