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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엘아라 Nov 12. 2023

단 하루라도 왕비가 될래 :  루이자 데 구스망

왕족들 이야기로 읽는 포르투갈의 역사...열네번째

주앙 4세의 왕비인 루이자 데 구스망은 원래 에스파냐 최고위급 귀족 가문 출신이었습니다. 그녀는 자신과 남편의 가문에 이익을 위해서 행동했었으며 또한 왕비에게 요구되는 당대 도덕적 개념을 그대로 따랐던 여성이기도 했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그녀의 삶은 아마도 정치적 문제로 실제 그녀보다 더 강인하게 묘사되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합니다.     


루이사 마리아 프란시스카 데 구스만 이 산도발은 에스파냐 최고 귀족 가문중 하나였던 구스만 가문 출신으로 아버지는 8대 메디나 시도니아 공작이었던 마누엘 페레스 데 구스만 이 실바였고 어머니는 후아나 로렌사 고메스 데 산돌발 이 데 라 크레다로 바로 펠리페 3세 시절 최고의 권력을 누렸던 1대 레르마 공작의 딸이기도 했습니다.      


루이사 데 구스만 이 산도발, 포르투갈의 왕비


메디나 시도니아 공작 가문은 14세기 카스티야의 후안 1세로부터 작위를 수여받았던 니에블라 백작 후안 알론소 데 구스만의 후손으로 안달루시아의 가장 오래되고 영향력 있는 귀족 가문이었습니다. 특히 루이자의 할아버지였던 7대 메디나 시도니아 공작 알론소 페레스 데 구스만은 스페인의 무적함대의 사령관으로 유명한 인물이었습니다. 또 루이자의 할머니인 아나 데 실바 이 멘도사는 에볼리 공의 딸로, 아나의 어머니인 에볼리 공비 아나 데 멘도사는 한쪽눈이 보이지 않았지만 매력적인 여성으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알론소 데 구스만, 루이자의 할아버지


이렇게 에스파냐 최고의 귀족 가문 출신이었던 루이자는 1633년 포르투갈 최고위 귀족이었던 브라간사 공작 주앙과 결혼합니다. 이 결혼은 이베리아 반도 내의 여러 귀족가문들의 연합을 이어받은 것으로, 특히 당시 포르투갈이 독립을 점차 원하는 상황에서 귀족들을 여전히 연합으로 묶어놓기 위한 올리바레스의 정책중 하나이기도 했었습니다.      


주앙 4세


올리바레스는 메디나 시도니아 공작 가문의 후손으로 3대 공작 후안 알폰소 데 구스만의 증손자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올리바레스는 루이자의 외할아버지인 레르마 공작을 궁정 음모로 몰아냈기에 올리바레스는 레르마 공작과 동맹을 맺은 메디나 시도니아 공작 가문과는 그다지 사이가 좋지 않았을수 있습니다. 하지만 상황은 언제나 바뀔수 있었으며 브라간사 공작을 묶어두기 위해서 같은 가문이었던 메디나 시도니아 공작 가문과 통혼을 주선했을 것입니다. 올리바레스 역시 메디나 시도니아 공작 가문의 방계 가문 출신이었기에 같은 가문인 메디나 시도니아 공작 가문에 도움이 되는 것은 좋다고 여겼을 것입니다.     


브라간사 공작 주앙은 아마 이 결혼에 대해서 안달루시아쪽의 가문들과 연결고리를 강화하는 것으로 받아들였을 것입니다. 이전에 이미 16세기초 3대 메디나 시도니아 공작의 딸과 브라간사 공작이 결혼했었으며, 또한 주앙의 어머니 역시 안달루시아쪽 귀족 가문과 연결고리가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아나 데 벨라스코 이 기론, 브라간사 공작부인, 주앙 4세의 어머니


하지만 이런 연결고리도 결국 포르투갈이 독립하는 것을 막을수 없습니다. 결국 1640년 12월 브라간사 공작 주앙은 포르투갈의 국왕 주앙 4세가 되었으며, 루이자는 이제 포르투갈의 왕비가 됩니다. 루이자는 왕비가 된 뒤 당대 왕비의 덕목이었던 남편에게 순종적이며, 궁정을 다스리고 후계자가 될 자녀들을 낳는 일을 충실히 수행했습니다.      


1656년 남편 주앙 4세가 죽고 아들인 아폰수 6세가 왕위에 오릅니다. 아폰수 6세가 즉위했을 때 미성년이었지만, 아폰수 6세에게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어서 이미 통치하기 힘든 상황이었다고 합니다. 물론 이런 상황은 감춰야했는데 가장 큰 이유는 에스파냐 합스부르크는 여전히 포르투갈 왕위를 두고 브라간사 가문과 다툼을 하고 있었기에 주앙 4세가 죽고 아들인 아폰수 6세가 왕위를 잇는 것은 브라간사 가문이 포르투갈의 왕위를 장악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했기에 중요한 상황이었습니다. 일단 아폰수 6세는 미성년이었고 자연스럽게 섭정이 필요했기에 그가 통치행위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감출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주앙 4세의 유언에 따라서 루이자가 섭정이 됩니다.


아폰수 6세


루이자가 섭정이 되면서 정치적으로 좀 더 중요성이 강조됩니다. 전쟁중인 나라에 여성인 루이자가 섭정이 되는 것은 애매한 상황일수 있었고 또한 에스파냐의 마지막 포르투갈 총독이 여성이었던 사보이의 마르거리타였다는 것 역시 여성 통치자에 대한 나쁜 인식이 남아있을수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루이자에 대한 정치적 미화가 강화됩니다. 그리고 이것은 아마 주앙 4세가 왕위에 오를 때 좀더 소극적이었으며 반면 아내인 루이자가 좀더 대담했던 것으로 묘사되는 계기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시기에 아마 루이자의 유명한 일화가 널리 퍼지게 되었을 것입니다.     


루이자는 남편이 에스파냐에 대항해서 포르투갈의 국왕이 되려한다면, 그녀 역시 에스파냐에 의해서 어려움을 겪을 것이라는 경고를 받았다고 합니다. 그에 대해서 루이자는 평생 공작부인으로 사느니 하루라도 왕비로 살겠다라고 답을 했다고 합니다.     


루이자 데 구스망


이렇게 루이자의 위상이 확립되고 잉글랜드와의 동맹을 성사시키는 등의 일을 했기에 아마도 루이자의 섭정기 동안은 나쁘지 않은 상황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아폰수 6세가 성장하면서 점차 문제가 발생합니다. 궁정에서는 당연히 섭정인 왕비를 중심으로 귀족들이 연합해서 통치하는 것을 원하는 측과 국왕인 아폰수 6세를 중심으로 왕권을 통해서 통치해야한다는 측으로 나뉘게 됩니다. 그리고 1662년 아폰수 6세와 그의 측근들이 선제공격을 해서 루이자와 그 측근들을 몰아내게 됩니다. 특히 카스텔루 멜로르 백작 루이스 데 바스콘셀로스가 아폰수 6세를 도와줬고 결국 루이자는 1663년 궁정에서 은퇴해서 수녀원으로 갔으며 1666년 사망합니다.


루이자 데 구스망, 포르투갈의 왕비


카스텔루 멜로르 백작은 포르투갈의 독립전쟁을 나름 성공적으로 이끌었습니다만, 아폰수 6세의 상태를 이용해서 최고의 권력자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당연히 궁정내 다른 인물들이 반발하는 원인이 되었는데 바로 아폰수 6세의 동생인 페드루가 가만히 있지 않았으며 결국 카스텔루 메롤르 백작은 권력을 박탈당했고 한동안은 해외로망명했었지만, 뛰어난 능력을 가진 인물이기도 했었기에 용서받고 다시 포르투갈로 돌아와서 국정에 관여했었다고 합니다.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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