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 10세 구스타프
크리스티나 여왕은 결혼하라는 압박에 굴하지 않고 후계자 문제를 먼저 확정 짓습니다. 자신이 후계자를 낳지 못하고 죽을 경우 스웨덴의 왕위를 고종사촌이었던 팔츠-츠바이브뤽켄-크리부르크의 칼 구스타프에게 물려주려 한 것이었죠. 칼 구스타프의 아버지인 요한 카시미르는 비텔스바흐 가문 출신으로 팔츠-츠바이브뤽켄 가문은 팔츠 선제후가문의 분가중 하나였습니다. 칼 구스타프의 어머니인 카타리나는 칼 9세와 그의 첫 번째 아내였던 팔츠-지메른의 마리아의 딸이었죠. 아마도 카타리나가 요한 카시미르와 결혼한 것은 어머니가 팔츠 가문의 분가 출신이었던 것도 한몫했을듯합니다.
칼 구스타프의 어머니 카타리나는 구스타프 2세 아돌프가 가장 신뢰한 누이로 매우 강인한 인물이었다고 합니다. 구스타프 2세 아돌프는 정신적으로 불안정한 아내를 대신해서 딸을 돌볼 사람으로 누나인 카타리나를 지목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어린 시절 크리스티나는 이 고모와 고모 가족들과 함께 생활했었죠.
하지만 구스타프 2세 아돌프가 가장 신임했었으며 섭정단의 리더였던 악셀 옥센셰르나는 이 팔츠-츠바이브뤽켄 가문을 경계했었습니다. 아마도 스웨덴에서 외국인으로 스웨덴에서 자리 잡고 있던 요한 카시미르의 세력이 커지는 것을 우려했었기 때문이었을듯합니다.
칼 구스타프는 아마도 크리스티나 여왕의 남편감 중 한 명으로 여겨졌을 것입니다. 칼 구스타프와 크리스티나는 어린 시절부터 잘 알고 지냈고 칼 구스타프 역시 어머니를 통해서 중요한 스웨덴의 왕위 계승자 중 한 명이기도 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크리스티나는 결혼의사가 없었으며 결국 자신의 후계자로 칼 구스타프를 지지하게 됩니다. 악셀 옥센셰르나를 비롯한 귀족들은 이에 반대했지만 결국 크리스티나는 자신의 의견을 관철시키죠.
크리스티나가 퇴위하고 칼 구스타프는 스웨덴의 국왕으로 즉위합니다. 그의 통치기 역시 외삼촌이었던 구스타프 2세 아돌프의 시기처럼 주변 국가들과 전쟁의 연속이었죠. 칼 10세 구스타프 역시 외삼촌처럼 내정을 정비하고 외정을 다스리려 했습니다. 하지만 그에게는 시간이 별로 없었습니다. 국내 문제를 정리하기 전 폴란드와의 전쟁을 시작해야 했었죠. 스웨덴의 전통적 적국이었던 폴란드의 세력이 무너지고 러시아의 세력이 강해지면서 러시아가 폴란드를 넘보게 되죠. 상황이 이렇게 되자 스웨덴 역시 폴란드를 노려서 폴란드를 공격하게 됩니다. 처음에는 좋은 성과가 있어 보였지만 결국 폴란드를 장악할 수 없었으며 또 오래도록 적국이 될 러시아 세력과도 싸우게 됩니다.
이렇게 혼란해지자 또 덴마크 역시 스웨덴을 노리개 됩니다. 덴마크는 전통적 적이었을뿐 아니라 칼 10세 구스타프는 정치적 목적으로 홀슈타인-고토로프 가문의 여성과 결혼했는데 홀슈타인-고토로프 가문은 덴마크에서 독립하길 원하고 있었던 가문이었기에 스웨덴의 세력이 강성해지는 것을 덴마크가 지켜보고만은 있을 수는 없었던 듯합니다.
상황이 변하자 일단 칼 10세 구스타프는 덴마크와의 전쟁을 우선시합니다. 그는 이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었죠. 하지만 더 나아가 덴마크와 노르웨이를 병합하려는 목표로 다시 전쟁을 시작하면서 상황은 달라집니다. 이번에는 네덜란드와 오스트리아, 폴란드 등의 지원을 받는 덴마크와의 전쟁에서 패배하게 되죠.
전쟁의 패배 후 칼 10세 구스타프는 다시 한번 전쟁을 통해서 재기를 노리려 합니다만, 감기가 폐렴으로 발전했고 결국 1660년 2월 미성년인 아들 칼이 즉위할 경우를 대비한 섭정단 구성을 승인한 뒤 37살의 나이로 사망하게 됩니다.
그가 죽은 후, 그의 아내이자 강인한 성품으로 알려진 헤드비그 엘레오노라 왕비가 섭정이 됩니다. 그리고 크리스티나 여왕은 사촌이 죽은 뒤 다시 복위하려고 시도했다고 합니다만 스웨덴 귀족들은 그녀를 인정하지 않았었죠.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