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엘아라 Jan 07. 2024

정치적으로 필요하면 가까운 사이의 근친결혼도 당연하지!

왕족들 이야기로 읽는 포르투갈의 역사...열여덟번째

오래전부터 유럽의 왕가에서는 정치적 목적으로 근친결혼을 해왔었습니다. 특히 이웃한 국가끼리는 자주 갈등이 있었고 전쟁으로 이어지기도 했습니다. 이런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서 두 나라간의 평화협정을 체결할 때 이 협정의 보증으로 두 나라의 왕가 구성원들끼리 자주 결혼했었습니다. 하지만 갈등이 한번의 결혼이나 평화협정으로 해결되는 일은 거의 없었고 결국 자주 협정을 맺었고 자주 결혼관계로 이어지게 됩니다. 이것은 자연스럽게 근친결혼으로 이어지게 되죠.      


중세시대 유럽을 지배했던 사상은 기독교(가톨릭)이었습니다. 교회법상 원칙적으로는 근친 결혼을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시대에 따라서 결혼허용범위가 좀 다르긴 했지만 심할때는 오대조까지의 조상중 공통조상이 있을 경우에도 근친혼으로 규정할때도 있었습니다. 물론 이렇게 되면 왕족들의 경우 거의 결혼할수 없을 정도가 될 수도 있었기에 나중에는 범위가 줄어들긴했었습니다만, 어쨌든 원칙적으로는 근친혼은 허용되지 않았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교회의 힘이 쎌 때 가능한 일이었으며 교회의 힘이 약해지게 되면서 상황은 바뀌게 됩니다. 교회의 힘이 강할때도 결혼무효를 각오하고라도 정치적 목적으로 근친결혼을 했었습니다. 그렇기에 교회의 힘이 약해지자 이제 자유롭게 근친결혼을 하게 됩니다. 특히 이베리아 반도나 오스트리아 같이 이교도와의 투쟁에 최근접했던 지역에 대해서 교회는 왕가의 정책에 너그러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들 지역은 전통적으로 가톨릭을 나라의 통합 사상으로 받아들였으며 결국 힘이 약해진 가톨릭 교회는 이들에 대해서 좀 더 너그러워졌고 이것은 정치적 목적을 위한 근친결혼을 허용하는 계기가 됩니다. 이렇게 한번 허용이 되면서 점차 근친결혼에 대해서 더 자유로워지게 되었는데 특히 합스부르크 가문이 에스파냐와 오스트리아 두 개의 분가로 나뉘게 되었을 때, 이 두 개의 분가간의 이익을 위해서 심한 근친결혼이 이루어지고 이를 교회에서 허락했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에스파냐의 이웃나라인 포르투갈에도 영향을 주게 됩니다.   


  포르투갈은 전통적으로 에스파냐나 에스파냐의 전신인 카스티야와 레온이나 아라곤 같은 이베리아 내 다른 국가들과 갈등관계에 있었고 자연스럽게 이들 나라들과 정략결혼이 이어졌고 결국 근친결혼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하지만 이때까지의 근친결혼은 비록 중복해서 이루어지긴했지만 사촌끼리의 결혼이 이어진것이었습니다.     


포르투갈의 아비스 가문과 이웃의 카스티야-에스파냐 왕가와의 근친결혼 관계




하지만 주제 1세시기가 되면서 좀 달라지게 됩니다. 주제 1세에게는 딸만 있었고 아들이 없었습니다. 포르투갈은 여성의 왕위계승권리를 인정하고 있었기에 딸만 있다고 해서 후계자 문제를 고민할 필요는 없었습니다. 딸이 왕위를 이어받으면 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물론 이전까지 포르투갈에서는 여왕이 포르투갈을 통치한적이 없었으며 또한 당대에도 여전히 여성군주에 대해서 불안감 역시 존재했었습니다. 게다가 가문의 문제 역시 있었습니다. 여왕이 즉위한다면 브라간사 가문의 남성 직계후손으로 이어지던 가계는 단절되고 이제 여왕의 남편 가문이 포르투갈을 지배하게 되는 것이기도 했었습니다.     


마리아 1세


브라간사 가문 입장에서는 계속해서 포르투갈을 브라간사 가문이 통치하길 원했으며 결국 이것은 가문내 사람과 결혼을 원하는 계기가 됩니다. 하지만 주앙 4세 이후 브라간사 가문의 후계자들은 방계 가문을 형성하지 않았고 그 결과 왕가의 직계 가족말고는 거의 없게 됩니다. 그래서 주제 1세의 장녀인 마리아 프란지스카 이자벨이 결혼할만한 브라간사 가문 사람은 숙부인 페드루 밖에 없었습니다. 브라간사 가문에서는 자연스럽게 마리아와 페드루와의 결혼을 진행하게 되었습니다.     


당연히 숙부-조카 간의 결혼은 너무나 가까운 근친결혼이었기에 거부감이 존재하긴 왕가에서는 정치적 목적으로 이런 결혼을 받아들였으며 교회에서도 역시 이런 결혼에 대해 사면을 해주는 것이 일상이었기에 이렇게 가까운 근친결혼을 하기에 이르게 됩니다.     


마리아 1세와 페드루 3세


하지만 포르투갈의 근친결혼은 여기에 끝나지 않습니다. 정치적 목적으로 마리아와 페드루의 아들이었던 주제는 자신의 이모였던 베네딕타와 다시 한번 결혼하게 됩니다. 이렇게 아주 가까운 관계였을뿐만 아니라 주제와 베네딕타는 나이차도 컸었는데도 이 결혼 역시 이루어지게 됩니다.



오래도록 정치적목적으로 근친결혼을 했었으며 결국 이런 상황은 이렇게 가까운 친척들간의 결혼으로 이어지게 된것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후에도 정치적 목적으로 가까운 사이의 근친결혼이 추진되었습니다.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

이전 17화 프랑스 아니고 포르투갈의 왕비 : 마리아나 빅토리아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