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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엘아라 Nov 19. 2023

정략 결혼이지만 참고 살다보니: 인판타 카타리나

왕족들 이야기로 읽는 포르투갈의 역사...열다섯번째

후에 영어식이름인 캐서린이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지게 되는 브라간사의 카타리나는 8대 브라간사 공작 주앙 2세와 그의 아내인 루이자 데 구스망의 딸로 1638년 태어났습니다. 카타리나가 태어난지 2년후에 카타리나의 아버지인 주앙은 포르투갈의 국왕 주앙 4세가 되었으며 카타리나도 포르투갈의 인판타가 됩니다.      


브라간사의 카타리나, 포르투갈의 인판타, 후에 영국의 캐서린 왕비


포르투갈의 독립전쟁이 진행되면서 카타리나는 역시 중요한 인물이 되는데 포르투갈은 에스파냐와 싸우기 위한 동맹이나 아니면 에스파냐와 평화를 위한 동맹이 필요했으며 당연히 이런 동맹은 왕가의 결혼으로 이어지기에 1653년 언니가 죽고 난뒤 부모의 유일한 딸이었던 카타리나는 외교적으로 가치가 있었습니다. 카타리나의 남편후보는 여러명이 있었지만, 당대에도 역시 강대국중 하나였을뿐만 아니라 포르투갈의 전통적 동맹국이었던 잉글랜드가 포르투갈의 동맹으로 다시 떠오르게 되면서 카타리나의 남편후보로 잉글랜드 국왕인 찰스 2세가 유력해지게 됩니다. 사실 찰스 2세가 국왕이 된 것은 1660년 잉글랜드에 왕정이 복고 된 뒤였기에 이전까지는 포르투갈과 잉글랜드의 동맹이 진행되더라도 혼담까지는 이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왕정이 복고 된 뒤 잉글랜드에서는 결혼 동맹을 맺을만한 왕족이 있었기에 당연히 포르투갈과의 결혼동맹을 추진하게 됩니다.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국왕 찰스 2세


사실 포르투갈은 잉글랜드의 군사적 조력이 절실히 필요했었습니다. 그렇기에 카타리나와 찰스 2세와의 결혼 협상에서 포르투갈은 잉글랜드에 수많은 잇권을 보장합니다. 북아프리카 지역의 포르투갈 영토였던 탕헤르와 인도의 포르투갈 영토였던 봄베이 7개을 잉글랜드에 넘겼고 이것은 잉글랜드에 큰 도움이 되었는데 특히, 인도 서부지역에 대한 권리가 필요했던 잉글랜드에게 봄베이는 중요한 지점이기도 했습니다. 또한 브라질과 포르투갈령 동인도에서의 무역트특권과 포르투갈 내 잉글랜드인들의 상업적 종교적(잉글랜드는 종교가 개신교) 자유를 줬습니다. 또한 엄청난 규모의 현금도 넘기게 됩니다. 사실 포르투갈에게 이것은 큰 양보였습니다만 덕분에 포르투갈은 영국과 군사동맹을 맺게 되었으며 이것은 포르투갈의 독립에 엄청나게 큰 도움을 주는것이었습니다.     


1662년 카타리나는 잉글랜드로 떠났으며, 1662년 5월 20일 카타리나는 남편이 될 잉글랜드의 국왕 찰스 2세를 처음 만났고 만난 다음날 결혼식을 했습니다. 그리고 9월 30일 남편과 함께 런던으로 갔고 이제 카타리나는 캐서린 왕비라고 알려지게 됩니다.     


찰스 2세와 캐서린 왕비


사실 카타리나는 아마 잉글랜드에 왔을 때 너무나 큰 문화적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카타리나의 부모는 딸을 매우 보호하면서 키웠습니다. 카타리나는 수도원에서 자랐으며 세상의 위험과 번잡함은 물론 화려함과 즐거움에서 격리된채 성장했었습니다. 그렇기에 남편이 이미 수많은 여성들과 연애질을 했었으며, 심지어 자신의 공식 정부인 바바라 팔머를 카타리나의 시녀로 임명해버렸던 일에 경악을 했을 것입니다.      


이것은 결혼 초기 카타리나와 찰스 2세 간의 마찰로 이어졌을 것입니다. 카타리나는 처음에 남펴의 행동에 경악해서 바바라 팔머를 쫓아내지 않으면 돌아가버리겠다고 위협했었습니다만, 찰스 2세는 이에 대해서 카타리나의 포르투갈인 수행원들 모두를 포르투갈로 돌려보내는 것으로 맞대응했습니다. 결국 카타리나는 참고 살수 밖에 없었는데, 이것은 바바라 팔머의 기를 더 살려서 찰스 2세와의 사이에서 여러 아이를 낳았으며 궁정에서 왕비를 대놓고 무시하기까지 했었습니다. 그리고 찰스 2세 역시 결혼 초기에는 정략결혼한 아내 카타리나보다 바바라 팔머 같은 이들을 더 신뢰했었습니다.

     

레이디 캐슬마인, 바바라 팔머, 찰스 2세의 정부


아마 카타리나는 잉글랜드 내에서 자신의 위치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왕비였을 뿐만 아니라 포르투갈과 잉글랜드 간의 동맹의 상징이었기에 함부로 행동할수 없었습니다.  카타리나가 할수 있는 것은 오래도록 인내하고 잉글랜드 궁정에서 될 수 있는대로 마찰을 빚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특히 카타리나는 가톨릭 신자였고 결혼 협정을 통해서 신앙을 유지할수 있도록 보장되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여전히 가톨릭에 대한 불신을 강하게 가지고 있던 잉글랜드 사회에서 카타리나를 나쁘게 보는 원인이 되었으며, 카타리나에 대한 꼬투리를 잡기 위해 주시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카타리나는 고향인 포르투갈이 연결된 문제를 제외하고는 어떤 정치적 문제에도 관여하려하지 않았습니다.     


캐서린 왕비


시간이 지나면서 찰스 2세는 자신처럼 늘 정치에 조심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에 대해서 인내하면서 살아가는 아내 카타리나에게 점차 마음을 열게됩니다. 그리고 이런상황은 찰스 2세가 점차 아내를 대접하고 더 다정하게 대하는 원인이 됩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찰스 2세는 카타리나를 아내이자 왕비로 모든 것에 우선하게 해줬는데 자신의 정부들, 성격이 드센 바바라 팔머마저도 무시하고 아내를 가장 우선적으로 대접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심지어 아내가 다른 남자와 있는 모습을 질투하기까지 했는데 자신의 정부들이 다른 남자를 만나는 것에 대해서는 신경도 쓰지 않았지만, 왕비가 신하와 다정하게 대화하는 모습에는 질투를 하기도 했었다고 합니다.     

 카타리나는 찰스 2세와의 사이에서 여러번 임신했지만 아이들은 태어나지 못하고 중간에 잘못됐습니다. 이것은 카타리나에게 큰 상처였는데 특히 찰스 2세는 정부들과의 사이에서 수많은 자녀들을 얻었기에, 카타리나는 남편에게 후계자가 될 적자를 낳아주지 못하는 것에 힘들어했습니다. 하지만 찰스 2세는 애정을 가지게 된 카타리나에게 이 문제로 화내지 않았습니다. 그는 카타리나가 아파서 열이났고 아이에 대해서 헛소리를 할 때, 아내를 안심시키기 위해서 아이들이 태어나서 잘 있다고 이야기해주기도 했었으며, 적자를 얻기 위해서 카타리나와 이혼해야한다고 신하들이 주장했을때는 이를 거부하고 아내를 보호했었습니다.     


찰스 2세와 캐서린 왕비


시간이 지나면서 부부간의 신뢰는 더욱더 커졌는데, 1670년대 카나리나는 종교적 이유로 점차 더 고립되었습니다. 사실 찰스 2세는 의회와 대립을 원치 않았기에 반카톨릭 정책을 승인했습니다. 하지만 찰스 2세는 카타리나를 위해서 이런 정책에 어긋나는 특별승인을 해주기도 할 정도였습니다. 게다가 1670년대 후반 반가톨릭적 공격을 위해서 "교황주의자의 음모"라고 불리는 정치적인 목적을 가진 음모론이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전역을 휩쓸었습니다. 이것은 가톨릭들이 찰스 2세를 살해하려했다는 음모로, 사실 이 이야기는 지어낸 음모였지만 반 가톨릭적 성향이 컸던 잉글랜드에서 점차 더 커지게 됩니다. 그리고 이것은 가톨릭을 믿는 사람들에 대한 공격으로 이어졌는데 당연히 국왕의 가장 가까운 곳에 있던 가톨릭 교도였던 카타리나와 국왕의 정부였던 루이즈 드 케루얄은 공격의 대상중 하나가 됩니다. 하지만 찰스 2세는 아내인 카타리나는 절대 자신을 해칠만한 사람이 아니라고 공식적으로 선언했었으며, 상원 역시 정치에 개입하지 않고 그저 인내로 행동하던 왕비에 대해서는 호의적으로 대했기에 카타리나는 아무런 타격을 받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국왕의 정부였던 루이즈 드 케루얄을 프랑스 출신이었고 정치적인 영향력도 행사했었기에 궁지에 몰렸지만, 루이즈 드 케루얄이 늘 왕비에게 존경을 표했던 것에 호의적이었던 카타리나가 루이즈를 옹호하면서 루이즈에게 도움을 줬다고도 합니다.     


루이즈 드 케루얄, 찰스 2세의 정부


1685년 찰스 2세는 병으로 죽어가면서 아내인 카타리나를 걱정했는데 카타리나는 죽어가는 남편에게 살아가면서 그를 화나게 했다면 용서해달라고 이야기했다고 합니다. 이에 찰스 2세는 반대로 자신이 용서를 구해야한다고 이야기했다고 합니다.      


찰스 2세가 죽은뒤 카타리나는 처음에는 잉글랜드에서 지냈습니다. 특히 찰스 2세의 사생아 아들인 몬머스 공작 제임스 스콧이 반란을 일으켰다가 제임스 2세에게 진압되었을 때, 시동생에게 남편의 아들을 살려달라고 요청하기도 했었다고 합니다만 결국 성공하지는 못했었습니다.      

카타리나는 제임스 2세의 통치기 전체와 윌리엄 3세와 메리 2세가 즉위할때까지도 잉글랜드에서 지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카타리나의 잉글랜드 생활은 점차 더 어려워졌는데 특히 윌리엄과 메리가 즉위한 뒤 가톨릭에 대한 견제가 더 심해지고 정치적으로 둘과 맞지 않는 상황이 되면서 카타리나는 이제 더 이상 잉글랜드에 머물지 않고 고향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합니다.      


1692년 30년전 고향을 떠났던 카타리나는 이제 다시 포르투갈로 떠났으며 1693년 1월 리스본에 도착합니다. 포르투갈의 인판타이자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왕비였던 카타리나는 이제 고향에서 가족과 함께 지내게 됩니다. 카타리나는 자신의 정치적 경험을 바탕으로 동생 페드루 2세와 조카인 동 주앙(후에 포르투갈의 주앙 5세)에게 조언자가 되었으며 페드루 2세가 자리를 비웠을때나 병으로 아팠을때 잠시 섭정으로 일하기도 했었습니다.  


카타리나는 1705년 12월 31일 리스본에서 사망했으며 리스본에 있는 브라간사 가문의 영묘에 안장되었습니다.      


브라간사의 카타리나,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캐서린 왕비


카타리나는 잉글랜드 왕비로 있는 동안 잉글랜드에서 정치적으로는 큰 영향력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문화적으로는 큰 영향력을 발휘했는데 바로 차마시는 문화를 잉글랜드에 보급했습니다. 포르투갈은 인도항로를 개척했을뿐만 아니라 오래도록 동방무역의 중심이었기에 차마시는 문화가 보급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잉글랜드에서는 아직까지 차마시는 문화가 성행하지 않았었고 카타리나 이후 잉글랜드 더나아가서 영국하면 홍차를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또한 차를 마시는 문화는 사탕수수나 도자기 같은 여러 부속 수입품이 필요했고 이것 역시 잉글랜드를 중심으로 퍼져나가게 되면서 영국과 미국의 문화에 큰 영향을 줬다고 합니다.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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