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인 에릭 14세로부터 왕위를 뺏은 요한 3세는 역시 형이나 아버지처럼 왕권강화에 힘을 쓰게 됩니다. 아마도 형을 지지한 귀족들부터 권력을 뺏았고 이후에는 주변의 귀족들에게서도 권력을 뺏으려 했습니다. 이런 상황은 스웨덴에서 이후에도 자주 볼 수 있는 상황인데 이때쯤에는 왕권이 좀 더 강했을듯합니다.
이런 상황과 더불어 요한 3세 시대에는 종교적 문제도 복잡하게 돌아갑니다. 구스타프 바사는 루터파를 받아들임으로써 스웨덴을 신교 국가로 만들려 했습니다. 하지만 그때까지도 여전히 가톨릭의 세력이 남아있었을 뿐만 아니라 같은 신교내에서도 조금씩 다른 종파들로 나뉘었죠.
하나의 단일한 종교가 국가 내에서 존재하는 것이 통일 국가로써 왕권강화에 더 유리했을듯합니다. 이 때문에 요한 3세는 스웨덴의 종교를 하나의 단일 종파로 묶으려 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런 상황은 도리어 성직자들의 반발을 초래했었죠.
재미 난 것은 요한 3세의 정책이 초기에는 가톨릭에 더 호의적이었으며 후에는 신교에 더 호의적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그의 두 아내와 연결이 된다고 합니다.
요한 3세는 왕위에 오르기 전 외국의 왕녀와 결혼합니다. 카타리나 야겔로니카라는 이름의 여성이었죠. 야갤론 가문은 원래 리투아니아 대공령을 다스리던 가문으로 14세기부터는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왕국의 왕위를 가지고 있었던 가문이었죠. 그녀는 폴란드의 국왕이었던 지그문트 1세의 딸이기도 했습니다. 아마도 자신의 권위를 위해 외국의 유력왕가와 결혼을 추진했었는데 당시 폴란드는 강대국이었으며 이런 폴란드의 공주와 결혼한 것은 요한에게 큰 이득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요한과 카타리나의 결혼은 요한과 에릭 14세의 반목을 더한 것으로 결국 에릭 14세는 병사들을 보내 요한의 성을 함락시켰고 요한과 카타리나를 그립스홀름성에 유폐시킵니다. 이때 카타리나는 남편과 함께 머물렀는데 에릭 14세는 카타리나를 폴란드에 대한 인질로 여겼다고 합니다. 스투레 살해사건 뒤에 요한과 카타리나는 풀려났고 요한은 1568년 국왕이 되었죠.
함께 이런 고생을 했기에 요한과 카타리나는 서로에게 매우 성실한 부부관계를 유지합니다. 가톨릭이었던 카타리나를 위해 요한 3세는 카타리나가 가톨릭 교도들로 구성된 그녀의 궁정을 꾸리는 것을 허락했었죠. 뿐만 아니라 카타리나는 점차 요한에게 정치적 영향력을 강화했었습니다. 외교적으로 가톨릭 국가들과 친교를 이뤘으며 로마에 있는 교황에게 사절을 보내기도 했었죠. 또 아들이자 왕위 계승자인 시기스문드를 예수회의 수도원으로 보내 가톨릭으로 교육시키는 등의 일을 합니다.
이런 상황은 요한 3세의 정책이 가톨릭에 많이 호의적으로 비칠 수 있었으며 결국 많은 루터파 성직자들의 반발과 이탈을 가져오게 되죠.
하지만 카타리나 야겔로니카는 1583년 갑작스럽게 사망했습니다.
아내가 죽은 뒤 반년 뒤 요한 3세는 두 번째 아내감을 고르려 합니다. 그는 이제는 더 이상 외국 왕녀를 아내로 맞을 생각이 없었습니다. 첫 번째 아내가 죽은 뒤 요한 3세는 공공연하게 자신은 아름다운 여성을 두 번째 아내로 맞을 거라고 이야기했었는데, 그는 외국 왕녀의 초상화는 믿을 수가 없다고 생각했었고 자신의 눈으로 본 아름다운 여성과 결혼할 것이라고 이야기했다고 합니다. (결국 카타리나 야겔로니카가 별로 안 예쁘다는 이야기?)
요한 3세가 첫 번째로 고려한 여성은 시리드 브라헤로 브라헤 가문은 늘 스웨덴에서 영향력이 강한 귀족 가문이었죠. 하지만 브라헤 가문의 영향력이 증대될 것을 우려한 사람들의 반대로 결국 어린 시절 부모를 잃고 궁정에서 요한 3세의 딸인 안나의 놀이 상대였으며 이때는 카타리나 스텐보크의 시녀였던 구닐라 비엘케를 왕비감으로 결정하게 됩니다. 구닐라 비엘케는 매우 아름다운 여성으로 요한 3세는 그녀를 잘 알았을듯합니다.
구닐라 비엘케와의 결혼은 순타치 않았는데 먼저 구닐라 비엘케가 국왕과의 결혼을 원치 않았다고 합니다. 그녀는 이미 약혼자가 있었기 때문이었죠.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구닐라는 국왕의 청혼을 거절했는데 이때 화가 난 국왕이 자신의 장갑으로 그녀의 뺨을 때렸다고 합니다. 하지만 구닐라의 친척들은 이익을 위해 그녀와 국왕의 결혼을 결정하죠. 또 국왕의 누이들과 동생인 칼은 이 결혼을 반대했는데 귀족과의 결혼은 옳지 않다고 여겼다고 합니다. 자신들의 어머니 역시 귀족 출신이었는데 말입니다.
1585년 요한 3세와 구닐라 비엘케는 정식으로 결혼했고 다음날 구닐라는 스웨덴의 왕비로 대관하게 됩니다. 이 결혼 이후 요한 3세와 요한의 동생인 쇠데르만란드 공작 칼과의 사이는 더 멀어지게 됩니다.
구닐라 비엘케는 왕비로서 요한 3세에게 정치적으로 강한 영향력을 행사했습니다. 이전의 왕비였던 카타리나 야겔로니카가 가톨릭에 열성적이었다면, 구닐라 비엘케는 신교에 열성적인 인물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은 후대의 요한 3세의 종교 정책이 좀 더 신교에 호의적이었던 것과 연결이 될 것입니다.
구닐라 비엘케는 요한 3세에게 너무나 많은 영향력을 행사했는데 자신의 가문 사람들에게 여러 특권을 줬고 이런 상황은 귀족들의 반발을 가져오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