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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엘아라 Mar 31. 2024

페드루 5세와 에스테파니아 왕비

왕족들 이야기로 읽는 포르투갈의 역사...스물세번째

페드루 5세는 포르투갈에서 매우 사랑받았던 인물이었습니다. 잘 생긴 외모에 매우 성실한 인물로 국민들의 사랑을 받았었습니다. 당연히 페드루 5세에게는 그에 걸맞은 사랑스러운 아내가 있었습니다만 둘의 마지막이 행복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페드루 5세


페드루 5세는 미성년으로 국왕이 되었으며 당연히 성년이 되면서 결혼해서 후계자를 얻어야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원한 신붓감은 바로 영국의 공주였습니다. 당시 영국은 세계 최강국중 하나였기에 당연히 영국의 공주와 결혼하는 것은 포르투갈의 국익에 매우 도움이 되는 일이기도 했습니다. 게다가 당시 영국의 국왕이었던 빅토리아 여왕과 그녀의 남편인 앨버트 공은 페드루 5세의 아버지인 페르난도 2세와 사촌관계이기도 했었습니다. 그렇기에 영국 공주와의 혼담은 더욱더 가능성이 커보였습니다.     


페드루와 루이스 그리고 빅토리아 여왕


하지만 이에 대해서 빅토리아 여왕은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는데 가장 큰 이유는 포르투갈의 국왕이 가톨릭이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영국에서 가톨릭 국가와의 통혼은 정치적으로 민감한 문제였습니다. 헨리 8세의 종교개혁이후 전통적으로 잉글랜드-영국에서 가톨릭에 대한 반감이 커는데 스튜어트 가문이후 영국에서는 가톨릭에 대한 반감이 더욱더 커졌었습니다. 특히 하노버 가문이 왕위를 얻게 되는 이유가 되는 1701년 법령(가톨릭교도이거나 가톨릭교도와 결혼한 사람들은 왕위계승권리를 박탈당하는 법령)이 통과된 이후 영국 왕가에서는 가톨릭교도와의 결혼에 대해서 더욱더 부정적이 되었으며 빅토리아 여왕 역시 여기에 영향을 받았습니다.     

대신 여왕과 앨버트공은 페드루 5세를 위해서 다른 신붓감을 찾았는데 그 신붓감이 바로 호엔촐레른-지그마링겐의 스테파니였습니다. 


     

호엔촐레른-지그마링겐의 스테파니



호엔촐레른-지그마링겐의 스테파니는 호엔촐레른-지그마링겐의 카를 안톤과 그의 아내인 바덴의 요제핀의 딸이었습니다. 호엔촐레른-지그마링겐 가문은 호엔촐레른 가문의 가톨릭 분가중 하나로 호엔촐레른 가문인 프로이센 왕가와도 친척관계였습니다. 두 가문은 종교개혁 이전에 분가했는데 프로이센 왕가는 독일 북부 영지를 상속받았고 이후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가 되었고 종교개혁이후 개신교를 믿었을뿐만 아니라 프로이센 공작령마저 상속받으면서 프로이센 왕가로 성장했었습니다. 반면 남쪽지역을 상속받은 가문의 분가는 가톨릭을 여전히 믿었으며 북쪽의 호엔촐레른 가문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힘이 약했습니다. 그리고 결국 나폴레옹 전쟁이후 독일 통일에 대한 논의가 활발해질 때, 남쪽의 호엔촐레른의 가톨릭 분가들은 영지의 독자적 통치를 포기하고 프로이센의 통치를 받아들이기로 결정했습니다.     


스테파니의 아버지인 카를 안톤 역시 이런 결정을 한 호엔촐레른 가문의 가톨릭 분가 일원중 한명이었습니다. 이후 카를 안톤은 가족과 함께 뒤셀도르프의 총독으로 이곳에서 일했으며 특히 당시 왕위계승자였던 프로이센의 빌헬름 왕자(후에 황제 빌헬름 1세)와도 친한 사이가 됩니다.     


호엔촐레른-지그마링겐의 카를 안톤, 스테파니의 아버지


빅토리아 여왕과 앨버트공은 스테파니가 가톨릭이며 호엔촐레른 가문과 연결고리가 크기에 페드루 5세에게 좋은 신붓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아마도 앨버트 공은 프로이센과의 연결고리를 강화하는 것을 선호했는데 아마도 그렇기 호엔촐레른 가문의 분가이자 프로이센 궁정과도 연결고리가 있었던 카를 안톤의 딸인 스테파니가 페드루 5세의 왕비감으로 적당하다고 여겼을 것입니다.     


하지만 페드루 5세는 처음에 이 혼담에 대해서 그다지 내켜하지 않았는데 가장 큰 이유가 스테파니가 나폴레옹과 연결된 가문 출신이라는 점이었습니다. 스테파니의 할머니는 마리 앙투아네트 뮈라로 나폴레옹 휘하 장군이자 나폴레옹의 매제였던 요아킴 뮈라의 조카였습니다. 나폴레옹 전쟁 당시 호엔촐레른-지그마링겐 같은 작은 나라들은 나폴레옹에게 잘 보이려했고 이 때문에 스테파니의 할아버지는 나폴레옹과 인척관계였던 뮈라의 조카와 결혼했던 것입니다. 

스테파니의 할머니, 마리 앙투아네트 뮈라, 호엔촐레른-지그마링겐 공비


뿐만 아니라 스테파니의 외할머니는 바로 스테파니 드 보아르네였습니다. 스테파니 드 보아르네는 나폴레옹의 첫 번째 아내인 조제핀의 첫 번째 남편과 친척관계였으며 조제핀의 보호아래 있던 여성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은 스테파니에게 지위를 부여하고 바덴 대공의 후계자와 결혼시켰고, 바덴 대공 역시 지위를 높이기 위해 이런 정략결혼을 수락한 것이었습니다. 스테파니의 이름 역시 역시 외할머니인 스테파니 드 보아르네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스테파니의 가계는 나폴레옹과의 연결고리가 너무 컸었는데 사실 포르투갈에서 나폴레옹은 침략자였으며 당연히 페드루 5세가 나폴레옹과 연결되는 가문을 껄끄러워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스테파니 드 보아르네, 바덴의 대공비, 스테파니의 외할머니


사실 페드루 5세의 할아버지이자 모두에게 존경받던 인물이기도 한 페드루 4세(브라질의 황제 페드루 1세)의 두 번째 아내인 아멜리 드 보아르네와 마리아 2세의 첫 번째 남편이었던 아우구스투스 드 보아르네 역시 모두 보아르네 가문 출신이었기에 나폴레옹과 연결되는 가문이라는 것은 그다지 의미가 없었으며, 빅토리아 여왕 부부 역시 이를 어필했다고도 합니다. 

호엔촐레른-지그마링겐 가계도

     


결국 페드루는 스테파니와 결혼하기로 결정하는데 아마 외교적 잇점이 컸으며 또한 스테파니의 성품 역시 마음에 들었을 것입니다. 스테파니는 어린시절부터 매우 자비로운 인물이었으며 뒤셀도르프에서 늘 가난한 이들을 돌봤었습니다. 그래서 뒤셀도르프에서 스테파니에 대해서 매우 좋게 평가했었다고 합니다. 게다가 스테파니는 교육도 잘 받았는데 이를테면 스테파니의 피아노 선생님은 클라라 슈만이었다고 합니다.      


1858년 4월 스테파니는 베를린에서 페드루 5세와 대리결혼을 했으며, 5월 리스본에 도착해서 페드루와 정식 결혼했습니다. 둘은 직접 만난후 서로에 대해서 더 잘알게 되었으며 아마 서로 사랑에 빠졌을 것입니다. 게다가 스테파니의 외모 역시 페드루 5세와 잘 어울렸으며 이것은 부부를 더욱더 인기있게 만들었을 것입니다.      

페드루 5세와 에스테파니아 왕비 그리고 포르투갈 왕가 사람들

스테파니는 포르투갈에 와서 포르투갈 식으로 에스테파니아라는 이름으로 알려지게 됩니다. 에스테파니아는 남편과 함께 여러 사회사업에 집중했는데 특히 병원과 자선기관을 만드는데 열정을 쏟았으며 이런 모습은 포르투갈에서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계기가 되었을 것입니다. 물론 에스테파니아가 포르투갈의 좋은 점만 본 것은 아니었는데 이를테면 어머니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에스테파니아는 포르투갈 상류 사회가 그저 사치만을 즐긴다고 비판했다고도 합니다.     


에스테파니아 왕비


하지만 행복은 오래가지 않았는데 결혼 1년이 조금 지난뒤인 1859년 7월 에스테파니아는 디프테리아에 걸려 사망합니다. 페드루 5세는 사랑하는 아내의 죽음에 큰 충격을 받았으며, 너무나 상심했습니다. 그는 국왕으로 당연히 결혼해서 후계자를 얻어야하는 의무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죽은 아내를 너무나 사랑했기에 혼담을 거부했으며, 아내를 잃은 슬픔을 잊기 위해서 더욱더 업무에만 집중했다고도 합니다. 결국 이렇게 홀로 지내다가 아내가 죽은 3년뒤인 1861년 페드루 5세 역시 사망했습니다. 


페드루 5세

사진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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