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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엘아라 Nov 26. 2023

페드루 2세의 두 아내

왕족들 이야기로 읽는 포르투갈의 역사...열여섯번째

 페드루 2세는 두 번 결혼했는데 이 두 아내는 정치적으로나 성격적으로나 정 반대의 모습을 보여줬습니다.     

페드루 2세


페드루 2세의 첫 번째 아내는 사보이의 마리 프랑수아즈였습니다. 마리 프랑수아즈는 사보이 공작 가문의 분가 출신인 느무르 공작 가문 출신으로 프랑스 궁정에서 느무르 공작 가문은 왕가의 인척으로 인정받았었습니다. 사보이 공작 가문에서 첫 번째 느무르 공작이 된 사람은 바로 사보이의 루이즈로 프랑수아 1세의 어머니였습니다. 루이즈는 프랑스의 샤를 5세의 증손자였던 앙굴렘 백작 샤를과 결혼했었는데, 이후 발루아 가문에서 남성 후계자가 사라지면서 결국 루이즈의 아들인 프랑수아가 루이 12세의 후계자가 되어서 국왕이 되었던 것입니다. 루이즈는 매우 뛰어난 인물로 프랑수아 1세는 어머니인 루이즈를 매우 잘 대해줬고 어머니에게 여러 지위를 줬는데 그중 하나가 느무르 여공작 지위였습니다. 루이즈와 프랑수아 1세는 이 지위를 루이즈의 이복 동생인 사보이의 필립에게 물려줬으며, 필립과 그의 후손들은 이후 사보이 가문의 프랑스쪽 분가로 프랑스에 정착해서 살았었습니다.      


루이즈 드 사보이, 앙굴렘 백작부인, 프랑수아 1세의 어머니, 첫번째 느무르 공작


포르투갈의 아폰수 6세의 권신이었던 카르텔루 멜로르 백작은 외교적으로 포르투갈의 편을 끌어들이기 위해서 노력했었으며, 특히 이미 국왕의 누나인 카타리나와 잉글랜드의 국왕 찰스 2세가 결혼해서 잉글랜드를 포르투갈에 끌어들였기에 프랑스를 끌어들이기 위해서는 비슷하게 프랑스 왕가와의 결혼 동맹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었습니다.      


이 당시 루이 14세의 경우 정략결혼시킬만한 왕족들이 부족했고, 또 에스파냐와의 관계를 고려했을 때 자신의 직계 친인척을 포르투갈 왕가로 시집보낼수 없었습니다. 그랬기에 아마도 프랑스 궁정에서 지위를 가지고 있으며 사보이 통치 공작 가문의 후손이기도 한 마리 프랑수아즈를 결혼시키기로 결정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1666년 포르투갈의 아폰수 6세와 사보이의 미라 프랑수아즈가 결혼합니다.     


아폰수 6세


포르투갈어로 마리아 프란시스카라는 이름으로 알려지게 되는 사보이의 마리 프랑수아즈는 프랑스 궁정에서 자라났으며 아마도 정치적으로 민감했던 많은 프랑스 궁정의 사람들처럼 자신의 역할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포르투갈에 왔을 때 왕비로 자신의 영향력을 강화할 생각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포르투갈에 와서 마리아 프란시스카는 상황이 자신에게 좋지 않을 것을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사실 마리아 프란시스카가 권력을 잡을 수 있는 기회는 바로 후계자가 될 아들을 낳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아폰수 6세의 장애는 아마도 마리아 프란시스카와 결혼생활을 영위할수 없게 했으며 이것은 마리아 프란시스카가 후계자를 낳을수 없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또, 아이를 낳을수 없다고 하더라도 남편인 아폰수 6세에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면 기회를 얻을 수 있겠지만, 아폰수 6세는 카스텔루 멜로르 백작을 전적으로 신뢰했었으며, 백작이나 주변 귀족들 역시 외국인인 왕비에게 권력을 주지 않으려 했을 것입니다.      

이런 상황은 마리아 프란시스카가 아폰수 6세를 더 이상 지지하지 않고 이후 일어나는 궁정음모에 마리아 프란시스카가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원인이 되었을 것입니다.      


마리아 프란시스카, 아폰수 6세의 왕비, 페드루 2세의 왕비


1667년 아폰수 6세의 동생인 베자 공작 페드루와 그의 측근들이 아폰수 6세와 카스텔루 멜로르 백작에 대해서 쿠데타를 일으키게 됩니다. 이런 상황에서 마리아 프란시스카는 자신의 주변 사람들을 데리고 수도원으로 은퇴해버렸고 이것은 정치적으로 프랑스가 이 쿠데타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반대하지 않는다는 신호로 여겨질수 있었습니다. 결국 페드루는 권력을 장악했으며 의회는 아폰수 6세의 왕위를 뺏지는 않았지만, 페드루를 아폰수 6세의 섭정으로 인정하고 그가 권력을 잡는 것을 승인하게 됩니다.     


페드루 2세


이 와중에 마리아 프란시스카는 조용히 아폰수 6세와 헤어질 결심을 합니다. 그녀는 아폰수 6세와 자신의 결혼이 “완성”되지 않았다고 주장하면서 아폰수 6세와의 결혼을 무효로 주장합니다. 그리고 마리아 프란시스카의 외삼촌으로 추기경이기도 했던 루이 드 부르봉(방돔 공작)가 마리아 프란시스카와 아폰수 6세의 결혼을 무효로 만듭니다. 그리고 아폰수 6세의 동생인 페드루와 1668년 결혼을 합니다. 아마 마리아 프란시스카와 페드루의 결혼은 정치적인 목적이 매우 강했을 것입니다. 마리아 프란시스카 자체가 프랑스와 포르투갈간의 우호를 상징하는 것으로, 페드루가 그녀와 결혼하는 것은 프랑스와의 정치적 동맹 관계를 지속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을 듯합니다.     


사실 남편을 쫓아낸 시동생과 결혼한 것은 지금봐도 스캔들거리였으며 당대에도 마리아 프란시스카가 이미 남편이 쫓겨나기 전 시동생인 페드루와 눈이 맞았고 그렇기에 페드루가 아폰수 6세를 쫓아내는데 적극적으로 지지했다는 이야기가 떠돌았으며, 그녀에 대한 부정적인 의견 역시 엄청나게 많았었습니다.      



하지만 결혼후 마리아 프란시스카의 영향력은 그렇게 크지는 않게 됩니다. 가장 큰 이유는 마리아 프란시스카의 평판이 너무 안 좋았던것과 후계자가 될 아들을 낳지 못했다는 것 때문일 듯 합니다. 마리아 프란시스카는 결혼 다음해인 1669년 딸인 이자벨 루이자 조제파를 낳았습니다. 페드루는 이 딸을 바로 자신의 후계자로 선언했고 인정을 받는데 가장 큰 이유는 아마도 브라간사 가문의 후손들이 거의 없었기에 일단 누구라도 후계자를 확실히 해 놓아야 내분이 적을수 있었기 때문이었을 듯합니다. 그리고 아이가 태어나면서 아마도 많은 이들이 더 많은 자녀들이 태어나서 후계자에 대해서 크게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라 여겼었습니다. 하지만 페드루와 마리아 프란시스카 사이에서는 더 이상 아이가 태어나지 않습니다. 아마도 마리아 프란시스카는 이에 대해서 엄청나게 압박을 받았을 것입니다. 이 때문에 마리아 프란스시카는 더 종교적이 되었으며 수녀원등을 세우고 기부하는 등의 일에 더욱더 신경쓰게 되었을 것입니다.      


인판타 이자벨 루이자, 페드루 2세의 장녀


1683년 9월 마리아 프란시스카의 전 남편이었던 아폰수 6세가 사망하고 현 남편인 페르두가 포르투갈의 페드루 2세가 되면서 마리아 프란시스카 역시 다시 포르투갈의 왕비가 됩니다. 하지만 겨우 3개월후인 1683년 12월 마리아 프란시스카는 사망했습니다.      


마리아 프란시스카


마리아 프란시스카가 죽은뒤, 페드루 2세는 매우 깊은 우울증에 빠지게 됩니다. 그는 아마도 형과 아내의 죽음이 자신의 삶의 한 장이 끝나는 것처럼 느꼈을 듯합니다. 그는 딸인 이자벨 루이자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브라질로 은퇴하려고까지 했다고 합니다만, 국왕의 고해 신부를 비롯해서 국왕에게 영향을 줄수 잇는 모든 이들이 페드루 2세를 설득했고, 결국 그는 우울증에서 벗어나서 국정을 다스리고 다시 한번 더 결혼해서 후계자가 될 아들을 얻겠다고 결정하게 됩니다.      


페드루 2세가 다시 결혼하기로 결정하면서 곧 신붓감을 찾아야했습니다. 물론 정치적으로 마리아 프란시스카가 프랑스와의 연결고리를 의미했기에 국왕이 다시 프랑스쪽 사람과 결혼하길 원하는 사람도 있었다고합니다. 하지만 페드루 2세에게는 딸 한명 밖에 없었으며 이 딸의 혼담마저 쉽게 풀리지 않았기에 후계자 문제가 매우 중요했습니다. 이전에 이미 후계자 문제 때문에 에스파냐 국왕이 포르투갈을 통치 했었는데, 페드루 2세가 남성 후계자 없이 죽을 경우 똑같은 문제가 또 발생할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었습니다. 그렇기에 가장 우선이 되는 것은 아마도 아이를 많이 낳아줄 여성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찾은 인물이 바로 팔츠-노이부르크의 마리아 조피였습니다.     


필츠의 마리아 소피아


팔츠-노이부르크의 마리아 조피는 팔츠 선제후 가문의 분가였던 노이부르크 가문 출신이었습니다. 마리아 조피의 아버지인 팔츠-노이부르크의 필립 빌헬름은 정치적으로 매우 민감한 인물이었으며 자신의 지위를 강화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노력을 했었습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자녀들의 결혼이었습니다. 특히 필립 빌헬름은 두 번째 아내인 헤센-다름슈타트의 엘리자베트 아말리와의 사이에서 17명의 자녀를 얻었고 14명이 성인으로 성장했습니다. 이것은 그와 그의 가족들에메 매우 큰 강점으로 작용합니다. 필립 빌헬름은 황제 레오폴트 1세가 두 아내를 잃고 난뒤 후계자 문제로 세 번째 아내를 얻으려하는 것을 알았을 때 아내를 닮아서 매력적이기도 했던 첫딸 엘레오노르 마그달레느를 황후 후보로 적극적으로 밀게 됩니다. 황제 역시 필립 빌헬름이 매우 많은 자녀들을 얻었으며 아이들도 건강하게 자란 것을 알게 되었기에 엘레오노르 마그달레느에 관심이 많았으며, 필립 빌헬름의 정적들이 이 결혼을 훼방놓으려 했음에도 결국 엘레오노르 마그달레느를 아내로 맞이했습니다. 그리고 기대대로 황후는 황제에게 두 아들을 비롯한 여섯아이를 낳아줬었습니다.      


팔츠의 엘레오노르 마그달레느, 레오폴트 1세의 황후, 황제 요제프 1세와 카를 6세의 어머니


 특히 1685년에는 필립 빌헬름은 친척이었던 팔츠 선제후의 뒤를 이어 팔츠 선제후령을 이어받기까지 했습니다. 이렇게 되자 언니가 황후였고 조카는 황제가 될 것이며, 아버지가 선제후였기에 정치적으로도 필립 빌헬름의 딸들은 가치가 있었으며 또한 자녀를 많이 낳을 것을 기대했기에 더욱더 인기가 높아지게 됩니다.     

페드루 2세와 포르투갈 사람들 역시 이것을 잘 알고 있었고, 후계자가 절실히 필요했었던 페드루 2세는 팔츠 선제후의 딸이자 황후의 여동생인 마리 조피를 왕비감으로 선택했습니다. 사실 이것은 정치적인 고려는 훨씬 덜 고려한 것이었습니다. 이를테면 1688년 루이 14세는 팔츠 선제후령에 대한 제수인 리젤로트(팔츠의 엘리자베트 샤를로테)의 권리를 들어서 팔츠 선제후령을 침공해서 전쟁을 했었습니다. 이것은 결국 프랑스와의 괸계를 고려했을 때 페드루 2세가 팔츠 선제후의 딸과 결혼하는 것은 프랑스와의 관계를 해칠수도 있는 문제였을 것입니다.      


페드루 2세

1687년 팔츠-노이부르크의 마리 조피는 페드루 2세와 결혼을 했으며, 포르투갈에서는 마리아 소피아라는 이름으로 알려지게 됩니다. 마리아 소피아는 자신보다 겨우 세 살 어린 18살의 의붓딸인 이자벨 루이자와 좋은 관계로 지냈습니다. 또한 남편과도 행복한 결혼생활을 영위하는데, 페드루 2세가 원하던대로 마리아 소피아는 결혼 다음해부터 결혼 12년동안 계속해서 일곱명의 아이들을 낳았었습니다. 마리아 소피아는 정치적 역할을 하는 것보다는 주로 아이를 낳고 키우며, 자선사업등을 하면서 살았었습니다. 


팔츠의 마리 조피, 마리아 소피아 왕비


마리아 소피아는 1699년 갑작스럽게 사망했습니다. 포르투갈에서는 페드루 2세의 첫아내였던 마리아 프란시스카에 대해서 부정적이었던 것과 달리 마리아 소피아에 대해서는 좋은 평가가 많았다고 합니다.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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