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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엘아라 Feb 06. 2020

성장

King 이고 싶어했던 Queen : 스웨덴의 크리스티나

크리스티나는 고모인 카타리나의 집에서 고종 사촌들인 팔츠-츠바이브뤽켄 공작 가문 사람들과 함께 자랐으며, 크리스티나는 가정적으로 어느정도 평안함을 누렸을 것입니다.  그리고 만약 카타리나가 좀더 오래 살았다면 크리스티나는 어쩌면 좀 더 평범한 여성의 역할을 받아들였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카타리나는 1638년 크리스티나가 12살무렵에 사망합니다. 



크리스티나의 고모 카타리나


고모가 죽은뒤 크리스티나의 양육에 대한 문제가 다시 발생하죠. 이에 악셀 옥센셰르나는 네명의 여성을 선택해서 어린 여왕의 양육을 담당하게 합니다. 이 네명의 여성들은 모두 고위귀족이었는데 양육을 위해 네명이 선택된 이유는 정치적 이유여서였습니다. 만약 어린 여왕이 "양어머니" 한사람에게 애정을 가진다면,나중에 여왕이 성인이 된후 그 양어머니와 그 친척들에게 특권을 부여할수도 있었기 때문이었죠. 이렇기에 신중하게 네명의 여성들이 선택되었다. 여왕의 양육을 담당할 여성으로 선택된 네명의 여성은 크리스티나 나트 오 닥Christina Natt och Dag, 에바 레이욘후프푸드Ebba Leijonhufvud, 베아타 옥센셰르나(Beata Oxenstierna, 에바 리닝Ebba Ryning이었습니다.


이들은 자신들의 임무를 충실히 수행했었던듯했는데 그결과 크리스티나는 이 네명의 "양어머니들"에 대해 어떤 애정어린 표현이나 회상등을 남기지 않았습니다. 결국 이런 성장 과정은 크리스티나가 "여성"으로써 감정을 나누고 교류할만한 사람이 없었다는 것을 의미했으며 성장해가면서 남성적 교육을 받은 크리스티나가 스스로가 당대 여성들에게 바래지던 규범은 물론 사람을 대하는 감정조차도 익숙하지 않게 되었음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아마도 이런 상황이야 말로 크리스티나가 주변의 다른 여성들에 대해서 대할때 마치 남성들이 하듯이 여성들을 대했을 것이며 이것은 크리스티나가 "동성연애자"라는 이야기를 듣게 되는 중요한 요인중 하나일 것입니다.


14세의 크리스티나 여왕


1644년 크리스티나가 성년이 되어 친정을 하기 전까지, 스웨덴은 구스타프 2세아돌프가 지정했던 섭정단을 중심으로 하는 귀족들이 이끌어 나갔고 그 중심에는 악셀 옥센셰르나가 있었습니다. 악셀 옥센셰르나는 크리스티나의 교육에도 힘을 쓰게 되는데 그는 자신의 군주였던 구스타프 2세 아돌프가 남긴 혈육이자 이제 자신의 여왕이 된 크리스티나가 훌륭하게 성장하길 바랬고 그렇게 만드는 것이 자신의 사명이라고 여겼을 것입니다. 악셀 옥센셰르나는 스스로 여왕에게 정치를 가르쳤습니다. 내정에 매우 뛰어났던 그가 여왕을 직접 가르쳤다는 것은 그만큼 기대가 컸다는 의미이기도 했죠. 뿐만 아니라 여왕의 학문적 소양은 당대 스웨덴 최고의 학자중 하나였던 요하네스 마티에 고투스가 맡았습니다. 그는 여왕에게 언어와 신학 철학등을 가르쳤는데 특히 그는 절대 꺽이지 않는 강인한 의지를 가지고 있는 인물이었으며, 여왕은 이런 그를 존경하고 따랐으며 그의 훈육을 받아들였습니다. 이때문에 훗날 여왕의 꺽일줄 모르던 강인한 의지는 요하네스 마티에 고투스의 교육의 결과라는 이야기까지 있을 정도였습니다.


악셀 옥센셰르나는 물론 다른 스웨덴의 많은 귀족들이 기뻐할만하게도, 크리스티나는 매우 영리하고 정치적으로도 군사적으로도 감각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바사 가문의 남자들은 대부분 군인으로써의 능력이 뛰어났으며 그중 제일 뛰어난 인물이 바로 크리스티나의 아버지였죠. 이런 아버지의 딸이었던 크리스티나 역시 정치적 군사적인 안목이 어린시절부터 탁월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이를테면 1641년 요한 바네르가 사망했을때, 크리스티나는 스웨덴군의 상태를 매우 걱정했다고 합니다. 그녀는 요한 바네르의 죽은 뒤 스웨덴 군의 상황이 그녀의 아버지인 구스타프 2세 아돌프가 전사한 직후처럼 군의 세력이 약화될것을 걱정했었고 크리스티나의 걱정은 현실이 되었습니다. 겨우 열다섯살의 여왕이 상황을 정확히 인식하고 그에 대한 예측을 할수 있는 통찰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아마도 스웨덴 귀족들 특히 악셀 옥센세르나에게는 매우 기쁜 일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악셀 옥센셰르나는 어린 여왕이 자신의 뜻과는 다른 방향으로 국정을 운영하려한다는 것을 생각하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 이것은 크리스티나가 친정을 한뒤 귀족들과 마찰을 빚게 되는 계기중 하나가 됩니다.


악셀 옥센셰르나


1644년 크리스티나는 성년이 되었으며 이제 그녀는 친정을 시작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녀가 친정을 시작하는 동시에 스웨덴의 귀족들은 이제 성년이 된 여왕이 결혼을 해서 후계자를 낳는 의무를 다하길 바라게 되죠. 어린시절부터 여왕이었으며 군주로 교육받았던 크리스티나에게 결혼에 대해서 매우 부정적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당대에 여성들은 남성들에게 종속된 삶을 살고 있었고 이것은 여왕이라도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여성 군주가 결혼을 하면 그와 동시에 그녀의 남편이 아내의 권리를 통해서 통치행위를 했으며 심지어 아내보다 더 우위에 서는 경우도 종종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은 스스로 군주임을 자각하고 있던 크리스티나에게는 자신의 권리를 남편이라는 이유만으로 뺏는 것일수도 있다고 느꼈을 것이입니다. 크리스티나는 훗날 "나는 다른이에게 종속되지 않을 것이다"라고 이야기하면서 자신이 결혼을 거부한 이유를 밝히고 있죠.


물론 크리스티나에게 로맨틱한 상대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크리스티나는 어린시절부터 고종사촌이었던 팔츠-츠바이브뤽켄의 칼 구스타프를 잘 알고 지냈으며 사춘기 시절에는 그를 사랑한다고 생각하기도 했었습니다. 또 여왕이 진정으로 마음에 두고 있던 남자였던 마그누스 드 라 가르디도 있었습니다.  마그누스 드 라 가르디는 야곱 드 라 가르디와 에바 브라헤의 아들로 그의 어머니와 크리스티나의 아버지가 한때 사랑하는 사이였었기도 했었습니다. 마그누스 드 라 가르디는 잘생긴 외모에 매너가 매우 좋았으며 젊은 여성들이 좋아할만한 남자였습니다. 여왕 역시 그에게 매료당했지만, 결국 그를 총신으로 두는 것으로 만족했습니다. 여왕은 자신의 사촌인 팔츠-츠바이브뤽켄의 마리아 유프로신도 그를 마음에 두고 있는 것을 알자 그녀와  마그누스 드 라 가르디를 이어줬다고 합니다.


마그누스 드 라 가르디


크리스티나가 결혼을 거부했으며, 남자들이 입는 옷을 입고 외모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으며 당대 여성들에게 요구되던 예의범절을 전혀 지키지 않았고, 자신의 시녀였던 에바 스파레에게 매우 다정한 편지를 보내는등의 행동때문에 크리스티나를 종종 동성연애자로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여왕이 결혼을 거부한 것은 단순히 그녀가 남자가 싫거나 자신이 스스로가 여성의 역할을 거부하기 때문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녀는 군주로써 자신의 권한을 제한 받는 것이 싫을 것입니다. 또 외모에 신경을 쓰지 않고 여성들에게 요구되던 예의 범절을 안중에 두지 않았던 것은 그녀가 어린시절부터 남성들에게서 남성들의 역할이라고 여겨졌던 군주로써 교육을 받았다는 간과해서는 안됩니다.  이것은 크리스티나가 여성으로써 익혀야할 것보다 군주로써 익혀야할 것들을 우선으로 배웠다는 것을 의미했고 이것은 그녀가 당대 여성들의 생활에 익숙치 않고 도리어 남성들의 생활에 더 편안함을 느끼게 했을 것입니다. 


 또 에바 스파레에게 한 행동은 어린시절부터 주변에 애정을 나눠야하는 여성들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던 크리스티나가 주변 여성들에게 자신의 애정을 표현하는 방식이 결국 남성들의 표현방식을 따를수밖에 없었으며 이것은 앞에서 말한 그녀의 양육환경과 연결되는 것이기도 했습니다.실제로 크리스티나는 한번도 만나지 않은 여성에게 보내는 편지도 마치 애인에게 보내는 편지처럼 쓰고는 했었다고 합니다.


에바 스파레, 크리스티나의 시녀, 에바 스파레는 마그누스 드 라 가르디의 동생인 야곱 카시미르 드 라 가르디와 결혼했었습니다.


사실 당대 사람들 특히 스웨덴 귀족들에게는 크리스티나가 동성연애자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군주로써 후계자를 얻어야하는 의무를 여왕이 잊지 않는 것이 중요했죠. 이것은 남성군주였던 여성군주였던간에 상관없이 해야하는 의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크리스티나는 결혼할 마음이 없었으며 결국 군주로써의 의무를 수행하지 않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이것은 용납될수 없는 일이었으며 만약 크리스티나에게 후계자가 생길 가능성이 없다면, 스웨덴 귀족들은 크리스티나가 아닌 다른 귀족을 국왕으로 추대할 가능성 역시 충분히 있었다. 

결국 크리스티나는 자신의 자유를 보장하기 위해 결혼하기전 후계자 문제부터 확정짓게 됩니다. 크리스티나는 자신에게 자녀가 없을 경우 왕위계승자로 사촌인 팔츠-츠바이브뤽켄의 칼 구스타프를 지목합니다. 그는 모계를 통해서 구스타프 바사의 후손이자 칼 9세의 후손이었으며 루터파이기도 했기에 크리스티나가 왕위에 오를수 있었던 스웨덴의 국왕이 되는 조건에 부합했죠.

 하지만 귀족들은 이에 반발했는데 가장 큰 이유가 칼 구스타프가 비록 스웨덴에서 살았지만 그는 독일 출신의 외국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외국인 군주의 통치에 대해서 과민하게 반응을 보이는 스웨덴 귀족들이 그를 탐탁치 않게 여기는 것은 어쩔수 없었죠. 하지만 크리스티나는 칼 구스타프를 후계자로 만들기로 결정했고 의회에서 귀족들을 제외한 다른 계층의 지지를 얻어서 그를 자신의 후계자로 만들게 됩니다.


팔츠-츠바이브뤽켄의 칼 구스타프, 크리스티나의 고종사촌, 스웨덴의 칼 10세 구스타프



크리스티나는 1650년 스웨덴의 국왕으로 대관식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의 사촌인 칼 구스타프를 자신의 후계자로 만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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