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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엘아라 Nov 05. 2023

꼭두각시는 필요 없어! : 사보이의 마르게리타

왕족들 이야기로 읽는 포르투갈의 역사...열세번째

합스부르크 가문은 16세기 결혼을 통해서 거대한 영지를 얻게 됩니다. 황제 카를 5세는 할아버지로부터 제국의 황위와 오스트리아 공작령을, 아버지로부터는 부르고뉴 공작령을, 어머니로부터 에스파냐와 신대륙을 상속받았었습니다. 거대한 영지를 상속받은 카를 5세는 당대 최강의 군주가 됩니다만 곧 이 엄청난 영지를 그 혼자가 모두 통제하는 것은 불가능하게 보였습니다. 가족들과 함께 통치해나갔었지만 유지할수가 없었고, 결국 오스트리아와 제국의 황위는 이미 오스트리아 총독으로 있던 동생 페르디난트에게 물려줬으며, 더 부유한 부르고뉴 공작령과 에스파냐와 신대륙은 아들인 펠리페 2세에게 물려줬었습니다. 

    

이렇게 합스부르크 가문은 두 개로 나뉘었지만, 에스파냐쪽의 펠리페 2세는 여전히 이탈리아에서부터 이베리아 반도 전체 그리고 신대륙에 이르는 거대한 영지를 통치해야 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펠리페 2세와 그의 후계자들은 합스부르크 가문의 전통에 따라서 친척들의 도움을 받게 됩니다.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카를 5세의 여동생, 헝가리의 왕비, 네덜란드의 총독


합스부르크 가문에서는 가문의 여성들이 가문을 위해 여러 가지 일을 하는 것이 전통으로 이어졌었습니다. 이런 전통은 합스부르크 가문의 영지가 커졌지만 남성 후계자가 점차 더 줄어들면서 더 강화됩니다. 카를 5세의 고모인 마르그레테는 이전에 부르고뉴 공작령이었던 합스부르크-네덜란드 지역의 총독으로 일을했었습니다. 이후 카를 5세의 여동생으로 헝가리의 왕비였던 마리아나 카를 5세의 사생아 딸로 파르마 공작부인이었던 마르가레테 그리고 펠리페 2세의 딸이었던 이사벨 클라라 에우헤니아 등이 총독으로 일을 했었습니다.      


아마 이런 상황은 에스파냐의 펠리페 4세가 친척이었던 사보이의 마르게리타를 자연스럽게 포르투갈의 총독으로 선택하는 원인중 하나가 되었을 것입니다.      


마르게리타 디 사보이아, 만토바 공작부인, 포르투갈의 총독


사보이의 마르게리타는 사보이 공작 카를로 에마누엘레 1세와 에스파냐의 인판타 카타리나 미카엘라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사보이 공작령은 프랑스와 에스파냐 사이에서 굉장히 중요한 곳이었으며 이 때문에 펠리페 2세는 자신의 딸인 카타리나 미카엘라를 사보이 공작과 결혼시켰었습니다. 카타리나 미카엘라는 카를로 에마누엘레 1세와의 사이에서 10명의 아이를 낳았으며 이 때문에 막내아이를 낳다가 사망하기까지 했습니다.      

사보이의 마르게리타는 당대 유럽의 왕가들처럼 정략결혼으로 만토바 공작 프란체스코 4세 곤차가와 결혼했습니다. 둘 사이에서는 여러 자녀가 있었지만 딸인 마리아 밖에 없었으며, 만토바 공작령은 프란체스코 4세 곤차가의 동생에게 넘어가지만, 몬페라토는 여성 상속을 인정받아서 마리아가 상속권리를 가지게 되었으며 마르게리타는 몬페라토에서 딸의 섭정으로 잠시 일하기도 했었다고 합니다.     


마르게리타의 어머니, 에스파냐의 카타리나 미카엘라, 펠리페 2세의 딸


 1635년 사보이의 마르게리타는 사촌이었던 펠리페 4세의 요청으로 포르투갈의 총독으로 임명됩니다. 마르게리타는 합스부르크 가문의 직계 출신은 아니었지만, 어머니인 카타리나 미카엘라는 마누엘 1세의 큰딸인 이사벨의 후손이었으며, 아버지인 카를로 에마누엘레 1세는 마누엘 1세의 또 다른 딸인 베아트리스의 후손이었습니다. 이런 마르게리타의 혈통은 아마도 포르투갈에서 마르게리타가 총독이 되는 것이 나쁘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카를로 에마누엘레 1세 디 사보이아, 마르게리타의 아버지, 그의 할머니는 마누엘 1세의 딸이었던 포르투갈의 베아트리스입니다.


사실 마르게리타가 포르투갈의 총독이 된 가장 큰 이유는 당시 포르투갈의 정치 상황 때문이었습니다. 에스파냐의 펠리페 4세가 즉위한 뒤 올리바레스 백작은 권력자로 국가의 정책을 책임졌습니다. 올리바레스는 펠리페 4세의 통치 영지를 하나의 강력한 중앙 집권국가로 묶고 싶어했으며 이것은 포르투갈이 합스부르크 가문의 통치를 받게 된 뒤 누리고 있던 자치를 훼손하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당연히 포르투갈 내에서 불만이 커져갔는데, 포르투갈의 자치를 유지하던 귀족들은 어떻게든 포르투갈이 하나의 국가로 유지하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었습니다. 특히 1633년 총독이 되었던 디오고 데 카스트로는 포르투갈과 에스파냐 간의 중재를 위해서 노력했지만, 올리바레스의 정책을 바꾸지 못했고 결국 총독지위를 사임했었다고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에스파냐 측에서는 좀 더 자신들의 뜻을 잘 따르면서도 명분이 있는 사람을 총독으로 보내야할 필요가 있었는데 올리바레스와 그의 주변 인물들은 사보이의 마르게리타가 적당한 인물이라고 생각했기에 펠리페 4세에게 추전했고 펠리페 4세 역시 이를 승인했습니다.      


펠리페 4세


사보이의 마르게리타는 딸을 위해서 몬페라토에서 섭정으로 일한 경험이 있었기에 정부의 정책같은 것에 아주 무지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포르투갈에서 마르게리타의 지위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포르투갈 왕가와 연결고리가 있긴 했지만 마르게리타는 완벽히 외국인이었으며 이런 마르게리타가 포르투갈 사람들의 감정적인 면을 공감하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결국 마르게리타는 올리바레스의 정책을 지지하는 역할정도만 했으며 올리바레스의 정책 때문에 정치적 경제적 피해를 입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던 포르투갈 사람들이 더욱더 실망하는 원인이 되었을 것입니다. 게다가 마르게리타는 합스부르크 가문 직계 출신도 아니었으며 또한 포르투갈 출신도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마르게리타를 총독으로 임명한 것 자체가 이미 포르투갈을 무시하는 처사라고 생각하는 사람조차도 있었습니다.     


올리바레스 백작


결국 1640년 12월 포르투갈에서는 더 이상 합스부르크 가문의 통치를 받아들이지 않으려합니다. 포르투갈어로 Os Quarenta Conjurados로 40명의 음모자들 정도로 해석될수 있는 일단의 사람들이 리스본에 있던 왕국으로 쳐들어갔으며 당시 국무총리였던 미겔 데 바스콘셀로스를 암살하고, 함께 있던 마르게리타를 감금하고는 브라간사 공작 주앙을 포르투갈의 국왕으로 선포하고 독립을 선언합니다.      


마르게리타는 포르투갈 사람들을 진정시키려했지만 성공하지 못했으며, 독립 선언후 포로로 연금상태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포르투갈의 국왕 주앙 4세가 된 브라간사 공작 주앙은 마르게리타가 안전하게 포르투갈을 떠날 수 있도록 허락했습니다. 마르게리타는 이후 에스파냐 지역으로 떠나서 그곳에서 거주하다가 1655년 사망했습니다.      


포르투갈에서 체포당하는 마르게리타, 19세기 작품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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