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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엘아라 Mar 10. 2024

실패한 황제 성공한 자유주의자 : 브라질의 페드루 1세

왕족들 이야기로 읽는 포르투갈의 역사...스물한번째

잠시 포르투갈의 국왕으로 페드루 4세라고도 알려져있는 브라질의 황제 페드루 1세는 포르투갈의 왕위계승자였지만 브라질이 독립을 원할 때 결국 브라질의 독립을 지지하면서 브라질에 남게 됩니다. 포르투갈에서 브라질이 독립하는데 큰 무력충돌없이 나름 평화적으로 독립할수 있게 도움을 줬으며, 이 때문에 페드루 1세는 통치 초기 당연히 브라질에서 인기가 있었습니다.     


브라질의 황제 페드루 1세, 1826년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브라질 내 정치 상황은 페드루 1세에게 불리하게 돌아가게 됩니다. 가장 먼저 독립후 헌법 재정에서 충돌이 일어납니다. 당연히 자유주의적 입장의 사람들은 입법권에서 황제에게 절대적 거부권을 주는 것을 거부합니다. 황제에게 너무 과한 권한을 줄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페드루 1세와 그 측근들은 강력한 행정부를 구성할수 있는 권리가 필요하다고 여겼습니다. 아마도 식민지에서 벗어난 브라질의 상황에서 강력한 행정부가 필요하다고 여겼을 가능성이 큽니다. 하지만 이것은 결국 황제의 권한을 강화하는 것이었으며 당연히 이에 대해서 반발하는 사람들 역시 많았습니다. 이런 대립은 너무 치열했기에 결국 페드루 1세는 강제로 제헌의회를 해산한뒤 자신의 권리로 헌법을 발표해버립니다. 물론 그 헌법은 이전에 제헌의회에서 제안한 대부분을 수용한 것이었지만, 황제의 이런 강제적 방법은 도리어 사람들에게 불만을 품게하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페드루 1세 역시 물론 행정부와 황제권이 완전히 분리되어야한다고 생각했었습니다. 하지만 이상과 현실은 달랐는데 특히 브라질처럼 막 독립한 나라에서 행정권이 강력하게 유지 되려면 황제의 권위에 의존해야하는 경우가 많았고 이 때문에 결국 정책이 실패할때마다 황제에 대한 불만이 더욱더 커지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페드루 1세와 그의 황후인 마리아 레오폴디나 여대공


또한 전쟁 역시 페드루 1세의 인기를 떨어뜨리는 원인이 됩니다. 특히 우루과이가 독립하려했을 때 이를 막기 위해서 전쟁을 한 것은 브라질에 너무나 큰 악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우루과이는 이전에 에스파냐의 식민지였지만 브라질이 독립할 때 브라질의 일부로 독립하게 됩니다. 하지만 우루과이 지역은 원래 에스파냐 식민지였고 당연히 포르투갈의 식민지였던 브라질과는 여러 가지 부분이 달랐으며 이런 문화적상황은 우루과이 지역에 공화주의자들이 더 힘을 얻는 원인이 되었을 것입니다. 결국 우루과이는 독립을 위한 무장 투쟁을 하게 되었으며 페드루 1세는 당연히 이를 진압하기 위해 군대를 보내게 됩니다. 하지만 이 전쟁은 브라질에 재앙이 됩니다. 이 전쟁에서 브라질은 패배해서 우루과이는 결국 독립하게 됩니다. 전쟁에서 패배한 것 자체로도 이미 큰 문제였지만, 더 중요한 것은 이 전쟁 때문에 징병제를 시행한 것에 대해서 브라질 내에 큰 반감을 일으켰습니다. 게다가 전쟁에 쓴 돈 역시 브라질에 큰 부담으로 남았습니다. 브라질은 오래도록 본국 포르투갈에 부를 뺏겼으며, 주앙 6세가 돌아가면서 역시나 브라질 내 금을 가지고 돌아갔습니다. 이 때문에 브라질은 독립 초기부터 재정적 문제가 있었는데 돈이 많이 드는 전쟁을 통해서 재정이 더욱더 고갈되면서 문제가 됩니다. 특히 금이 부족했기에 화폐가치가 낮은 구리를 통용하면서 브라질 화폐에 대한 신뢰와 가치가 하락했고 인플레이션 현상이 일어나게 됩니다. 게다가 주요 무역국이었던 영국 화폐에 대한 브라질 화폐의 가치가 추락하면서 수출에는 유리했지만 반면 수입품을 써야하는 브라질 일반 국민들에게는 더욱더 힘들어지게 됩니다.     


브라질 상황이 힘들어지면서 당연히 황제의 인기와 권위 역시 추락하게 됩니다. 황제의 권위가 흔들리게 되자 당연히 황제 주변 사람들은 자신의 지위 역시 위협받는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이들은 황제의 권위와 자신들의 권위를 강화하려는 시도를 하는데 이것은 도리어 브라질 사람들이 더욱더 큰 불만을 가지는 원인이 됩니다.  게다가 황제의 사생활과 관련된 문제 역시 크게 부각됩니다. 페드루 1세의 아내인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레오폴디나 여대공은 군주의 아내로 정치적 문제보다는 주변 사람들을 돌보는 일을 많이 했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마리아 레오폴디나에게 많은 브라질 사람들이 호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페드루 1세는 자신의 정부였던 도미틸랴 데 카스트로를 총애했을뿐 아니라 산토스 후작부인이라는 지위까지 부여해줬습니다. 당연히 브라질 사람들은 무정한 남편인 페드루 1세에 대해서 불만을 가지고 남편의 정부를 대놓고 봐야하는 황후를 불쌍하게 여기게 됩니다. 특히 황후가 유산한뒤 사망하자 많은 사람들이 황제와 산토스 후작부인이 황후를 모욕했고 황후가 이 충격으로 유산한 뒤 죽었다는 소문을 믿었으며, 황제의 인기를 더욱더 떨어뜨리는 원인이 됩니다.


도미틸랴 데 카스트로, 산토스 후작부인, 페드루 1세의 정부, 도미틸랴는 페드루 1세와의 사이에서 다섯아이를 낳았습니다.


브라질 내에서는 이렇게 페드루 1세와 그 측근들에 대한 불만이 커져가고 있었습니다. 특히 1830년 프랑스에서 7월혁명이 일어나면서 이 혁명의 물결에 대해서 브라질 사람들도 영향을 받았습니다. 브라질에서는 황제에 대한 불만이 커지고 있었고, 이런 혁명의 영향을 받으면서 공화주의자들이 점차 더 큰 힘을 얻게 됩니다. 게다가 황제의 측근들이 권위를 강조하려는 시도는 브라질 사람들의 심기를 더욱더 건드리게 되었습니다. 사실 이런 복잡한 상황에 대해서 페드루 1세는 이미 지쳐있었으며 황위에서 물러나려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결국  1831년 사람들의 시위가 일어났고 이들을 달랠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페드루 1세는 아들인 페드루 2세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퇴위해서 브라질을 떠나기로 결정했습니다.     


페드루 1세의 퇴위


1831년 4월 7일 페드루 1세는 퇴위문서를 전달했고 영국 전함에 탑승해서 바로 브라질을 떠났습니다. 브라질을 떠난 페드루는 이제 황제가 아니었기에 황제라는 칭호가 아니라 가문의 전통적 칭호인 “브라간사 공작”칭호를 씁니다. 그리고 그는 이제 좀 더 이상적인 활동을 하려합니다. 바로 딸의 왕위를 복원하는 것이었습니다. 페드루 1세는 아버지 주앙 6세가 죽은뒤 포르투갈의 왕위를 이어받아야할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브라질에서 그가 포르투갈의 국왕이 된다면 다시 포르투갈이 브라질을 식민지로 만들 수 있다고 우려했고 결국 페드루 1세는 딸에게 왕위를 양위했으며 동생인 미겔을 딸의 약혼자로 만들어서 섭정으로 일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는 동생 미겔이 헌법을 인정하고 입헌군주로 행동하겠다는 약속을 받은후 섭정으로 일할수 있게 했지만 미겔은 포르투갈로 돌아온 뒤 모든 약속을 뒤집고, 조카의 왕위를 뺏고 스스로 포르투갈의 국왕이 되었으며 보수주의자들의 지지를 받아서 절대군주로 행동했습니다. 그리고 포르투갈 내 자유주의자들을 탄압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포르투갈의 대부분은 미겔의 손에 들어갔으며 아조레스 제도의 유일한 섬 하나만이 겨우 자유주의자들의 손에 들어갔고 여전히 마리아 2세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있었습니다.      


페드루는 처음에는 영국이나 프랑스 같은 강대국의 힘을 빌어 딸의 왕위를 되찾으려했지만 영국이나 프랑스 사람들의 뜻과 달리 이 두나라 정부는 포르투갈의 상황에 관여하려는 의지가 없었습니다. 특히 영국 같은 경우에는 대놓고 미겔을 지지하는 고위층 인사도 많았을 정도였습니다. 결국 페드루는 스스로 딸의 왕위를 되찾기로 결심했습니다. 특히 그는 라파예트를 만나서 그에게 감명을 받았으며 라파예트의 손자를 비롯한 몇몇 사람들을 중심으로 작은 군대를 마련했습니다. 그리고 파리에 남은 딸 마리아 2세에게 신하로 딸의 왕위를 되찾아주겠다고 맹세를 한뒤 마리아 2세를 지지하는 세력이 남아있는 아조레스 제도로 떠났습니다.     


딸인 마리아 2세와 두번째 아내인 로이히텐베르크의 아멜리와 함께 있는 페드루


이후 페드루는 자유주의자들과 함께 동생인 미겔과 그의 지지자들인 보수주의자들과 전쟁을 합니다. 페드루와 그의 지지자들은 1832년 아조레스 제도를 떠나 포르투갈 본토로 진격합니다만, 전쟁은 쉽게 끝나지 않습니다. 특히 페드루와 그의 지지자들이 포르투를 점령한 뒤 미겔은 포르투를 포위하고 이들을 나가지 못하게 하고 포위공격을 지속했고 페드루는 더 많은 지역을 점령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결국 페드루와 자유주의자들은 결국 리스본을 점령하고 다미겔과 보수주의자들을 몰아내고 포르투갈 전역을 장악했고 1834년 5월 페드루의 딸인 마리아 2세는 다시 포르투갈의 국왕으로 복위할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전쟁에서 페드루는 건강을 크게 해쳤으며 결국 결핵으로 1834년 9월 사망합니다.      


페드루 1세의 죽음


페드루는 브라질에서 실패한 황제였지만 그는 브라질에 대한 애정을 평생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황제이긴 했지만 자유주의자로 여러 가지 일들을 자신의 양심에 따라 했습니다. 이를테면 그는 비록 자신에게 불리하더라도 선거의 결과를 받아들였으며 입법부의 법률을 거부하지 않았고 언론의 자유 역시 제한하지 않았습니다. 사실 이런 상황은 페드루의 브라질 내 인기를 떨어뜨리는 원인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페드루는 브라질의 상황을 자신의 이익을 위해 이용하지 않았는데 이를테면 포르투에 포위당해있는 동안 브라질의 정치가 일부가 그에게 섭정으로 다시 브라질로 돌아와달라는 제안을 했습니다. 하지만 페드루는 브라질 사람들이 원하는 것이라기 보다는 몇몇 이들이 자신을 이용해서 정치적 권력을 유지하려는 것으로 생각했고 만약 브라질 사람들 모두가 이를 원해서 선거를 통해서 뜻을 확정해서 브라질 의회의 공식적인 청원이 있다면 가겠다고 거부했다고도 합니다.     


또한 페드루는 브라질 내의 노예제도가 폐지되어야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사실 브라질 내 노예제도 문제는 페드루의 인기를 더욱더 떨어뜨린 원인이 되었습니다. 페드루는 자유주의자로 당연히 노예제도를 폐지해야한다고 생각했지만, 당시 브라질의 주요 생산물은 커피 같은 농산물이었으며 이런 농장들은 노예제도에 의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노예제도를 폐지하는 것은 브라질의 주요 산업에 타격을 줄수 있는 것이었으며 농장등을 운영하던 많은 브라질의 사람들은 당연히 페드루에 대해서 호의적일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페드루는 브라질을 떠난 후에도 노예제도가 없어져야한다고 생각했으며, 그는 죽기전 브라질사람들에게 노예제도를 당장 폐지할수 없다고 하더라도 점진적으로 폐지하라고 촉구하는 서한을 보내기도 했었습니다.     


1885년 커피농장의 노예들


페드루가 죽은뒤, 특히 브라질에서 페드루에 대한 평가는 너무나 바뀌게 됩니다. 페드루가 살아있었을 당시에는 그의 정적들은 페드루에 대해서 주로 비난을 했었습니다. 하지만 페드루가 죽으면서 그가 복위할 가능성은 없어졌고 정적들 역시 이제 페드루의 좋은 점을 이야기합니다. 페드루는 브라질 독립을 위해서 기여한 인물이며 또한 영웅적 행동으로 많은 이들에게 존경을 받을만한 인물이라는 평가가 지배적이 됩니다.      


브라질의 황제 페드루 1세는 확실히 실패한 황제였습니다. 그는 브라질의 내정을 확고히 하지 못했으며 브라질 사람들의 불만을 잠재우지 못했고 결국 황위를 버리고 사랑하고 애정을 가졌던 브라질을 떠나야했습니다. 하지만 페드루는 자유주의를 신봉하는 자신의 신념을 지켰으며 결국 페드루는 두 개의 왕관을 버린 인물이 아니라 두 개의 나라에서 독립을 위해 희생하고, 나라를 위해 희생한 인물로 남게 되었습니다.  


포르투에 있는 페드루 4세의 기마상Ⓒ António Amen과 브라질에 있는 독립기념비(페드루 1세와 두아내의 유해가 묻혀있습니다.)ⒸDanilo Prudêncio Silva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

-포르투갈에 있는 페드루4세의 기마상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Sto._Ildefonso_-_Praca_da_Liberdade_(8).jpg

-브라질의 독립기념비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Monumento_%C3%A0_Independencia_II.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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