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족들 이야기로 보는 스웨덴의 역사
스웨덴이 단일 국가로 완전히 정착한 것은 아마도 구스타프 바사가 독립운동에 성공해서 국왕으로 즉위한 이후일듯합니다. 사실 이전의 스웨덴의 역사는 덴마크, 노르웨이와 함께 복잡한 역사를 이루게 됩니다. 특히 구스타프 바사가 국왕이 되기 전 "칼마르 연합"이라는 형태로 세 나라가 한명의 군주에 의해서 통치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상황은 결국 스웨덴이 독립을 쟁취하게 되는 복잡한 결과를 낳게 됩니다. (이게 배경지식이 좀 많이 알아야 하는데 여기에서 쓰기에는 뭐랄까 너무 길고 복잡한 역사를 이야기해야 하거든요. 결정적으로 제가 완벽하게 그 상황에 대해서 이해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서 말입니다. 스웨덴 파트를 따로 본 것이 아니라 주로 덴마크 국왕이었던 칼마르 연합의 군주들에 대해서만 좀 봤었거든요.)
구스타프 바사가 독립한 스웨덴의 국왕이 된 뒤, 그의 결혼 문제는 상당히 중요한 문제가 됩니다. 독립 직후였기에 나라 자체가 불안정했으며 왕실의 권위도 약했기에 구스타프 바사는 "스웨덴의 국왕"에게 걸맞은 아내를 맞이해야 했었습니다. 일반 백성들은 국왕이 스웨덴 여성과 결혼하길 바랬었지만 의회는 국익을 위해 외국 왕가의 여성과 결혼하라고 충고했다고 합니다.
오래도록 여러 여성이 신부 후보가 되었고 결국 선택된 여성은 작센-라우엔부르크의 카타리나였습니다. 작센-라우엔부르크는 개신교 국가였고 구스타프 바사는 스웨덴을 완전히 개신교 국가로 자리 잡게 하길 원했기에 작센-라우엔부르크와의 동맹은 좋은 것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카타리나의 언니였던 도로테아는 당시 덴마크의 왕위 계승자와 약혼 중이었기에 카타리나와 결혼하는 것은 덴마크와의 관계에도 좋은 영향을 줄 것이라 여겨졌었죠.
1531년 9월 열여덟 살의 작센-라우엔부르크의 카타리나와 35살의 구스타프 바사를 결혼식을 올렸고 결혼식 당일 카타리나는 스웨덴의 왕비로 대관합니다. 그리고 둘 사이에는 아들인 에릭이 태어나죠.
정략결혼이었던 둘의 결혼생활은 불행했었다고 합니다. 카타리나는 우울하고 변덕스러웠으며 남편에게 충실하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오는데 아마도 이것은 그녀가 남편에게 불만을 품었고 이런 불만이 행동으로 나왔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하지만 카타리나는 결혼 4년 만에 갑작스럽게 사망합니다. 이에 대해서 소문들이 무성했는데 특히 구스타프 바사가 아내의 부정을 의심했고 결국 아내를 도끼로 죽였을 것이라는 이야기가 파다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카타리나의 죽음은 아이를 유산한 것 때문이었으며 카타리나의 죽음에 대해서는 그녀의 형부인 덴마크의 크리스티안 3세의 기록에 잘 나타나 있다고 합니다. 크리스티안 3세가 스웨덴을 방문한 동안 카타리나는 유산을 했고 결국 사망에 이르렀기 때문입니다.
구스타프 바사는 첫 번째 아내가 죽은 뒤 두 번째 아내는 스웨덴 귀족 출신의 여성과 결혼합니다. 아마도 외국 여성과의 정략결혼이었던 첫 결혼에서 행복을 얻지 못했기에, 스웨덴 여성과의 결혼을 선택했을 것입니다. 또 정치적인 목적도 있었는데 스웨덴의 귀족 여성과 결혼함으로써 스웨덴 귀족들 사이에 자신의 세력을 확고히 하려 했었습니다.
1536년 10월 40살의 구스타프 바사는 20살의 마르가레타 에릭스도 테르 레이욘후푸드와 두 번째 결혼을 하고 결혼 다음날 마르가레타는 스웨덴의 왕비로 대관합니다. 레이욘후푸드 가문은 스웨덴의 강력한 귀족 가문 중 하나였다고 합니다.
원래 마르가레타는 다른 스웨덴 귀족이었던 스반테 스투레와 약혼한 사이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구스타프 바사는 그 약혼을 깨게 하고 마르가레타와 결혼한 것이었죠. 이 때문에 전해져 오는 이야기가 하나 있습니다.
결혼한 직후 어느 날 마르가레타는 자신의 전 약혼자인 스반테 스투레와 단 둘이 있었다고 합니다. 우연히 그 광경을 목격한 구스타프 바사는 아내의 부정을 의심해서 아내에게 가서 둘이 무엇을 한 것이냐고 따졌다고 합니다. 그러자 마르가레타는 자신의 전 약혼자가 자신의 여동생인 매르타와의 결혼을 허락해달라고 왔었다고 이야기하죠. 국왕은 당연히 그 결혼을 허락했고 이렇게 마르가레타의 여동생인 매르타 레이욘후푸드와 스반테 스투레가 결혼했다고 합니다.
이 일화에서 보듯이 마르가레타는 불행했던 첫 번째 결혼을 기억하고 있던 남편을 잘 다독일 줄 아는 여성이었을 것입니다. 그 결과는 행복한 결혼생활이었고요. 마르가레타와 구스타프 바사는 15년 동안 10명의 아이를 낳고 행복하게 살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 15년의 행복한 결혼생활 뒤 마르가레타는 병으로 사망합니다. 아마도 끊임없이 아이를 낳았기에 그녀의 몸은 약해졌을 것이며 그 결과 폐렴에 걸려서 사망하게 되죠.
50대 후반이 된 구스타프 바사는 두 번째 아내가 죽었을 때 아홉 명의 아이들이 있었으며 장남인 에릭은 열일곱 살이었지만 막내인 칼은 겨우 한 살이었죠. 구스타프 바사는 처음에는 처제들의 도움으로 아이들을 돌보게 됩니다만 곧 다시 재혼하기로 결심하게 됩니다. 그리고 첫 번째 아내 때처럼 일 년의 애도기간이 끝난 뒤 결혼하게 됩니다.
구스타프 바사의 마지막 결혼은 최악의 선택이었습니다. 구스타프 바사는 서둘러 신붓감을 구했는데 아내가 죽은 육 개월쯤 후에 벌써 다음 신붓감을 찾았죠. 그가 선택한 인물은 두 번째 아내의 조카였던 열여섯 살의 카타리나 스텐보크였습니다. 국왕과 결혼으로 인해서 이익을 챙길 카타리나의 가족들을 제외한 많은 사람들이 이 결정에 경악했다고 합니다. 50대 중반의 남자가 겨우 16살의 여자와 결혼한다는 것 자체가 모두에게 충격이었으며 또 정치적으로도 이미 권력을 누리고 있던 구스타프 바사의 처가 쪽 식구들이 더 많은 이익을 얻게 되는 일이었기 때문이죠.
정치적 문제 때문에 의회가 반대했으며, 종교적인 이유 때문에 교회도 반대하게 됩니다. 아내의 조카는 너무 가까운 근친이라는 이유 때문이었죠. 하지만 구스타프 바사는 이에 개의치 않고 결혼을 밀어붙였으며 결국 교회와 의회는 결혼을 승인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1552년 8월 구스타프 바사는 카타리나 스텐보크와 결혼했으며 다음날 카타리나는 스웨덴의 왕비로 대관합니다.
둘의 결혼식날 스웨덴에서는 페스트 때문에 도시 하나를 불태웠으며, 구스타프와 카타리나가 스톡홀름으로 입성하던 날 역시 또 다른 도시가 불태워졌는데 그 불길을 스톡홀름에서도 볼 수 있었다고 합니다. 구스타프와 카타리나의 결혼생활은 매우 불행했는데, 후에 앞의 두 사건은 둘의 불행한 결혼생활의 징조였다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였습니다. 불행한 결혼생활을 가장 큰 이유는 둘 사이의 나이차가 너무 컸었던 것 때문이라고 전해집니다. 비록 카타리나 스텐보크는 남편과는 불행했지만, 사촌이자 의붓자녀들이었던 구스타프 바사의 아이들과는 잘 지냈다고 합니다.
구스타프 바사는 세 번 결혼했으며 그중 두 번은 매우 불행한 결혼이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는 자식들이 커가면서 불행한 결혼보다 더 불행한 자식들간의 반목이 싹트는 것을 지켜봐야 했었죠.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