덴마크의 공주 울리카 엘레오노라, 칼 11세의 왕비
덴마크의 공주였던 울리카 엘레오노라는 1675년 정치적 목적으로 스웨덴의 국왕이었던 칼 11세와 약혼하게 됩니다. 칼 11세는 스웨덴의 적을 하나라도 줄이길 원했고 숙적이었던 덴마크와의 평화 방안을 모색하기 위해 덴마크 공주와 약혼하려 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둘의 약혼 직후 스웨덴과 덴마크 사이에는 전쟁이 일어나게 됩니다. 원래부터 이 혼담을 탐탁치 않아했던 울리카 엘레오노라의 오빠인 덴마크의 크리스티안 5세는 동생이 스웨덴 국왕과의 약혼을 깨고 다른 남자와 결혼하길 바랬었죠. 전쟁 직후부터 울리카 엘레오노라의 남편감으로 여러명이 거론됩니다. 그중에는 황제 레오폴트 1세도 포함되어있었죠.
졸지에 적국 국왕의 약혼녀가 되어버린 울리카 엘레오노라는 전쟁 기간이 매우 힘든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4년이나 지속된 전쟁기간 동안 울리카 엘레오노라는 약혼을 깨라는 압력에 굴복하지 않았으며 스웨덴 국왕의 약혼녀로써 처신을 했습니다. 스웨덴 포로들을 위해 자신의 개인 재산을 팔아 그들을 도왔는데 그녀의 보석은 물론 심지어 약혼때 받은 약혼반지 마저 저당잡혀서 포로들을 도왔다고 합니다. 또 덴마크가 스웨덴에 승전한뒤 축하연 같은 곳에는 참석하지 않았었죠.
결국 1679년 전쟁은 끝났고 평화조약에 따라 오래도록 기다리던 울리카 엘레오노라는 스웨덴의 칼 11세와 결혼할수 있게 됩니다. 덴마크에서 자선활동에 전념했었던 울리카 엘레오노라는 사랑받던 공주였고 그녀의 오빠인 크리스티안 5세는 결혼하기 위해 덴마크를 떠나는 울리카 엘레오노라에게 그녀가 다른 사람들을 돌보기 위해 저당잡혔던 보석들을 모두 돌려줬다고 합니다.
울리카 엘레오노라에게 스웨덴에서의 삶은 그리 쉬운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녀는 적국이었던 덴마크의 공주였으며 이런 적대감은 스웨덴 궁정에 만연해있었죠. 특히 국왕의 모후였던 헤드빅 엘레오노라 왕비는 덴마크 공주인 며느리를 못마땅하게 생각했었습니다. 게다가 오래도록 섭정으로 있었던 모후는 궁정에서 가장 영향력있는 여성이기도 했었죠.
칼 11세 역시 처음에 울리카 엘레오노라에 대해서 그다지 따뜻하게 대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는 처음 울리카 엘레오노라를 만난뒤 그녀의 외모에 실망했고, 자신이 좀더 아름다운 아내를 얻을수 없었냐고 결혼 협상을 진행한 신하에게 투덜댔다고 합니다. 그러자 그 신하는 "폐하께서는 그분안에 있으신 천사를 보실수 있을겁니다."라고 이야기했다고 합니다.
울리카 엘레오노라는 정치적으로 큰 힘을 쓸수 없다는 것을 알았고 자신의 처지에 맞는 행동을 했었습니다. 그녀는 아마도 오래도록 덴마크와 스웨덴 간의 전쟁을 봐왔고 자신과 칼 11세의 결혼이 평화협정의 일환이라는 것도 잘 알았을 것입니다. 이때문에 스웨덴과 덴마크 사이의 긴장을 완화시키려고 노력했었습니다. 그녀는 결혼직후 덴마크쪽 사람들 대부분을 돌려보내므로써 자신에게 의심을 품을수 있는 스웨덴 사람들을 안심 시켰으며 개인 재산과 궁정등을 사양하고 남편에게 의지하는 겸손한 모습을 보여주므로써 스웨덴 사람들이 자신을 더 신뢰하게 만들었다고 합니다. 울리카 엘레오노라가 홀대받고 있다고 생각한 덴마크 대사가 이에 대해서 불만을 표했을때 울리카 엘레오노라는 이것은 훗날 덴마크와의 문제가 생겼을때 자신의 뜻을 다른 사람들에게 더 잘 이해시키기 위한 것이라고 이야기했고, 덴마크 대사는 이에 대해서 더이상 이야기할수 없었다고 합니다.
비록 칼 11세는 아내에게 충실한 남편은 아니었지만, 울리카 엘레오노라와 칼 11세의 가정생활은 행복하다고 알려져있습니다.시어머니인 헤드빅 엘레오노라가 궁정을 장악하고 있었기에 그녀는 조용히 아이들을 키우고 사적인 생활과 자선사업등을 하는데 더 힘을 썼으며 이때문에 가정적 행복을 추구했을 것입니다. 훗날 칼 11세는 죽기직전 어머니에게 아내가 죽은뒤 더이상 행복을 느낄수 없었다고 말했다고 전해집니다.
하지만 울리카 엘레오노라는 자신을 싫어하는 시어머니와의 관계는 울리카 엘레오노라를 힘들게 했었죠. 기본적으로 헤드빅 엘레오노라 왕비가 며느리를 싫어한것은 정치적 이유때문이었습니다. 울리카 엘레오노라의 사람 됨됨이가 못마땅한것이 아니라 "덴마크 공주"였기 때문이었죠. 이 문제는 울리카 엘레오노라가 해결할수 없는 문제이기도 했습니다. 그녀는 주로 시어머니를 참고 살았었습니다만, 1686년 남편이 수도를 비웠을때 시어머니를 견디지 못하고 짐싸서 수도 스톡홀름을 떠나 다른곳으로 가버리기도 했었습니다. 물론 곧 다시 돌아왔고 계속 참고 살았었긴 하지만 말입니다. 울리카 엘레오노라는 자신의 시어머니에 대해서 "내 결혼생활의 악마"라고 표현할정도였다고 합니다.
울리카 엘레오노라는 직접적으로 정치에 참여할수 없었는데 시어머니는 물론 남편인 칼 11세도 그녀가 정치에 참여하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입니다. 울리카 엘레오노라가 남편에게 정치적 조언을 했을때 칼 11세는 아내에게 자신은 "정치적 조언을 얻기 위해" 그녀와 결혼한것이 아니라고 잘라 말랬었죠. 하지만 울리카 엘레오노라는 다른 방식으로 점차 조용히 영향력을 확대해갔으며 칼 11세는 시간이 지날수록 아내를 어느정도 신뢰하게 되었었죠.
울리카 엘레오노라는 덴마크에서처럼 스웨덴에서도 자선사업에 열중했었습니다. 그녀는 자선사업을 위해 재정이 모자랄때면 자신의 보석등을 서슴차 않고 저당잡혔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과 과부 고아등 먹고 살기 어려운 이들을 위해 구호소를 개설했었습니다. 또 많은 사람들이 의료혜택을 받게 하기 위해 열정을 쏟았었습니다.
울리카 엘레오노라는 결혼후 거의 매년 아이를 낳았으며 이런 상황은 그녀의 건강에 치명적이 됩니다. 1690년대가 되면서 울리카 엘레오노라는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으며 의사들은 그녀가 좀더 따뜻한 지방으로 가서 요양하길 권하죠. 왕비가 독일에 있는 온천에 머물수 있도록 계획이 되었지만 울리카 엘레오노라는 이 계획에 드는 돈을 자선사업에 써버리죠.
결국 1693년 울리카 엘레오노라는 사망합니다. 죽어가면서 그녀는 남편에게 자비심을 보여주는 등의 일을 해달라고 부탁합니다. 그리고 충고 한마디한마디에 대해서 "약속해주실거죠"라고 물었다고 합니다. 또한 자신의 장례식은 검소하게 치루고 그 비용을 가난한 이들을 위해 써달라고 유언했습니다. 아내가 죽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칼 11세는 "내 심장의 반쪽이 떠나 버렸다"라고 말했을 정도라고 합니다.
칼 11세는 아내의 유언과는 달리 화려한 장례식을 치룹니다. 하지만 그와 동등한 비용을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썼죠. 그리고 궁정에 2년간 애도 기간을 선포했으며 이후 그는 재혼하지 않고 살았다고 합니다.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