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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엘아라 Feb 18. 2024

주앙 6세의 딸들

왕족들 이야기로 읽는 포르투갈의 역사...스무번째


포르투갈의 주앙 6세와 에스파냐의 카를로타 호아키나 사이에서는 세명의 아들과 여섯명의 딸이 태어났습니다. 그중 장남이 어린시절 사망한 것을 제외하고는 여덟명의 자녀가 성인으로 성장했습니다. 그리고 주앙 6세의 딸들은 역시 정치적인 문제에 휩쌓이는데 특히 에스파냐의 왕위계승문제와 엄청나게 연결이 됩니다.     


주앙 6세의 딸들과 에스파냐 왕가와의 가계도


주앙 6세의 첫 번째 딸인 마리아 테레자는 1810년 사촌이었던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의 인판테였던 페드로 카를로스와 리우데자네이로에서 결혼했습니다.


인판타 마리아 테레자


마리아 테레자의 남편인 페드로 카를로스는 에스파냐의 카를로스 3세의 손자로, 아버지는 카를로스 3세가 제일 좋아했던 아들인 인판테 가브리엘이었으며, 어머니는 포르투갈의 마리아 1세의 딸인 마리아나 빅토리아 였습니다. 그의 부모는 1788년 천연두로 사망했고, 할아버지 카를로스 3세도 같은해 사망했었기에 겨우 2살이었던 페드로 카를로스는 고아에 외톨이가 되었습니다. 이에 외할머니였던 마리아 1세가 요청해서 포르투갈로 왔으며 이후 페드로 카를로스는 에스파냐 왕족이긴했지만 포르투갈 왕족으로 크게 됩니다. 그는 1807년 외가쪽 가족들이 브라질로 피신할 때 함께 피신했었습니다.      


페드로 카를로스는 매우 부유했었으며 에스파냐 왕족이자 포르투갈 왕가의 친척이었기에 아마도 주앙 6세의 장녀인 마리아 테레자와 결혼하기 적당했을 것입니다. 게다가 전쟁중이었을뿐만 아니라 포르투갈 왕가는 브라질로 피신해있었기에 다른 왕가와 혼담을 진행하는 것도 힘들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주변에 가장 적당한 혼담 상대였던 페드로와 마리아 테레자가 결혼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아마도 어린시절부터 함께 지냈기에 부부는 서로를 잘 알고 있었으며 이 때문에 결혼생활은 매우 행복했다고도 합니다. 결혼 다음해에 아들인 세바스티안이 태어나면서 더욱더 행복했을것같습니다만, 결혼 2년후인 1812년 페드로 카를로스는 병으로 사망합니다.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의 인판테  페르로 카를로스

과부가 된 마리아 테레자는 아마 아들과 함께 조용히 살았었지만, 포르투갈로 돌아오면서 정치적인 문제에 합류하게 됩니다. 마리아 테레자는 보수주의자였으며 이 때문에 포르투갈에서의 자유주의에 불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어머니와 함께 보수적인 미겔을 지지했습니다. 그리고 미겔과 함께 매제이자 외삼촌으로 에스파냐의 왕위계승을 주장하던 몰리냐 백작 카를로스를 지지했었습니다. 몰리냐 백작 역시 보수주의자였고 이 때문에 미겔은 외삼촌과 연합관계였으며 마리아 테레자 역시 몰리냐 백작을 지지했던 것입니다. 몰리냐 백작의 아내이자 마리아 테레자의 여동생인 마리아 프란시스카가 1834년 사망했고 이후 마리아 테레자는 몰리냐 백작을 지지하기 위해서 외삼촌이자 매제였던 몰리냐 백작과 재혼했고, 동생의 자녀들을 돌봤었습니다. 몰리냐 백작을 지지하는 사람들과 이사벨 2세를 지지하는 사람들 간에 에스파냐에서 내전이 일어났지만, 몰리냐 백작을 지지하는 사람들(카를리스트)들이 패배했고 마리아 테레자는 남편과 함께 에스파냐를 떠나야했다고 합니다.     

나이든 후의 마리아 테레

마리아 테레자는 첫 번째 결혼으로 세바스티안만을 얻었는데 그는 부르봉-브라간사 가문의 조상이 됩니다.  


마리아 테레자의 아들,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의 인판테 세바스티안

   

주앙 6세의 둘째딸은 마리아 이자벨이었는데 그녀는 1816년 외삼촌인 페르난도 7세와 결혼하기로 결했습니다. 당시 페르난도 7세는 홀아비가 되었는데 후계자가 없었으며 이 때문에 후계자를 얻기 위해서 서둘러 신붓감을 찾았고 포르투갈쪽 조카였던 마리아 이자벨과 결혼했던 것입니다. 결혼이 확정되었을 때 마리아 이자벨은 브라질에 있었으며 결혼하기 위해서 에스파냐로 왔어야했습니다. 결혼후 마리아 이자벨은 곧 임신했고 다음해인 1817년 딸 마리아 이사벨을 낳았습니다. 그리고 곧 다시 임신했습니다. 하지만 1818년 12월 마리아 이자벨은 난산했고 결국 아이를 낳지 못한채 아이도 죽었고 스스로도 의식을 잃었습니다. 의사들은 마리아 이자벨이 사망했다고 생각했고 태아를 끄집어내기 위해서 제왕절개를 하기로 했었는데, 제왕절개하자 마리아 이자벨은 비명을 지르면서 깨어났지만 곧 사망했다고 전해집니다.마리아 이자벨의 딸인 인판타 마리아 이사벨 역시 두 살을 넘기지 못하고 사망했습니다.      


마리아 이사벨, 에스파냐의 왕비


마리아 이자벨의 외삼촌이자 남편이었던 페르난도 7세는 두 번째 아내가 죽은뒤 다시 후계자를 얻기 위해서 세 번째 아내를 얻게 됩니다. 세 번째 아내 역시 조카였지만 이번에는 양시칠리쪽 조카였던 양시칠리의 마리아 크리스티나였습니다. 그리고 마리아 크리스티나 사이에서 역시 두명의 딸을 얻었습니다. 문제는 부르봉 가문은 살리카법을 따르고 있었기에 페르난도 7세가 죽은뒤 왕위는 동생인 몰리냐 백작 카를로스에게 넘어갈것이라고 여겨졌습니다. 하지만 몰리냐 백작은 보수주의자였고, 그에 대해 불만을 품은 자유주의자들은 페르난도 7세를 설득해서 딸인 이사벨에게 왕위를 물려주라고 부추기게 됩니다. 부르봉 가문은 살리카법을 따르지만, 에스파냐는 여성의 왕위계승을 인정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죠. 결국 페르난도 7세는 법률을 고쳐서 딸을 왕위계승자로 만들었으며, 페르난도 7세가 죽은뒤 딸인 이사벨이 이사벨 2세로 즉위합니다. 당연히 페르난도 7세의 동생인 몰리냐 백작 카를로스가 이에 대해서 반발했으며  이후 에스파냐에서 내전을 지속되는 원인이 됩니다.      


에스파냐의 페르난도 7세


주앙 6세의 셋째딸인 마리아 프란시스카는 역시 언니인 마리아 이자벨과 함께 외삼촌이었던 몰리냐 백작 카를로스와 결혼합니다. 카를로스는 페르난도 7세의 동생으로 형인 페르난도 7세에게 후손이 없다면 왕위를 넘겨받을 인물이었습니다. 마리아 프란시스카는 언니 마리아 이자벨과 달리 세명의 아들을 낳았습니다. 이 세명의 아들로 인해서 몰리냐 백작 카를로스는 왕위계승에 대한 기대가 훨씬 더 커지게 됩니다. 페르난도 7세는 세 번째 결혼으로 두명의 딸만 있었기에 당연히 살리카 법을 따르는 부르봉 가문에서 몰리냐 백작이 왕위를 이을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마리아 프란시스카

하지만 에스파냐에서도 포르투갈처럼 자유주의자들과 보수주의자들이 대립하고 있었으며, 보수주의자였던 몰리냐 백작이 왕위를 잇는 것에 대해서 자유주의자들은 불만을 품었습니다. 그리고 결국 페르난도 7세가 왕위를 딸인 이사벨에게 물려주도록 만들었습니다.      


1833년 페르난도 7세가 죽고 이사벨이 이사벨 2세로 즉위하면서 갈등은 더욱더 심해졌으며 몰리냐 백작 가족들은 에스파냐에서 추방당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후 에스파냐에서는 몰리냐 백작을 왕위계승자로 지지하는 사람들인 카를리스트들이 적극적으로 활동을 했으며 결국 내전이 일어나게 됩니다. 마리아 프란시스카는 가족이 추방당하자, 먼저 포르투갈로 갔다가 영국으로 갔는데 1834년 병으로 영국에서 사망했습니다.      

몰리냐 백작 카를로


마리아 프란시스카는 세명의 아들을 낳았는데 이들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서 에스파냐 왕위계승을 주장했으며 오래도록 에스파냐에서 카를리스트들의 지지를 받았습니다.      


마드리드 공작 카를로스, 마리아 프란시스카의 손자, 카를리스트들이 지지하던 에스파냐 왕위계승요구자


주앙 6세의 위의 세딸들은 모두 에스파냐와 왕족들과 결혼했으며 이 때문에 매우 가까운 근친결혼을 했었습니다. 이것은 전형적인 포르투갈의 정략결혼 형태였었습니다. 하지만 밑의 세 딸들은 언니들과 전혀 다른 삶을 살았습니다. 밑의 세딸들은 포르투갈의 혼란한 정치 상황에 엮여서 아마도 혼담을 진행할만한 상황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게다가 복잡한 정치 상황에서 여러 가지 소문들이 떠돌았고 이 때문에 더욱더 결혼하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주앙 6세의 넷째딸은 이자벨 마리아였습니다. 이자벨 마리아는 아버지인 주앙 6세가 죽기 직전에 섭정으로 임명받게 됩니다. 주앙 6세는 죽을때쯤 믿을만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큰아들이자 후계자로 여긴 페드루는 멀리 떨어진 브라질에 있었으며 심지어 포르투갈의 국왕이 될수 있을지 의문이었습니다. 막내아들인 미겔은 아버지에 반역을 일으켰었죠. 심지어 여기에는 아내인 카를로타 호아키나가 관여했기에 카를로타 호아키나를 섭정으로 만들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남은 사람은 미혼으로 남은 딸중 가장 큰 이자벨 마리아였습니다. 이자벨 마리아는 1826년 포르투갈의 섭정이 되었습니다. 물론 여러 사람이 섭정단을 구성했고 이자벨 마리아는 이들의 의견을 따랐었습니다.아마 이자벨 마리아는 종교적이었으며 정치에 크게 관심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자벨 마리아는 오빠가 돌아올때까지만 섭정이 될 것으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복잡한 정치 상황 때문에 페드루는 포르투갈 왕위를 딸인 마리아에게 양위합니다. 그리고 딸인 마리아와 동생인 미겔을 결혼시켜서 포르투갈의 왕위를 이어가게 하기로 했습니다. 이자벨 마리아는 여왕의 약혼자인 동생 미겔에게 섭정 지위를 넘기려했지만 사람들의 반대에 부딪혔습니다. 그래서 조카인 마리아 2세의 섭정으로 계속 일해야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결국 이자벨 마리아는 동생인 미겔이 조카에게서 왕위를 뺏은 1828년이 되어서야 섭정 지위에서 물러났었습니다.  이자벨 마리아는 정치에서 물러난뒤 종교에 헌신하면서 살았고 1876년 미혼으로 사망했습니다.      


이자벨 마리아


주앙 6세의 다섯째 딸은 마리아 다 아순상이었습니다. 마리아는 태어난 2년뒤 브라질로 갔으며 어린시절 대부분을 브라질에서 보냈습니다. 그리고 포르투갈로 돌아왔을 때 15살 정도습니다. 문제는 포르투갈로 돌아왔을 때 정치적 갈등이 극심해져있는 상황이었고 이 때문에 야심 가득한 왕비 카를로타 호아키나에 대한 나쁜 소문이 파다했습니다. 그중에는 마지막 세자녀들인 미겔과 마리아 다 아순상과 아나 데 제수스 마리아가 주앙 6세의 자녀가 아니라는 이야기였습니다. 이 이야기는 당대 다양한 기록에 나타나는데 카를로타 호아키나가 남편과 함께 지내지 않는 동안 아이들이 태어났기에 국왕의 자녀들이 아니라는 이야기였습니다. 아마도 이것은 정치적으로 매우 극심한 갈등을 빚는 상황이었기에 이런 이야기가 나왔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마리아 다 아순상은 1834년 28살의 나이로 미혼으로 사망했습니다.     


마리아 다 아순상


주앙 6세의 막내딸인 아나 데 제수스 마리아는 주앙 6세의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그녀는 1살 때 브라질로 갔으며 어린시절을 브라질에서 보내게 됩니다. 그리고 1820년 포르투갈 왕가가 포르투갈로 귀환할 때 역시 함께 포르투갈로 돌아왔습니다. 아나는 아마도 보수주의를 지지했던 어머니 카를로타 호아키나와는 다른 인물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성향은 아마 아나가 왕가 사람이 아닌 사람과 사랑에 빠져 결혼하는 계기가 되었을 것입니다.     


아나 데 제수스 마리아


 아나는 1827년 12월 5일 룰레 후작의 아들로 후에 정치가로 이름을 날리게 되는  누노 주제 세베로 데 멘도사 로림 데 모우라 바레토와 결혼하게 됩니다. 아나가 누노 주제와 결혼한 이유는 정치적 목적이 아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왜냐면 둘의 첫 번째 아이는 결혼 22일 후인 1827년 12월 27일에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결국 아나와 누노 주제는 사랑에 빠졌고 공주는 혼전 임신했기에 왕가에서는 왕족이 아닌 누노 주제와 아나의 결혼을 허용하는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사실 아나가 결혼했을때는 조카인 마리아 2세의 통치기였지만, 오빠 미겔이 왕위를 노리고 있는 중이었고 결국 이런 상황에서 아나가 왕족이 아닌 귀족과 그것도 혼전임신으로 결혼한 것에 대해서 보수주의자들쪽에서는 크게 문제로 여길 정도였다고 합니다.      


누노 주제 데 멘도사 바레토, 1860년대


아나와 누노 주제는 아나의 오빠들인 페드루 4세와 미겔 1세 사이의 왕위를 두고 내전을 하는 것에 관여하고 싶지 않았고 이들은 망명하고 유럽을 여행했었으며 자녀들은 파리에서 태어났습니다. 하지만 결국 1835년 부부는 헤어지기로 결정하게 됩니다. 물론 가톨릭 교도였기에 이혼하지 않고 둘은 평생 별거하기로 결정하는데 남편인 누노 주제는 포르투갈로 돌아가서 정치가로 활약했지만 아나는 로마로 갔으며 1857년 사망했습니다.


    

아나 데 제수스 마리아


누노 주제는 후에 룰레 공작이 되었으며, 그와 아나의 후손들은 룰레 공작가문을 이룹니다. 특히 룰레 공작 가문은 미겔 1세가 포르투갈을 떠난뒤에도 포르투갈에 남은 브라간사 가문의 후손이라고 주장하면서 포르투갈 왕위계승을 주장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세 아이들과 함게 있는 아나 데 제수스 마리아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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