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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엘아라 Apr 07. 2024

어머니는 강하다 : 오를레앙의 아멜리

왕족들 이야기로 읽는 포르투갈의 역사...스물네번째



아멜리 도를레앙, 포르투갈의 아멜리아 왕비


오를레앙의 아멜리는 파리 백작 필리프와 그의 아내인 마리아 이사벨 도를레앙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아멜리의 아버지인 필리프는 오를레앙 가문의 수장으로 오를레앙 공작으로 프랑스의 국왕이 되었던 루이 필리프의 손자였습니다. 아멜리의 할아버지이자 파리 백작의 아버지였던 페르디낭 필리프는 루이 필리프의 장남으로 프랑스내에서 인기있었던 인물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마차 사고로 아버지 보다 미리 사망했고 그가 죽은 뒤 결국 루이 필리프는 왕위에서 쫓겨나게 되었습니다.    

   

아멜리의 아버지, 파리 백작 필리프 도를레앙


아멜리의 어머니인 마리아 이사벨은 오를레앙 가문 사람으로 남편과는 사촌관계였습니다만, 사실 마리아 이사벨은 프랑스 왕족이라기 보다는 에스파냐 왕족에 더 가까웠는데 왜냐면 마리아 이사벨의 어머니가 바로 에스파냐의 국왕 페르디난트 7세의 딸이자 여왕 이사벨 2세의 여동생이었던 에스파냐의 인판타 루이사 페르난다였기 때문이었습니다. 마리아 이사벨의 아버지인 몽팡시에 공작 앙투안은 루이 필리프의 아들로, 사실 에스파냐 왕위에 대해서 매우 큰 욕심이 있었다고 알려져있습니다. 그렇기에 이사벨 2세의 남편이 자녀들 얻을수 없다는 소문이 파다했었기에 이사벨 2세의 여동생과 결혼해서 에스파냐 왕위를 얻고 싶어했었다고도 합니다. 하지만 이사벨 2세는 자녀들이 있었죠. 하지만 앙투안은 야망을 버리지 않았고 이것은 다른 에스파냐 왕가 사람들과 마찰을 빚는 원인이 되었으며 이사벨 2세가 제부를 싫어하는 원인이 되었다고도 합니다. 하지만 마리아 이사벨의 여동생인 메르세데스는 이사벨 2세의 아들인 알폰소 12세와 결혼했고, 알폰소 12세는 그녀를 매우 사랑했었으며 또한 마리아 이사벨의 남동생인 안토니오는 알폰소 12세의 여동생인 인판타 아우랄리아와 결혼했기에 에스파냐 왕가와 다시 한번 가까운 사이가 되기도 했었습니다.      


아멜리의 어머니, 마리 이자벨 도를레앙, 파리 백작부인


아멜리는 오를레앙 가문 출신으로 프랑스의 공주였지만 할아버지인 루이 필리프가 왕위를 뺏기고 망명한 뒤에 태어났기에 그녀는 영국에서 태어났으며 영국에서 어린시절을 보냈습니다. 하지만 나폴레옹 3세가 몰락한 뒤인 1871년 가족들은 프랑스로 돌아갔으며 아멜리 역시 이후 프랑스에서 성장했었습니다.    


가계도

 

오를레앙 가문의 수장인 파리 백작의 딸이었기에 아멜리 역시 가톨릭 공주로 성장했는데, 가족들은 비록 왕위는 뺏겼지만 프랑스 왕위계승을 요구할수 있는 파리 백작의 딸로 높은 신분이었기에 신분에 맞는 가톨릭 왕가와의 혼담을 추진하는데, 특히 외할머니가 에스파냐의 인판타로 이사벨 2세의 여동생이었기에 에스파냐 왕가쪽이나 아니면 합스부르크 가문의 여러 분가중 하나등으로 시집가는 것을 고려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혼담은 잘 이루어지지 않았고 결국 다른 남편감을 찾았는데 찾은 사람이 바로 포르투갈의 왕위계승자였던 동 카를로스였습니다.     

카를로스 1세


1886년 아멜리는 종조부였던 오말 공작의 소개로 포르투갈의 왕위계승자인 브라간사 공작 카를로스를 만나게 됩니다. 카를로스를 만난뒤 아멜리는 그에게 호감을 갖게 되는데 매우 행기있고 상냥하며 자신감 넘치는 그의 모습에 매료되었다고 합니다. 그렇기에 아멜리는 카를로스가 자신보다 키가 작았음에도 별로 신경쓰지 않았습니다. 둘은 결혼을 위해서 만난 것을 알았지만 서로에게 호감을 느꼈으며 곧 결혼하기로 결정합니다.


카를로스와 아멜리의 결혼 사진

     

1886년 5월 18일 아멜리는 브라간사 공작과 결혼하기 위해서 프랑스를 떠났으며, 다음날 리스본에서 궁정 사람들을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5월 22일 둘의 결혼식이 열렸습니다. 결혼전 만나서 애정을 가졌었기에 부부는 서로를 사랑했으며 둘 사이에서는 아들인 루이스 필리프와 마누엘 그리고 태어나자마자 사망한 딸인 마리아 아나가 태어났습니다.     


두 아들인 루이스 필리페와 마누엘과 함께 있는 아멜리


1889년 시아버지인 포르투갈의 국왕 루이스 1세가 사망하고 남편인 카를로스 1세가 국왕이 되면서 아멜리 역시 포르투갈의 왕비가 됩니다. 왕비로 아멜리는 매우 우아하고 교양있는 여성이었으며 또한 사회사업에 관심이 많아서 여러 복지 시설등을 설립하는데 도움을 줬는데 결핵 퇴치등에 지원을 했다고도 합니다.      

포르투갈은 당시 입헌군주제였을뿐만 아니라 아멜리는 외국인 왕비였기에 아마도 더욱더 정치에 관여하려는 생각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저 사회사업에 더 집중했을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정치적 상황은 아멜리의 삶을 엄청난 불행으로 몰고갑니다.  

   

아멜리의 남편인 카를로스 1세가 왕위에 오른 시기는 포르투갈이 매우 어려운 시기였습니다. 당시 영국의 압박으로 아프리카 지역에서 주장했던 식민지 지역을 포기해야했었으며 또한 1890년 베어링 사건의 여파로 포르투갈에 엄청나게 경제적 불황이 지속되었으며 이 때문에 포르투갈은 국가 부채를 갚지 못할 지경이 되었습니다. 카를로스 1세는 당연히 이 문제를 해결하려했지만 정치가들에게 맡겨놓은 정부는 무능력했으며 결국 좀 더 강력한 정책을 펴는 인물에게 정부를 맡기게 됩니다. 영토 문제와 경제적 문제가 악화되면서 당연히 정부에 불만을 품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었는데, 특히 국왕이 정치에 너무 깊게 관여하려하는 모습을 보이자 더욱더 불만을 가진 사람이 많아졌습니다. 결국 이들은 국왕이 모든 책임이 있다고 여겼으며, 결국 국왕을 없애고 공화국이 되어야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마저 생겨나게 됩니다. 그리고 이들은 1908년 행동을 개시합니다.

   

카를로스 1세와 아멜리아 왕비

 

1908년 2월 1일  카를로스1세와 아내인 아멜리 왕비 그리고 두 아들인 루이스 필리페와 마누엘은 포르투갈 남서부 지역에서 머물다가 리스본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날 오후에 리스본에 도착한 왕실 가족들은 마차를 타고 왕궁으로 돌아갑니다. 사실 이때 리스본의 분위기는 별로 좋지 않았는데, 1월말 쿠데타를 우려해서 재판없이 사람들을 추방할수 있는 법률을 통과시켰고, 이에 대해서 당연히 반발하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왕실 가족들은 아무런 일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했고 그래서 오픈된 마차를 타고 호위로는 두명의 기병을 따르게 하는 것 외에는 아무도 없이 리스본 거리를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때 여러 사람이 군중들 사이에서 총을 발사했으며 이때 카를로스 1세는 목에 총을 맞고 즉사합니다. 사람들은 공포에 질렸으며 곧 혼란한 상황에 빠지게 됩니다. 그리고 또 다른 암살자가 나타나서 다시 왕실 가족들을 향해 총을 쏩니다. 이때 아멜리는 아마도 남은 아들들의 생명을 지켜야한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리스본에 도착했을 때 받은 꽃다발을 들고는 총을 쏘려는 사람을 향해 덤벼들게 됩니다. 아멜리는 계속해서 총격이 일어나는 동안 서서 암살자들에 대항했고 사람들에게 도움을 요청했었습니다. 총격이 지속되었기에 아멜리 역시 목숨이 위태로울수 있었지만 아멜리는 아마도 아들들을 구해야한다는 생각이 먼저였을 것입니다. 이 시도는 반만 성공적이었는데 장남인 루이스 필리페 역시 총에 맞았으며 얼마뒤 사망합니다. 하지만 막내아들인 마누엘은 부상을 입긴했지만 목숨을 건졌던 것입니다.     


암살범을 향해 꽃다발을 들고 대항하는 아멜리아 왕비의 모습


애정을 가지고 있었던 남편과 사랑하는 장남을 잃은 아멜리는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어린 나이에 준비 없이 국왕이 된 막내아들 마누엘 2세를 두고만 볼수는 없었습니다. 그렇기에 아멜리는 궁정에서는 은퇴했지만 아직 어린 아들이 국왕으로 일을 할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도왔었습니다. 하지만 아멜리의 남편과 장남이 죽은 2년 뒤인 1910년 결국 포르투갈은 공화국이 되었으며 아멜리는 아들인 마누엘 2세와 함께 영국으로 망명했으며 이후 고향인 프랑스로 돌아가서 살았습니다.     


아들인 마누엘 2세와 함께 있는 아멜리아 왕비


아멜리는 아들과 함께 망명생활을 했지만 결국 아들인 마누엘 2세는 1932년 어머니보다 먼저 사망합니다. 아멜리는 아들이 죽은 뒤 프랑스에서 조용히 살았었습니다. 하지만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면서 포르투갈 정부에서는 아멜리의 안전을 우려해서 포르투갈로 돌아올 것을 권유했다고 합니다. 물론 아멜리는 자신이 어려울 때 프랑스가 자신을 받아줬다고 이야기하면서 거절했다고 합니다. 이후 아멜리는 1945년 정식으로 포르투갈 정부의 초청으로 포르투갈을 방문했었습니다. 아멜리는 1951년 프랑스에서 사망했지만, 유언으로 남편과 아들 곁에 묻히고 싶어했으며, 당시 포르투갈의 권력자였던 안토니우 데 올리베이라 살라자르는 아멜리의 유해를 데려오기 위해서 전함을 파견했으며, 장례식을 국가 행사로 치뤘으며, 아밀리의 소원대로 남편과 아들 곁에  묻히도록 했다고 합니다.


아멜리아 왕비, 1945년

사진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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