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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엘아라 Mar 17. 2024

미겔과 그의 여섯딸들

왕족들 이야기로 읽는 포르투갈의 역사...스물두번째

포르투갈의 미겔은 포르투갈의 국왕 주앙 6세의 막내아들로 어머니인 카를로타 호아키나가 제일 좋아한 아들이라고도 알려져 있습니다. 미겔은 어머니처럼 보수주의자였으며 이 때문에 포르투갈로 돌아온 뒤 입헌군주국으로 가려는 포르투갈 상황을 못마땅해했으며 아버지인 주앙 6세가 이를 승인하는 것에도 반발했습니다. 결국 그는 어머니와 함께 아버지를 유폐시켜서 권력에서 배제하고 자신이 권력을 잡으려했었지만 성공하지 못하고 도리어 추방당했습니다.      


이후 주앙 6세가 죽고 난뒤 포르투갈의 왕위계승문제가 애매해지면서 미겔은 다시 포르투갈로 돌아올 기회를 잡았습니다. 미겔의 형이었던 브라질의 페드루 1세는 정치적 상황 때문에 딸인 마리아 2세에게 포르투갈 왕위를 물려줬습니다. 하지만 마리아는 미성년이었으며 그는 브라질을 떠날 수 없었기에 결국 마리아가 성년이 되기전 까지 포르투갈을 안정적으로 통치할만한 사람이 필요했습니다. 그렇기에 페드루는 동생인 미겔에게 손을 내밀게 됩니다. 페드루는 미겔이 입헌주의를 받아들인다면 마리아 2세와 결혼을 약속하고 마리아2세가 성년이 될 때까지 섭정으로 일할 수 있게 해주겠다고 제안했습니다. 미겔은 이를 수락했고 곧 포르투갈로 돌아올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포르투갈로 돌아온 미겔은 형과의 약속을 뒤집었습니다. 그는 조카에게서 왕위를 뺏았고, 절대군주로 포르투갈을 통치했으며 그에게 저항하는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탄압했습니다. 마리아 2세는 포르투갈에서 발붙일수가 없었기에 아버지가 있는 브라질로 가야했습니다.     


미겔


이후 페드루 1세가 브라질 황위에서 물러난뒤 딸 마리아 2세와 함께 브라질로 돌아옵니다. 페드루는 딸의 복위를 위해 싸우기로 결심하고 포르투갈로 갔으며 결국 동생인 미겔을 몰아내고 딸을 다시 왕위에 앉혔습니다.      

형에 의해서 포르투갈에서 쫓겨난 미겔은 당연히 형편이 어려웠습니다. 그에게는 포르투갈의 국왕이었다는 것과 왕위계승을 주장할 권리 외에는 어떤것도 없었습니다. 게다가 그는 에스파냐에서도 경계의 대상이었는데 외삼촌이었던 몰리냐 백작 카를로스와 사촌이었던 에스파냐의 이사벨 2세간의 내전에서 외삼촌을 지지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미겔은 여러곳을 전전하다가, 바이에른 지방에 정착하게 됩니다. 그곳에 정착한 가장 큰 이유는 바로 바이에른쪽의 한 가문의 여성과 미겔이 결혼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미겔이 결혼한 대상은 뢰벤슈타인-베르테임-로젠슈타인의 아델하이트였습니다.      


뢰벤슈타인-베르테임-로젠슈타인의 아델하이트


뢰벤슈타인 가문은 통치 가문이라고 볼수 있긴 했지만 지위가 좀 애매했습니다. 뢰벤슈타인 가문의 선조는 비텔스바흐 가문 출신이긴했습니다. 15세기 팔츠의 선제후였던 프리드리히 1세는 선제후가 되는 과정이 좀 애매했습니다. 사실 그는 조카가 있었지만 조카의 상속권리를 무시하고 선제후가 된 것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은 정치적으로 문제가 될 것이기에 그는 조카를 입양해서 자신의 후계자로 만들고 자신은 결혼하지 않기로 합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프리드리히 1세는 사랑하는 여성을 만났으며 그녀와 비밀결혼을 했고 아이들이 태어났습니다. 이렇게 되자, 당연히 후계자 문제가 애매해질수 있었습니다. 결국 프리드리히 1세의 조카인 필립이 팔츠의 선제후가 됩니다. 필립은 정치적 상황을 고려해서 사촌들에게 영지를 부여해줬습니다. 이때 프리드리히 1세의 아들중 한명이었던 루드비히는 뢰벤슈타인 지역을 얻었으며, 후에 황제 막시밀리안 1세 루드비히에게 제국백작Reichsgraf 지위를 부여해줬습니다. 그렇기에 뢰벤슈타인 가문은 사실 비텔스바흐 가문의 분가이긴했지만 비텔스바흐라는 이름을 쓰지는 못했으며 또한 뢰벤슈타인 인근의 지역만을 상속받고 통치한 가문이었기에 그리 큰 힘이 있는 가문도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15세기 이후 제국내에서 통치가문으로 인정받았기에 재정적으로 매우 안정되어있기도 했습니다.      


뢰벤슈타인 백작 루드비히, 팔츠의 선제후 프리드리히 1세의 아들, 뢰벤슈타인 가문의 선조


아마 아델하이트와 미겔의 결혼은 정략결혼의 측면이 컸을 것입니다. 미겔은 돈이 필요했고, 뢰벤슈타인 가문은 “포르투갈의 국왕”이라는 미겔의 지위가 필요했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1851년 20살의 아델하이트는 거의 50살이 다 되가던 미겔과 결혼했던 것입니다. 아마 훗날의 아델하이트의 야심을 생각해보면 아델하이트는 아마도 이 결혼을 기꺼이 받아들였을 것입니다. 이름뿐이긴하지만 미겔은 포르투갈의 “국왕”이었으며 이 국왕과 결혼한 아델하이트는 “왕비”로 불릴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물론 이름뿐이긴하지만 말입니다.      


미겔과 아델하이트


미겔과 아델하이트는 일곱자녀를 뒀는데 그중 아들인 미겔을 제외하고 나머지 여섯명은 모두 딸들이었습니다. 그리고 미겔은 자녀들이 성인이 되기 전인 1866년 사망했습니다. 미겔은 처가인 뢰벤슈타인 가문의 도움으로 살았었으며, 미겔이 죽자 아델하이트 역시 친정에 의지해서 살았습니다. 하지만 야심이 컸던 아델하이트는 여섯딸들을 높은 가문으로 시집보내기 위해서 엄청나게 노력했었습니다. 하지만 “포르투갈의 인판타”라는 이름밖에 없는 딸들을 높은 가문으로 시집보내는 것은 엄청나게 힘든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아델하이트는 이를 성공했고 미겔의 딸들은 전 유럽의 왕가로 시집가게 됩니다.    

 

미겔의 위의 네아이들, 마리아다스베네스, 미겔, 마리아 테레자, 마리아 주제


미겔의 장녀인 마리아 다스 베네스는 아마 결혼하는데 가장 어려움이 컸을 것입니다. 장녀였으며 가난한 이름밖에 없는 인판타였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마리아 다스 베네스는 찾을수 있는 가장 괜찮은 신분의 사람과 결혼했습니다. 바로 에스파냐쪽 친척이었던 산 하이메 공작 알폰소 카를로스였습니다. 알폰소 카를로스는 카를리스트들이 에스파냐 국왕으로 주장했던 몰리냐 백작 카를로스의 손자이자 마리아 다스 베네스의 고모였던 포르투갈의 마리아 프란지스카의 손자이기도 했습니다. 몰리냐 백작의 후손들 역시 에스파냐 왕위계승문제에서 패배한뒤 에스파냐를 떠나 망명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산 하이메 공작의 형인 마드리드 공작 카를로스는 카를리스트들이 주장하는 에스파냐의 국왕이기도 했습니다. 

이전부터 미겔은 카를리스트들과 연합했었으며아마도 이것인 마리아 다스 베네스가 산 하이메 공작과 결혼할수 있었던 가장 큰 요인이었을 것입니다.     


마리아 다스 베네스와 남편 산 하이메 공작 알폰소 카를로


미겔의 둘째딸인 마리아 테레자는 사실 불행한 결혼생활을 했습니다. 하지만 그녀의 결혼으로 아마 동생들이 높은 신분의 가문과 연결되는데 큰 영향을 줬을 것입니다. 마리아 테레자는 1873년 18살의 나이로 자신보다 22살이나 많고 이미 두 번의 결혼 경험이 있는 애딸린 홀아비와 결혼했습니다. 하지만 이 결혼으로 마리아 테레자의 신분은 엄청나게 높아지게 됩니다. 마리아 테레자가 결혼한 상대는 오스트리아의 대공이었던 카를 루드비히로 바로 황제 프란츠 요제프의 동생이었습니다. 나이차가 많이 나는 카를 루드비히는 아내에게 그리 다정한 사람이 아니었으며 이 때문에 마리아 테레자는 남편과의 결혼생활이 그다지 행복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마리아 테레자는 남편의 전처자식들에게 너무나 다정했었는데 남편의 전처 자식들 모두가 마리아 테레자를 좋아했었다고도 합니다.

또한 오스트리아 궁정에서 마리아 테레자 역시 처신을 잘 했으며 이 때문에 궁정에서도 평판이 좋았다고 합니다. 특히 황후인 시씨가 늘 궁정을 떠나있었기에 마리아 테레자는 황제의 동생의 아내로 궁정에서 가장 높은 신분의 사람으로 궁정을 지켰으며 이것은 마리아 테레자가 좋은 평판을 얻고 나아가서는 힘을 얻는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카를 루드비히와 마리아 테제자, 그리고 카를 루드비히의 전처 자녀들


특히 황태자인 루돌프가 자살하고 난뒤 마리아 테레자의 남편은 추정황위계승자가 되었으며 마리아 테레자의 지위는 더욱더 올라갔습니다. 마리아 테레자는 남편이 황위에 오르기전 사망하자 미련없이 궁정을 떠나서 과부로 조용히 살아가려했습니다. 하지만 마리아 테레자의 의붓아들이자 후계자였던 페르디난트와 페르디난트의 후계자이자 조카로 마리아 테레자의 의붓손자였던 카를 모두가 마리아 테레자를 좋아했었습니다. 그렇기에 장래 황제의 어머니이자 할머니인 마리아 테레자에게 궁정에서 감히 함부로 대할 수 없었는데 심지어 황제인 프란츠 요제프 조차조 제수에게 조심스러워했을 정도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져옵니다. 


마리아 테레자,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테레지아 대공비


마리아 테레자는 특히 오스트리아 황실에 엄청나게 영향이 컸으며 또 의붓자식들에게도 헌신을 다했습니다. 이를테면 페르디난트가 귀천상혼했을 때 친했던 동생들마저도 그의 결혼식에 가는 것을 거부했을 정도였지만, 마리아 테레자는 딸을 데리고 결혼식에 참석했었으며, 페르디난트가 암살당했을 때 아내인 조피가 귀천상혼해서 합스부르크가문의 영묘에 묻히는 것을 거부당하자 “내 아들은 아내와 묻히길 원할거다”라면서 페르디난트와 조피를 영묘가 아닌 다른곳헤 함께 묻히도록 도와줬습니다. 그리고 합스부르크 가문에서 페르디난트의 자녀들을 홀대하자 황제를 직접찾아가서 황실에서 아이들에게 연금을 주지 않는다면 자신의 연금을 주라고 압박을 가할정도였다고 합니다.

마리아 테레자의 의붓손자이자 황제의 후계자였던 카를 역시 이 의붓할머니를 좋아했었으며, 특히 의붓할머니의 조카였던 파르마의 치타를 마리아 테레자의 집에서 만났으며 결국 그녀와 결혼하기까지 했습니다.     


카를과 부르봉-파르마의 치타의 결혼, 프란츠 요제프는 이결혼을 매우 흡족해했다고 합니다. 


미겔의 셋째딸인 마리아 주제 역시 1874년 17살에 자신보다 18살 많은 애 딸린 홀아비와 결혼했습니다. 하지만 언니인 마리아 테레자보다는 훨씬 더 괜찮은 조건이었는데, 상대가 바로 바이에른 공작 카를 테오도르로 시씨 황후의 동생이었습니다. 카를 테오도르는 첫 번째 아내가 아이를 낳은뒤 건강이 나빠져서 사망했으며 이에 큰 충격을 받고는 의학을 공부했던 인물이기도 했습니다. 첫 번째 아내가 죽은 7년뒤에 마리아 주제와 재혼한 것이었습니다. 부부는 매우 행복한 결혼생활을 했다고 알려져있는데 카를 테오도르는 의학을 공부해서 병원을 열었으며, 마리아 주제는 남편의 병원에서 간호사로 남편을 도와 일을 했을 정도라고 합니다.     


마리아 주제와 남편 카를 테오도르


미겔의 넷째딸인 아델군데는 1876년 역시 홀아비였던 바르디 백작이었던 파르마의 엔리코와 결혼했습니다. 엔리코는 파르마 공작 카를로 3세의 아들로 첫 번째 아내는 결혼 3개월만에 사망했다고 합니다. 엔리코는 카를리스트 전쟁에 역시 참전했었는데 아마도 언니들과의 관계와 카를리스트들과의 연결고리를 통해서 아델군데는 엔리코와 결혼할수 있었을 것입니다. 아델군데는 여러번 임신했지만 아이를 낳지 못했으며 이 때문에 조카들에게 엄청나게 애정을 쏟았다고 합니다.     

 

바르디 백작 엔리코와 아델군데


미겔의 다섯 번째 딸인 마리아 아나는 자매들중 가장 결혼을 잘했고 가장 행복한 결혼생활을 한 자매였습니다. 마리아 아나는 다른 자매들과 달리 사랑으로 결혼했는데 그 상대는 바로 룩셈부르크 대공의 후계자였던 기욤이었습니다. 마리아 아나는 기욤과 궁정에서 알게 된 뒤 서로 사랑에 빠졌다고 합니다. 하지만 당시 기욤의 아버지는 룩셈부르크 대공이 아니라 나사우 공작이었으며 나사우 가문은 개신교도였기에 가톨릭을 믿는 마리아 아나와 외아들의 결혼을 허락할수 없었습니다. 게다가 아마도 마리아 아나의 처지 역시 그가 결혼을 꺼리는데 어느정도 한몫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1890년 상황이 바뀌는데 1890년 네덜란드의 국왕이자 룩셈부르크의 대공이었던 빌렘 3세가 딸인 빌헬미나만을 남기고 사망합니다. 이렇게 되자, 네덜란드는 여왕인 빌헬미나를 받아들였지만 룩셈부르크는 “살리카법”과 “나사우 가문협약”에 따라서 네덜란드 왕가와 가장 가까운 남성 친척가문이었던 나사우 공작 가문으로 돌아갔으며, 빌렘의 아버지인 아돌프는 룩셈부르크 공작이 됩니다. 그런데 룩셈부르크는 대부분 가톨릭을 믿고 있었고 이 때문에 통치가문이 개신교를 믿는 것은 문제가 되었습니다. 결국 대공의 후계자인 기욤이 가톨릭을 믿는 아내와 결혼해서 그 자녀들이 가톨릭으로 성장하는 것이 가장 합리적이었으며 이런 조건들과 또한 마리아 아나의 언니들이 자리를 잡은 것 역시 한몫해서 1893년 마리아 아나는 룩셈부르크의 기욤과 결혼했습니다. 그리고 남편이 룩셈부르크 대공이 되면서 마리아 아나 역시 룩셈부르크 대공비가 되었습니다. 


룩셈부르크의 기욤 4세와 마리아 아나

   

미겔의 여섯 번째 딸인 마리아 안토니아는 1884년 22살에 역시 애딸린 홀아비였던 파르마의 공작 로베르와 결혼합니다. 로베르는 마리아 안토니아의 형부로, 언니 아델군데의 남편인 엔리코의 형이었습니다. 로베르는 첫 번째 결혼에서 12명의 자녀가 있었습니다. 비록 남편인 로베르는 이탈리아 통일로 영지 없는 군주였지만, 그는 여전히 부르봉-파르마 가문의 수장으로 높은 지위였으며 부유했습니다. 이 때문에 마리아 안토니아가 그와 결혼했을 것입니다. 로베르는 마리아 안토니아와의 사이에서도 12명의 자녀를 얻었습니다. 마리아 안토니아의 딸인 치타는 자주 이모인 마리아 테레자를 방문했었고 이때 마리아 테레자의 의붓손자인 카를 대공을 만나게 되었으며 결국 치타는 황제 카를의 아내로 오스트리아의 마지막 황후가 되었습니다. 



마리아 안토니아와 남편 로베르 그리고 로베르의 자녀들


사실 지금 보면 딸들을 저렇게까지 애딸린 홀아비에게 시집보내야했나라는 생각이 들지만, 19세기에도 유럽에서는 여전히 신분제도가 크게 작용했었으며 또한 부 역시 보장하는 것이었기에 아델하이트가 기를 쓰고 딸들을 높은 가문으로 시집보내려한 것이었을 것입니다.


수녀 복장의 아델하이트, 남편이 죽은 뒤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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