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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엘아라 Feb 06. 2020

아버지와의 관계

King 이고 싶어했던 Queen : 스웨덴의 크리스티나


크리스티나가 태어난뒤 크리스티나의 어머니인 마리아 엘레오노라의 정신적 육체적 건강상태는 더 나빠지게 됩니다. 특히 그녀는 자신이 아들을 낳았다고 믿었기에 딸을 낳았다는 것을 인정할수 없었고 심지어 자신이 아들을 못 낳은것을 딸의 탓으로 돌리기 까지 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구스타프 2세 아돌프는 아내에게서 또 다른 아이를 얻기 힘들것이라 판단했을 것입니다.


여전히 스웨덴은 적에게 둘러쌓여있었으며, 후계자 문제는 스웨덴의 운명에 중요한 사항이기도 햇습니다. 물론 뒤에라도 적자인 아들이 태어난다면 좋은 일이지만 그럴 가능성이 거의 없게 되자 구스타프 2세 아돌프는 딸을 후계자로 지명할 준비를 합니다. 



구스타프 2세 아돌프


크리스티나는 아기때부터 이런 아버지의 기대에 부흥한 아이였다고 합니다. 일례로 구스타프 2세 아돌프가 2살인 크리스티나를 데리고 한 행사를 간 이야기가 있습니다. 국왕은 어린 딸을 데리고 행사에 참석했는데 그곳 지사는 국왕과 공주를 맞이하기 위해 예포를 쐈다고 합니다. 유아였던 크리스티나는 대포소리에 놀라기는 커녕 그런 큰 소리를 내는 물체에 관심을 보였고 이런 어린 공주의 모습을 본 사람들은 어린 공주가 위대한 군인 아버지를 닮았다는것과 그녀가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화성의 영향을 받고 태어났다는 것을 다시 한번 떠올렸을 것입니다.


1630년 스웨덴은 독일에 대한 선제공격을 결의했고 구스타프 2세 아돌프는 군대를 이끌고 독일로 향하게 됩니다. 독일로 향하기전 구스타프 2세 아돌프는 딸인 크리스티나를 자신의 후계자로 공식적으로 인정했으며 그녀에게 후계자로써 영지를 하사했었습니다.



독일에서의 구스타프 2세 아돌프



구스타프 2세 아돌프는 떠나기전 딸의 양육에 대해 매우 신경을 쓰게 됩니다. 그는 아내인 마리아 엘레오노라가 크리스티나를 제대로 돌보기 어렵다고 판단했으며 이에 가장 신뢰하는 누나였던 카타리나와 이복형인 길렌예름 남작에게 딸의 양육 전반을 맡기게 됩니다. 그리고 딸의 가정교사와 후견인이 될 인물들 역시 신중하게 선택했었습니다. 크리스티나는 훗날 회고록에서 이들에 대해서 "그들은 모두 아버지처럼 애국심이 강한 사람들이었다"라고 이야기했었습니다. 

이들중 첫번째는 구스타프 2세 아돌프의 총신이자 궁정의 총 관리자였던 악셀 바네르였습니다. 악셀 바네르의 아버지는 칼 9세에 의해 처형당했지만 구스타프 2세는 이들 가문을 복권시켰으며 악셀 바네르는 국왕의 총신중 하나가 되었죠. 크리스티나는 그를 별로 좋지 않게 평가했는데 그는 잘생긴 외모였지만 술을 많이 마시는 바람둥이였으며, 그다지 교양있는 있는 인물이 아니었다고 언급했었습니다.

두번째는 구스타프 호른으로 그는 악셀 바네르와 정반대되는 인물이었습니다. 구스타프 호른은 매우 교양있는 인물로 여러 외국어에 능통했으며 외교에 뛰어난 인물이었습니다. 하지만 크리스티나는 그에 대해서 예의에 정통한 만큼 지루한 인물이라고 언급합니다.

세번째는 크리스티나의 가정교사로 크리스티나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쳤던 요하네스 마티에 고투스였습니다. 그는 웁살라 대학의 교수였으며 신학박사였고 국왕의 참모였습니다. 마티에는 매우 엄격한 인물로 절대 나약한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고, 크리스티나는 이런 그를 매우 존경했으며 아마 큰 영향을 받았을 것입니다.



요하네스 마티에 고투스


구스타프 2세 아돌프는 자신이 독일 전장에 있는 동안 내정을 관리할 다섯명의 섭정도 선출합니다. 전통적으로 섭정으로 왕비가 임명되는 경우가 많았지만 구스타프 2세 아돌프는 아내의 상태를 잘 알고 있었기에, 마리아 엘레오노라는 섭정의 지위를 받지 못했었습니다. 구스타프 2세 아돌프가 지명한 다섯명의 섭정은 구스타프 2세 아돌프가 가장 신뢰한 신하였던 악셀 옥센셰르나와 그의 동생인 가브리엘 옥센셰르나 그리고 둘의 사촌인 또 한명의 옥센셰르나와 길렌옐름 남작과 야곱 드 라 가르디였습니다. 야곱 드 라 가르디는 구스타프 2세 아돌프의 첫사랑이었던 에바 브라헤의 남편으로 뛰어난 장군이기도 했습니다.



악셀 옥센셰르나



길렌예름 남작은 칼 9세와 그의 정부 사이에 태어난 아들로 구스타프 2세 아돌프의 이복형이었습니다. 이때문에 길렌예름 남작은 조카였던 크리스티나를 매우 사랑했는데 크리스티나는 훗날 이 백부에 대해서 자신을 "친딸처럼"사랑했다고 회상했었습니다.



길렌예름 남작, 칼 9세의 아들, 크리스티나의 백부



구스타프 2세 아돌프가 독일로 떠났을때 크리스티나는 어린아이였으며, 아버지가 전장으로 떠나는 것의 의미를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저 멀리 여행을 떠난 것정도로만 생각했을 것입니다.이런 상황은 그녀가 아버지에게 보내는 편지에 드러나는데, 크리스티나는 전장에 있는 아버지에게 "선물사오세요"라는 이야기를 합니다.


가장 기쁘고 사랑하는 아버지께

전 폐하와 함께하는 기쁨을 누리지 못하기에, 폐하께 제 초상화를 보내드려요. 폐하께선 이걸 보시고 제 생각에 기쁘시겠죠, 그리고 제게 빨리 답장보내주세요. 그리고 그때 제게 어떤 예쁜것도 보내주실거라 생각합니다.전 항상 착한 아이가 되려하고 점잖게 기도하는법도 배웠습니다.
전 정말 잘 있습니다. 신께 감사드립니다. 아마도 하나님께서 저희에게 언제나 폐하의 좋은 소식만 가져다 주실것이에요. 전 언제나 하나님께 아버지에 대해 기도하고 있어요

폐하의 성실한 딸인
크리스티나 올림.


구스타프 2세 아돌프는 독일에서 매우 성공적이었습니다. 그는 "북방의 사자,신교의 수호자"라는 이름으로 독일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으며, 독일내 영토를 장악해서 스웨덴의 영향력을 크게 확대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그의 성공은 곧 끝나게 됩니다.1632년 뤼첸 전투에서 크리스티나의 아버지이자 스웨덴의 위대한 국왕은 전사합니다. 이때 크리스티나는 겨우 여섯살이 안된 나이였죠. 


뤼첸전투에서의 구스타프 2세 아돌프


역사에서는 "만약"이라는 이야기는 무의미합니다. 왜냐면 이미 일어난 일들을 다루기 때문이죠. 하지만 크리스티나의 이야기에서 구스타프 2세 아돌프의 죽음은 늘 만약을 생각하게 합니다. 만약 구스타프 2세 아돌프가 크리스티나가 성년이 될때까지만이라도 살아있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죠.

구스타프 2세 아돌프는 뛰어난 인물이었으며 아마도 딸이 성년이 될때까지 살아있었다면 자신의 후계자인 딸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줬을 것입니다. 크리스티나 역시 똑똑한 인물이었으며 아마도 뛰어난 아버지의 가르침을 받았다면 그녀가 훨씬더 좋은 여왕이 되었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또 구스타프 2세 아돌프가 오래도록 살았다면, 그는 딸을 적당한 남성과 결혼시켜서 후계자를 얻으려 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랬다면 크리스티나 역시 자신이 "여성"이라는 사실에 좌절하지는 않았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녀는 여성으로써의 자신의 역할을 그대로 수용했을수 있죠. 어쩌면 당대 모두의 바람대로 사촌이었던 칼 10세 구스타프와 결혼해서 그와 함께 스웨덴을 통치했을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해본다면, 결국 크리스티나의 기이한 삶은 위대한 아버지의 때이른 죽음으로부터 시작된다고 할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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