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엘아라 Feb 11. 2024

내가 통치할꺼야! : 에스파냐의 카를로타 호아키나

왕족들 이야기로 읽는 포르투갈의 역사...열아홉번째

에스파냐의 카를로타 호아키나는 에스파냐의 국왕 카를로스 4세와 그의 아내인 파르마의 마리아 루이사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카를로타라는 이름은 할아버지인 카를로스 3세의 이름을 딴 것으로, 카를로타는 카를로스 3세가 가장 좋아한 손녀였다고도 합니다.      


에스파냐의 카를로타 호아키나, 1865년


카를로타의 아버지인 카를로스 4세는 원래 둘째아들로 형인 펠리페가 있었지만, 펠리페는 학습장애 뇌전증등을 앓고 있었으며 이 때문에 왕위계승에서 제외되었기에 카를로스 4세가 에스파냐를 이어받게 되었습니다. 그는 국정에 직접 관여하지 않고 주로 신하들과 아내인 파르마의 마리아 루이사에게 국정을 맡기고는 사냥등의 활동에만 집중했다고도 합니다. 이 때문에 그가 신임한 총리였던 마누엘 데 고도이는 왕비인 마리아 루이사와 국정을 의논했었습니다.     


카를로타의 어머니인 파르마의 마리아 루이사는 파르마 공작 필리포스와 그의 아내인 프랑스의 루이즈 엘리자베트의 막내딸로 태어났습니다. 루이즈 엘리자베트는 루이 15세의 장녀로 평화를 위해서 친척이기도 했었던 펠리페 5세의 아들인 파르마 공작 필리포스와 결혼했었습니다. 마리아 루이사의 언니였던 이사벨라는 마리아 테레지아의 아들인 요제프 2세와 결혼했습니다. 요제프 2세는 이사벨라를 끔찍하게 사랑했는데 정작 이사벨라는 남편보다 시누이에게 더 애정을 품었고 그 결과 요제프 2세가 여성 혐오에 빠지게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져오기도 합니다.


파르마 공작 가족들, 카를로타 호아키나의 외가쪽 가족들


마리아 루이사는 정치적 야망이 큰 여성으로 남편이 왕위에 오르기전부터 정치에 관여하려했으며 특히 마누엘 데 고도이의 정치적 지지자이기도 했습니다. 아마 이런 정치적 야망과 마누엘 데 고도이와의 밀접한 관계 때문에 마리아 루이사가 고도이는 물론 그녀가 만난 수많은 사람들과 연애관계라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었다고도 합니다. 그리고 이런 마리아 루이사의 성격과 평판은 딸인 카를로타에게 그대로 영향을 줬습니다.   

  

카를로스 4세와 가족들, 고야 작품

 

카를로타와 주앙 6세의 결혼은 주앙 6세의 외할머니였던 마리아나 빅토리아에 의해서 결정되었습니다. 에스파냐의 인판타이기도 했던 마리아나 빅토리아는 포르투갈과 에스파냐 사이의 우호를 강화하기 위해서 결혼 동맹을 추진했었습니다. 물론 포르투갈에서는 에스파냐가 더 많이 간섭할 것을 우려해서 이 혼담에 대해서 반대하는 이들도 있었습니다만 결혼은 성사되게 됩니다.      


1785년 6월 카를로타는 포르투갈의 주앙과 결혼했는데 이때 주앙은 18살이었던 반면 카를로타는 고작 10살이었습니다. 카를로타가 너무 어렸기에 사실 결혼 직후에는 부부라고 할수 없었으며 주앙은 아내가 자라길 가다려야했습니다. 둘의 첫째 아이인 마리아 테레자는 1793년에야 태어났습니다.      


주앙 6세 1888년


카를로타 호아키나는 포르투갈로 왔을 때 에스파냐 궁정과 매우 다른 분위기임을 알게 됩니다. 포르투갈 궁정은 에스파냐 궁정보다 더 엄격했었으며, 이 때문에 궁정에서 더 자유롭게 행동하는 카를로타에 대해서 쑥덕거리는 소문이 파다했었다고도 합니다. 게다가 카를로타와 남편인 주앙은 그다지 맞지 않는 사이였는데 주앙은 아내가 똑똑하다고는 생각했었지만, 나이차가 너무나 많이 났었기에 결혼초 그저 아내와 놀아주는 정도밖에 할 수 없었으며 이것은 아마 부부 사이에서 기본적인 바탕이 되었을 것입니다. 아마 카를로타 역시 자라면서 자신에 대해서 아내로 성인으로 덜 존중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남편에 대해서 불만을 가지게 되었을 것입니다. 아마도 이 때문에 카를로타는 더욱더 정치적인 야망을 가지게 되었을 듯합니다.      


주앙과 카를로타는 아홉명의 아이를 낳았지만, 부부는 애정어린 모습이 아니었기에, 아이들의 아버지가 주앙이 아니라는 소문마저 돕니다. 아마도 이것은 카를로타의 정치적인 행동과 더불어 역시나 소문이 파다했던 어머니 마리아 루이사에 대한 부정적 영향이 컸을 듯합니다.     


주앙 6세와 카를로타 호아키나, 1810년대


카를로타는 정치적 야심이 가득한 어머니 마리아 루이사를 보고 자랐으며 아마도 어머니가 에스파냐 왕비로 정치에 관여하는것처럼 자신도 당연히 포르투갈 정치에 관여할수 있다고 생각했을것입니다. 특히 남편이 시어머니를 대신해서 국정을 이어받았을 때, 어머니가 아버지를 대신해서 국정에 관여했던 것처럼 자신도 국정에 나서는 것이 당연하다고 느꼈을 것입니다. 하지만 카를로타의 남편인 주앙 6세는 카를로타의 아버지인 카를로스 4세와 달리 국정에 적극적으로 관여했었으며 또한 포르투갈 내에서 에스파냐 출신의 카를로타를 정치적으로 경계하는 모습도 분명히 있었습니다. 결국  카를로타는 1806년 남편이 아픈 틈을 타서 자신이 섭정이 되려는 음모를 꾸몄습니다. 이 시도는 실패했고 카를로타는 더욱더 정치에 배제되었고 주앙 6세는 아내를 추방하거나 헤어지지는 않았지만 더 이상 아내와 함께 하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1807년말 포르투갈 왕가는 브라질로 향했고 당연히 카를로타 역시 여기 있었습니다. 브라질에서 카를로타는 자신의 정치적 야망을 좀 더 강화하는데, 에스파냐 식민지에 대한 자신의 상속권리를 주장합니다. 나폴레옹은 카를로타의 아버지와 남동생등 에스파냐 왕실 가족을 모두 감금하고 이들의 권리를 박탈했는데, 카를로타는 에스파냐 인판타로 에스파냐의 영지에 대한 권리를 주장했고, 이것은 신대륙에 있는 에스파냐 식민지에 대한 영유권리 주장으로 이어졌다고 합니다.      


포르투갈 왕가의 브라질 도착


카를로타의 시어머니인 마리아 1세는 브라질에서 사망했고, 카를로타의 남편인 주앙이 국왕 주앙 6세가 되었고 카를로타는 포르투갈의 왕비가 됩니다. 이후 포르투갈 왕가가 다시 포르투갈로 돌아오게 되었을 때, 카를로타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페드루는 브라질에 남았지만 다른 가족들은 포르투갈로 돌아왔습니다. 하지만 포르투갈은 이전에 이들이 떠나기전 포르투갈과는 전혀 다른 상황이었습니다. 포르투갈에서는 자유주의가 유행했으며, 국왕 가족들이 포르투갈을 버리고 떠난 상황이나 다름없었기에 왕가에 대한 불신도 컸었습니다. 물론 국왕을 지지하는 사람들 역시 존재했었고 이들은 국왕이 이전처럼 절대주의적 권리를 가져야한다고 생각했었

습니다. 그리고 이 두 세력이 갈등을 빚게 됩니다.     


브라질에서 돌아온 포르투갈 왕가


주앙 6세는 포르투갈로 돌아온 뒤 헌법을 준수하기로 했지만, 카를로타는 당연히 이에 대해서 반발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뜻과 맞지 않는 남편이 아닌 자신과 뜻을 같이 하는 막내 아들 미겔과 함께 권력을 장악하기로 결정합니다. 미겔은 아버지를 가두고 퇴위하라고 강요했지만, 영국은 국왕을 지지했고, 주앙 6세는 자신에게 반란을 일으켰던 아들 미겔을 추방하고 아내인 카를로타도 추방하기까지 했습니다.      


미겔, 포르투갈의 미겔 1세


카를로타의 남편인 주앙 6세는 1826년 사망합니다. 그가 죽은뒤 포르투갈 왕위 계승은 복잡해지는데, 주앙 6세의 아들인 페드루는 아버지의 뜻에 반해서 브라질을 독립시켰을뿐만 아니라 브라질의 황제의 지위에 올랐습니다. 또한 다른 아들인 미겔은 아버지에 대해서 반역을 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주앙 6세는 후계자에 대해서 우울해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포르투갈에서는 보수주의자였던 미겔보다 자유주의자인 페드루를 지지했었습니다. 문제는 페드루가 포르투갈의 국왕이 되는 것을 브라질에서 원치 않았기에 결국 페드루는 딸인 마리아에게 양위했었으며 포르투갈 국내에서 지지세력을 모으고 있던 미겔을 달래기 위해서 미겔과 마리아를 결혼시키기로 했었습니다.      


페드루, 브라질의 황제 페드루 1세, 포르투갈의 국왕 페드루 4세


하지만 이런 상황은 카를로타와 전혀 무관했는데 카를로타는 가장 예뻐하고 지지해줬던 아들 미겔이 아버지가 죽은뒤 포르투갈로 돌아와서 정치적으로 세력을 넓혀갔고, 결국 조카인 마리아2세를 쫓아내서 스스로 왕위에 오를때까지 어머니인 자신을 신경쓰지 않고 부르지도 않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결국 이런 상황은 아마도 카를로타가 상심하는 원인이 되었을 것입니다. 결국 카를로타 호아키나는 1830년 1월 사망했는데 심지어 그녀가 상심해서 자살했다는 소문마저 있었다고 합니다.      


에스파냐의 카를로타 호아키나, 포르투갈의 왕비


카를로타는 아마도 포르투갈 정치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것은 자신의 당연한 권리라고 여겼을 것입니다. 그리고 포르투갈이 친정인 에스파냐와 적극적으로 동맹을 맺고 함께 나가려하지 않는 것에 불만이 많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카를로타의 생각은 포르투갈 내에서 그녀의 평판을 떨어뜨렸을뿐만 아니라 후대에까지도 나쁜 평가를 받는 원인이 되었을 것입니다.      


가계도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


이전 18화 정치적으로 필요하면 가까운 사이의 근친결혼도 당연하지!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