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투레 살해사건
스웨덴의 구스타프 1세 통치기간 내내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노력을 했었습니다. 스웨덴은 독립한지 얼마 되지 않는 나라였으며 이 때문에 귀족들의 세력이 왕권보다 상대적으로 매우 강했습니다.
하지만 구스타프 1세 치세 막바지에 달하면서 그는 네 명의 아들들에게 스웨덴 내의 영지를 분배했으며 아들들이 공작령의 독립된 군주가 되는 것을 허용하게 됩니다. 이런 상황은 그가 이제까지 귀족세력을 억누르고 스웨덴을 통합하려 했던 것과는 대조적인 일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은 후에 에릭과 그의 형제들이 불화를 빚는 중요한 계기가 되죠.
구스타프 1세의 장남인 에릭은 1560년 의회에서 왕위 계승자로 인정받게 됩니다 그리고 아버지가 사망한 뒤 26살의 나이로 스웨덴의 국왕 에릭 14세로 즉위하게 됩니다.
에릭 14세는 역시 아버지처럼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작업을 시작합니다. 하지만 귀족들은 그의 행동에 불만을 품게 되죠. 에릭은 동생들의 독립된 군주령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서 아버지가 부여했던 공작령에 대한 통치권을 인정하지 않았죠. 이것은 왕권 강화에는 당연한 일이었습니다만, 이미 아버지 생전부터 사이가 나빴던 동생들, 특히 요한과는 매우 사이가 어긋나게 됩니다.
에릭의 어머니가 외국 왕가의 왕녀였던 것과는 달리 요한의 어머니는 스웨덴 강력한 귀족 가문 출신이었기에 요한은 외가의 세력을 등에 업을 수 있었죠. 이런 상황은 에릭에게는 아마도 심각한 상황으로 판단되었을 것입니다. 게다가 요한은 에릭의 정책에 반하는 행동을 함으로써 에릭의 심기를 건들게 됩니다. 결국 에릭은 동생인 요한을 투옥하기에 이르게 됩니다.
하지만 끔찍한 사건은 1567년에 일어나죠.
에릭은 귀족들이 자신에 대해서 음모를 꾸민 것을 알고는 핵심 귀족들을 투옥합니다. 하지만 투옥 후 끔찍한 일이 발생합니다. 에릭은 동생인 요한이 자신에 대해서 반란을 꾸미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그를 해치려 한 귀족들은 요한과 친척 관계인 인물들이 많았죠. 에릭은 특히 요한의 이모인 매르타 레이욘후프 드가 시집 간 스투레 가문을 주목했습니다. 스투레 가문은 사실 바사 가문이전에 스웨덴의 독립을 주도했었던 가문이었기에 영향력이 매우 컸었습니다.
그리고 1567년 5월 24일 에릭은 웁살라로 가서 귀족들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그는 거기서 자신의 병사들과 함께 귀족들을 살해합니다. 여기에는 요한의 이모부였던 스반테 스투레와 그의 두 아들이 포함되었죠.
이 사건 직전 에릭은 동생인 요한이 반란을 일으키려 한다는 소식을 들었다고 합니다. 이에 격분한 나머지 음모를 꾸몄던 귀족들을 죽인 것일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이 상황은 비정상적 상황이었으며 국왕의 상태가 정신 착란에 가까운 상황이었다고 합니다. 왜냐면 흥분한 국왕을 진정시키려던 국왕의 가정교사 역시 국왕에 의해서 살해당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상황은 매우 비정상적이었기에 결국 국왕의 새 어머니 이자 당시 궁정에서 가장 높은 지위를 가졌던 카타리나 스텐보크가 웁살라로 왔었다고 합니다. 카타리나는 이 사건을 정리하고 에릭은 자신과 귀족들을 살해했던 사람들의 용서를 구했고 유족들에게 보상금을 지급하죠.
에릭은 광증으로 인해서 거의 반년 간 국정에 관여하지 못합니다. 에릭의 동생인 요한은 이때쯤 풀려나게 되죠. 불만 많은 귀족들은 제정신이 아닌 국왕에 대해서 의심의 눈초리를 보냈으며 요한 역시 형에 대해 반란을 계획합니다.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