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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엘아라 Dec 31. 2023

프랑스 아니고 포르투갈의 왕비 : 마리아나 빅토리아

왕족들 이야기로 읽는 포르투갈의 역사...열일곱번째

주제 1세의 왕비였던 에스파냐의 마리아나 빅토리아는 어린시절부터 약혼자가 있었지만 정치적 상황 때문에 혼담이 깨졌고 이것은 에스파냐의 외교 정책에 큰 영향을 줬었습니다.     


인판타 마리아나 빅토리아는 에스파냐의 국왕 펠리페 5세와 그의 두 번째 아내이자 파르마 공작령의 상속녀였던 엘리자베트 파르네세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펠리페 5세는 부르봉 가문출신의 첫 번째 에스파냐 국왕으로, 펠리페 5세는 프랑스의 국왕 루이 14세의 손자이자 프랑스의 루이 15세의 숙부이기도 했습니다. 펠리페 5세는 에스파냐 계승 전쟁이후 왕위에 오르긴 했지만 에스파냐 영지였던 여러곳을 양보해야했고, 국왕이 된 후 그는 이 지역을 다시 차지하기 위해서 전쟁을 했었고 이 때문에 프랑스와도 전쟁을 했었습니다. 이후 평화협정이 체결되면서 펠리페 5세의 딸인 마리아나 빅토리아가 프랑스의 국왕 루이 15세와 결혼하기로 결정했습니다. 1722년 4살이었던 마리아나 빅토리아는 프랑스 국왕의 약혼녀이자 미래의 왕비로 프랑스로 갔으며 프랑스 궁정에서 성장합니다. 미성년자였기에 정식 결혼은 마리아나 빅토리아가 성인이 된 후 하기로 했었지만, 마리아나 빅토리아는 미래의 프랑스 왕비였기에 프랑스 왕비로 교육받았으며 궁정내 모두가 좋아했었습니다.     

약혼녀인 마리아나 빅토리아의 초상화 앞에 있는 루이 15세


하지만 이 결혼은 성사되지 않는데, 이전 섭정이자 후에 총리로 혼담을 주도했던 오를레앙 공작이 사망한 뒤, 새롭게 총리가 된 부르봉 공작 루이 앙리는 오를레앙 공작 가문과 갈등관계였으며 루이 15세가 후계자 없이 죽을 경우 오를레앙 가문이 왕위에 오를 것을 우려했고 이 때문에 나이가 어려서 결혼하길 기다려야했던 마리아나 빅토리아와의 약혼을 깨고 바로 임신해서 결혼할 수 있을만한 나이의 여성과 루이 15세와의 혼담을 추진했습니다.  결국 1725년 7살이었던 마리아나 빅토리아는 약혼이 깨졌고 다시 에스파냐로 돌아가야했습니다.     


마리아나 빅토리아, 에스파냐로 돌아올 무렵


당연히 이 상황은 에스파냐와 프랑스 간의 관계를 악화시키는 것이었습니다. 에스파냐에서는 이 상황을 모욕으로 받아들였으며, 에스파냐는 이제 프랑스의 동맹이 아니라 프랑스의 숙적이었던 합스부르크 가문이나 영국과의 동맹을 추진합니다. 이런 상황은 영국의 동맹으로 에스파냐와 사이가 나빴던 포르투갈에서 에스파냐와의 관계를 개선하기 위한 논의가 시도됩니다. 결국 포르투갈과 에스파냐는 서로의 왕위계승자와 인판타들을 결혼시키기로 결정합니다. 그래서 마리아나 빅토리아는 포르투갈의 왕위계승자인 주제와 결혼했으며, 마리아나 빅토리아의 오빠였던 페르난도는 주제의 누나였던 바르바라와 결혼했습니다.     


마리아나 빅토리아(왼쪽)과 포르투갈의 바르바라(오른쪽)


마리아나 빅토리아와 주제의 결혼생활은 나쁘지 않았는데 둘다 음악에 관심이 많았으며, 또한 종교에 열성이기도 했었습니다. 하지만 주제는 아버지처럼 정부들이 많았고 이에 대해서 마리아나 빅토리아는 불만이 컸었지만 뭐라 할 수는 없었다고 합니다. 둘 사이에서는 여러 아이가 태어났지만 딸들만 모두 영유아기만을 넘겼고 결국 첫째딸인 마리아를 왕위계승자로 인정하게 됩니다.      


주제 1세와 마리아나 빅토리아


마리아나 빅토리아는 포르투갈 궁정 내에서 정치적인 상황에 대해서 매우 불만을 품었습니다. 주제 1세는 모든 정책을 폼발 후작에게 맡겼는데 폼발 후작의 정책은 포르투갈의 고위 귀족들이 불만을 품는 것이었습니다. 게다가 폼발 후작의 정책은 에스파냐와의 관계를 악화시키는 것이기도 했기에 친정인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이 잘 지내길 원했던 마리아나 빅토리아와 마리아나 빅토리아의 딸들 역시 폼발 후작에게 불만을 품게 됩니다. 하지만 주제 1세는 정치에 관여하려하지 않았기에 외국인 왕비였던 마리아나 빅토리아가 남편보다 더 강하게 정치에 관여할 수 없었습니다. 게다가 만약 왕위계승자가 아들이었다면 좀 더 명분이 있었겠지만 주제 1세의 후계자는 딸인 마리아였고, 이 때문에 마리아가 적극적으로 정치에 참여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런 상황은 마리아나 빅토리아가 더욱더 폼발 후작에게 불만을 품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마리아나 빅토리아


주제 1세가 죽기전 뇌졸중을 알았으며, 이 때문에 섭정이 필요했었습니다. 그리고 주제 1세는 결국 아내인 마리아나 빅토리아를 섭정으로 승인했으며 1776년 11월 섭정이 되었지만 이 섭정은 3개월 정도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왜냐면 주제 1세가 1777년 2월 사망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마리아나 빅토리아의 정치적 영향력은 더욱더 커지게 되는데 왜냐면 딸이자 여왕이 된 마리아 1세는 어머니의 조언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이었습니다. 당연히 마리아나 빅토리아는 눈엣가시였던 폼발 후작을 궁정에서 몰아냈으며, 친정이었던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의 관계를 개선하기 위해서 노력했었습니다. 1777년 10월 마리아나 빅토리아는 에스파냐로 돌아가서 포르투갈과의 관게를 개선하기 위해 다시 한번 결혼 동맹을 추진했습니다. 그래서 외손녀인 마리아나 빅토리아를 오빠 카를로스 3세의 아들인 가브리엘과 결혼시키기로했고. 외손자이자 후계자였던 주앙과는 역시 카를로스 3세의 딸인 카를로타와 결혼시키기로 했습니다. 이렇게 에스파냐와의 관계를 더 좋게 하기 위해서 노력했었습니다만, 마리아나 빅토리아의 건강 역시 악화되었으며 이후 1778년 사망했습니다.


마리아나 빅토리아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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